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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대하 3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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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대하 33:1-13)
 
저는 이제 3주에 걸쳐서 역대하를 중심으로 남왕국 유다의 왕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은 또 4번째 시간으로 므낫세왕에 대해 우리가 묵상해 볼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다루었던 아사라든가 여호사밧, 히스기야는 착한 왕들입니다. 성군이고 존경받는 왕들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다룰 므낫세 왕은 아주 못된 왕입니다. 악한 왕입니다.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왕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삶을 걸어가면 안 되겠구나.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삶이구나하는 것을 우리가 마음에 되세길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 므낫세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므낫세왕의 아버지는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히스기야는 역대하 32장 마지막절을 보면은 그가 죽었을 때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왕의 묘실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매장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만큼 성군이었고 존경받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존경받았던 히스가야로부터 태어난 아들이 어떻게 므낫세일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므낫세는 아주 악한 왕이었고, 하나님의 눈에 벗어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좀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므낫세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 동안 다스리며” 그는 열 두 살 때 왕위에 즉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55년이라는 아주 긴 시간동안을 통치했습니다. 자 그런데 그에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는 이렇게 악한 왕으로 평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다시 말하면 그는 아버지로부터 충분한 신앙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좋은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닐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지난주일 히스기야 왕의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죠. 그 때 히스기야의 나이기 39세입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는 벽면기도를 합니다. 벽을 향해서 그는 얼굴을 향하고 눈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물을 보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이나 더 연장시켜주십니다. 그리고 해시계를 뒤로 10도나 물러가게 하십니다. 

자 히스기야는 새로운 생명을 받은 이후에 3년 후가 되는해 바로 그가 42세 되었을 때 아들 므낫세를 낳게 됩니다. 어찌보면 사실 그는 죽을 수도 없었어요. 왜? 후계자가 없는데 어떻게 죽습니까? 왕이 죽으려면 후계자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는 다시 연장받은 3년 후에 그는 아들 므낫세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는 12년동안 아들을 키웁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죽었을 때 므낫세의 나이는 12세입니다. 그는 아직 어렸습니다. 충분한 가정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신앙적인 가르침을 전수받지를 못했습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어요. 내가 죽을 병에 결렸다가 다시 나아서 자식을 낳았다. 얼마나 감격스럽겠어요. 그러면 그 자식을 어떻게 대할 것 같아요. 그 자식을 그저 오냐오냐 하면서 키우기 쉽습니다. 해달라는대로 대해주고 책망 하지 않고, 그저 너무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아마 그렇게 키웠을지도 모릅니다. 더더욱 이 므낫세를 낳았을 때 히스기야의 영적상태는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난 주일 묵상을 했습니다. 그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다시 회복된 이후에 그의 마음에 뭐가 생겼어요? 교만함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은혜에 보답하지 아니함으로 그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은 그 때에 이 아들 므낫세를 낳았습니다. 아들을 예뻐하는 사이에 그는 아마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바른 신앙의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질 못했습니다. 결국 이 아들은 버릇없이 컸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되어있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그로인해서 므낫세와 같은 악한 왕이 남왕국 유다에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한 사실은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데 그들이 봄에 파종한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반드시 콩을 거둡니다. 팥을 심으면 반드시 팥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농사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을 보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는 자녀를 위해서 아무일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로부터 악외에는 거둘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므낫세의 악행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도가 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선한 업적을 다 뒤집어 엎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생각을 해보세요. 한 농부가 가면서 모종을 갖다가 심으면 뒤에서 아이들이 따라가면서 그 모종을 다 파헤치고 뒤엎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의 선한 업적을 다 뒤집어 엎어 버렸어요. 아버지가 세웠던 모든 종교개혁적인 업적들을 원점으로 돌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다시 우상의 제단이 섰습니다. 일원성신이 그 자릴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가증한 것들을 본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제단에 무당이 와서 굿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므낫세는 그토록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 오늘 성경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아멘. 그렇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으로 쫓겨난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다. 이 가증한 일을 원어로 보면 구역질난다 그런 뜻입니다. 이 구역질 난다는 일이 무엇이냐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제일 싫어 하신다는 것. 그런데 오늘 므낫세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3절, 4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원히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제단들을 쌓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어야 할 성전에 우상의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성전 마당, 두 마당, 안 마당과 바깥 마당에서 그는 일월성신을 경배합니다. 일월성신이란 무엇입니까? 해와 달과 별을 그들이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입니다. 

보통 가나안 사람들은 해와 달과 별들을 자신들의 신으로 숭배하곤 했습니다. 바로 그 일을 성전 안마당에서 우상숭배를 진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6절을 보니까 그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바로 그곳에서 몰렉 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예식이 있었는데 그는 불 가운데에 자기의 아들을 지나가게 해서 제물로 몰렉신에게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그는 아주 악에 중독된 사람이었고, 우상숭배에 노예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이 이방인들보다 오히려 더 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자 오늘 우리 9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심지어 그들의 악이 이방인들보다 더 극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므낫세가 유대민족의 꾀에서 백성들을 유혹해서 그들로 하여금 범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늘 날로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죄악이 예수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죄악보다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바로 알지못하고 경외하지 못하며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고,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교만과 악을 쌓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더 가증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 백성들이 므낫세의 꾀임에 빠져서 철저하게 타락해버렸어요. 오히려 그 땅에서 쫓아낸 이방인들보다 더 심각한 악을 자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므낫세에게 그냥 계시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경고하셨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 오늘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왜 듣지 못했을까요. 아마 영적으로 귀가 어두워졌을 거예요. 아니 들을 귀가 없었을 거예요. 아니 혹 들려도 의도적으로 그 말씀을 거부했을 거예요. 혹시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내 심령 속에 말씀하고 계시는데 내 양심을 두드리고 있는데 나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묵살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므낫세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거절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고 그들을 환란가운데 던져 놓으십니다. 자 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앗수르 왕의 지휘관들이 와서 남왕국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점령하고 므낫세와 왕을 쇠사슬로 결박해서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아니 앗수르 사람들이 공격했는데 왜 바벨론 사람들이 끌고 가느냐. 그 당시에는 앗수르가 강대한 나라였기 때문에 바벨론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 므낫세가 바벨론과 어떤 은밀하게 내통했다는 증거를 잡고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므낫세가 바벨론과 은밀하게 내통했다는 증거를 잡고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에 의하면 그 당시 포로들을 끌고 갈 때 앗수르의 풍습은 사람의 손만 묶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묶은 줄로 코도 얽어맸다는 것입니다. 코에 쇠창살을 통해서 코까지 끌고 가는 것입니다. 마치 개를 끌고 가듯이 한 나라의 왕을 짐승처럼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법을 떠나면 우리는 수치와 부끄러운 자리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숭배하던 므낫세의 죄의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이 고통 가운데 던져졌을 때 그는 그 환난 가운데서 조금씩 깨닫기 시작합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는 환난이 올 때 그 때서야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아! 내가 교만했구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여러분!! 그가 영화로울 때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꼭 환난을 당해야지 곤경과 고통을 당해야지 하나님께 귀를 열기 시작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뒤 늦은 후회이지만 그것은 역시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뉘우치고 회개하는 이 므낫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 주셔서 그를 다시 왕위에 앉혀 주십니다. 

오늘 13절 마지막 절에 보니까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 알았더라.’ 그는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요. 유대의 하나님인줄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존재요, 그분이 정말 심판의 주인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빠져 있으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분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신앙이 철이 들게 마련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일찌감치 신앙의 철이 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이정도면 봐주겠지. 이렇게 알면서 지은 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옆에 분들에게 한 번 이렇게 인사합시다. ‘신앙의 철이 빨리 드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빠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을 지극한 왕으로 존경하고 그에게 순종하냐는 것입니다. 오늘 므낫세는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는 우상들을 척결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워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좀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물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므낫세 자신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그 민족 자체를 용서하실 수 는 없었습니다. 이미 므낫세부터 남왕국은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므낫세 이후 50년이 지났을 때 바벨론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당하고 온 백성이 다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우리가 예배에 나올 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마다 기도할 때 마다 오늘도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소리를 듣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내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 그 음성을 들으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그렇게 찬양합니다. 540장에 보면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한단 말일세.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그렇습니다. 내가 주의 음성을 들을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나를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른 길로 가게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므낫세는 일찌감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영적으로 어두웠기 때문에. 이제 그의 죄는 용서 받았지만 남왕국 유다는 그로 인해서 큰 멸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24장 26절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실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므낫세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너무 크고 무겁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남왕국 유다를 존치 시키실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따져 올라가면 솔로몬과 다윗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있어요. ‘너희가 나의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면 내가 이 땅에서 너희를 결코 옮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들을 들어 옮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자! 우리 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이 내가 명령한 일들 곧 모세를 통하여 전한 모든 율법과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정하여 준 땅에서 옮기지 않게 하리라 하셨으나” 하나님의 율법과 율례와 규례를 네가 지켜 행하면 내가 이 땅에서 너희를 결코 옮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약속을 뒤 엎으십니다. 왜냐하면 므낫세의 죄악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바벨론으로 옮겨 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비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를 목도했습니다. 지난주일 새벽이었을 것입니다. 아시아나 777보잉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착륙하다가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그 사고에 대해서 많은 언론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열심히 승객들을 탈출시키고 구조한 여 승무원들의 얼굴이 사진에 많이 찍혔어요. 그리고 작은 영웅들이라고 칭찬을 써 놓았더라구요. 어느 신문을 보니까 일면 헤드라인의 기사에 이런 기사가 있어요. ‘매뉴얼의 기적’ 307명중 305명이 생존! 보통 비행기 사고가 나면 많이 죽죠. 그런데 그렇게 큰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 밖에 죽지 않은 물론! 나중에 세 명이 죽었지만요. 이것은 엄청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비상착륙했을 때 그들이 매뉴얼대로 비상시에 행할 규칙대로 행했기 때문에 많은 승객들이 안전하게 피신하고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침착한 승무원들의 칭찬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이 매뉴얼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나가는데도 하나님께서 이런 매뉴얼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매뉴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이에게 주신 율법과 계명과 율례. 우리가 비상시든 평상시든 우리의 인생에 그 매뉴얼대로 말씀의 매뉴얼대로 살아가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매뉴얼대로 그 말씀을 듣고 잘 순종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옆에 분들에게 인사합시다. ‘말씀의 매뉴얼대로 삽시다.’

대부분 우리는 이중적입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내 의지는 내 의지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각기 소견에 좋은 데로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요. 필요할 때만 쓰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꼭 싸울 때만 말씀 들고 나옵니다. 말씀 들고 싸우기 위해서 논쟁하기 위해서 말씀이 필요하지 내 삶을 위해 실천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어요. 말씀의 매뉴얼은 진정 우리가 복 받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로 제시하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녀 교육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교회 교육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름 행사가 시작됩니다만 우리가 이 어린아이들이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양육받고 저들이 신앙 안에서 잘 성장하면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이 교회의 미래가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해야 합니다. 그들이 앞으로 한국 교회를 이끌어 나가야할 주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로부터 좋은 신앙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바로 키우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여러분의 자녀들은 성장한 교우가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여러분의 말씀을 잘 듣습니까? 잘 안 듣습니다. 왜요? 우리가 별로 삶의 모범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요.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자녀들의 삶을 책임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린 기도를 중단하시면 안 됩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자녀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자녀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위해서 더 많은 기도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한 나라를 멸망 가운데로 인도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역사의 교훈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죄는 용서받아도 죄의 결과는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므낫세 개인은 뉘우치고 회개해서 그 죄는 용서받았지만 한 나라는 결국 멸망으로 이끌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죠.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 하나님 앞에 오면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므낫세 같은 악행의 왕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다 씻고도 남음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마다 희망을 얻습니다. 나같은 사람도 구원 받을 길이 있고 나 같은 사람도 용서받을 길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마다 우리는 희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 죄의 흔적은 결국 한 나라를 허물어뜨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역사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를 너무너무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분에게 한 번 인사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죄를 너무너무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죄 하면 아주 큰 죄, 살인 죄, 사기, 강간 이렇게 엄청난 것만 생각합니다. 아니예요. 여러분 그런 죄도 큰 죄이지만 우리 마음으로 짓는 죄가 더 큰 죄일 수 있어요.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남을 모함하고 헐뜯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 범죄한 자를 쓰신 적이 없으십니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넘어진 적도 있고 실수한 적도 있었지만 그들은 곧 회개하여 하나님께 다시 정결함을 나왔습니다. 범죄한 왕들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그들은 심판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이 땅에 그리스도인과 한국교회가 이 말씀 앞에서 돌아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보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으면 안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역대하 33장 2절에 므낫세는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다고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배워갔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혹시 세상의 가치관을 본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악행을 부러워함으로 본받는 것은 없느냐. 혹시 우리 마음속에 물질의 우상 맘몬주의가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혹 우리 마음속에 쾌락의 우상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혹은 명예의 우상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속화의 물결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그 모든 것은 가증한 것을 본받는 결과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국회에 계류중인 법이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법이죠. 성적 소수자에 대한 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결코 용납되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적 소수자에 대해서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물론 사람은 미워할 필요가 없지만 만약 동성애를 합법화한다면 우리 사회의 윤리는 허물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마 10년 20년 지나면 이런 일이 있을 거예요. 아들이 결혼한다고 남자를 데리고 오고 딸이 결혼한다고 여자를 데리고 오고 여러분 이런 일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오해입니다. 

동성애가 합법적으로 인정이 되면 우리 사회는 성적으로 타락해질 것입니다. 또 에이즈의 범람 에이즈는 원래 동성애로부터 왔잖아요. 이미 창세기를 보면 소돔이라는 곳에 소돔이라는 뜻이 동성애에요. 소돔 지역에 이미 동성애가 있었어요.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합법화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것은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고 가정을 파괴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속의 잘못된 흐름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그 흐름을 배워 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다 먹는데 먹으면 어때? 우리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010년 기독교 윤리 실천에서 한국의 성인남여 천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한국교회를 신뢰합니까?’ 신뢰한다는 사람은 18.4%에 불과했고 한국교회를 불신한다는 사람은 48.3%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 개신교인들이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고 생각하는가? 일치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14%에 불과하고 그렇지 않다는 사람이 50.8%입니다. 한국교회 개신교인들은 믿을 수 없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종교에 대한 신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로마 가톨릭는 35.2% 불교 31.3% 개신교에 대한 신뢰 18%입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죠. 종교별로 호감도를 조사하니 그것도 비슷했습니다. 불교에 대한 호감도는 31.5% 로마가톨릭은 29.8% 개신교는 20.6%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것은 한국교회가 진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근래에 한국에 있는 대형교회들이 많은 문제를 양산해 냈습니다. 그것이 PD수첩, 추적 60분 같은 곳에 침소봉대 확대되어서 공개되니까 결국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게 반성해야 할 일이에요. 

대형교회 세습문제들 어떤 헌금에 대한 유용 범죄, 부패 이런 걸로 너무나 가득차 있어요. 또 목회자들의 윤리적인 수준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성적인 문제, 물질의 문제만 봐도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모습이 대형교회를 바라보면서 실망을 하는데 이것이 모든 교회를 향한 문제로 확대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세습의 문제 때문에 물질의 유용 때문에 헌금의 잘못된 사용 때문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추락된 한국교회의 문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매뉴얼로 돌아와야 해요. 회개하는 한국교회를 통해 희망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얼마전 이성희 목사님이 쓴 책을 봤더니 거기 아주 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요. 영으로 걸으라라는 책인데 아주 전통적인 한옥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 고양이 새끼를 낳았어요. 고양이가 새끼를 나니까 밖이 너무 추울 것 같아서 제일 따뜻한 부뚜막 위에 교양이를 올려다 놓았습니다. 이 아이가 틈만 나면 문을 열고 고양이 새끼를 봐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밖에 잠깐 물을 뜨러 나갔어요. 그런데 솥단지 위에 뜨거운 물이 펄펄 끓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고양이의 새끼를 본다고 보다가 그만 떨어져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우연히 얼굴만 빼고 다 화상을 입었어요. 병원에 급히 후송되었지만 의사는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화상이 퍼졌기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죽을 수 밖에 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이모가 보니까 이 아이가 너무 안됐어요. 화상이 너무 심해 세포가 죽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모는 이 아이가 죽어도 천국 가야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회개할 것이 있으면 하라고 조카에게 자꾸 압력을 넣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화가 나서 나 아픈데 자꾸 회개하라고 한다고 이모 밉다고 나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몇일 후에 이 아이가 말해요. 이모 나 이제 회개할 것 있다고 생각나는게 있다고 그래서 이야기 해보라 하니까 이 아이가 30분을 이야기 하는데 이모는 눈물로 그 고백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게서 이 어린 생명을 귀하게 받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도록 기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다음 날이었어요. 의사가 회진하다가 이 아이의 화상을 다시 살펴보았는데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의 화상이 놀랍게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었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얼마 후에 정상적인 아이로 퇴원할 수있었고 지금은 성년이 되어 아주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의 역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아이가 모든 것을 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허락해 주셨어요. 

회개는 바로 회복인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생명, 희망인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을 회개하는 길 밖에 없어요. 우리의 인생이 사는 길은 회개하는 길 밖에 없어요. 죄악의 자리에서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말씀의 매뉴얼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우상을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이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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