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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 (막 1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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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주이신 예수님 (막 15:11-15)

오늘 본문인 막15:12 말씀을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27:22 말씀을 보면, 이 질문을 이와 같이 기록합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헬라어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야와 같습니다.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왕을 세울 때는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부른 것은 그가 예수님을 왕이라 부른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리스도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또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영원토록 결정됩니다. 

빌라도의 질문은 타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올바른 대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막8:36∼37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시적인 것 때문에 영원한 것을 상실할 수는 없습니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어, 일시적으로는 자기의 총독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원토록 정죄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못에 던져져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하여,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 질문에 바르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막15: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공회 의원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 준 줄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생각하기를, 분명 백성은 예수님을 좋아하리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온 백성이 환호하며 예수님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전례대로 그의 관정 앞에 모인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바라바는 민란을 꾸민 자요, 그 민란 중에 살인한 자요, 강도였으며, 악명 높은 죄수였습니다. 

곧이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고자 하여, 백성을 유도하며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그런 찰나에, 빌라도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마27:19 말씀입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이 일로 인해서 잠시 재판이 중단되었습니다. 

바로 그 틈을 이용하여,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공회 의원들은 무리를 충동했습니다. “바라바는 로마에 항거한 애국자이므로, 그는 살려야 한다. 반면에 예수는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한 자이므로, 그는 죽여야 한다.” 아마도 이런 식의 충동이었을 것입니다. 

잠시 뒤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바라바와 예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무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한 목소리로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바라바로소이다.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뒤에 베드로는 행3:13∼15에서 이 때의 일을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이시며, 생명의 주이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살인한 사람 바라바보다 더 못한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부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 

막15: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빌라도는 백성이 예수님을 놓아 달라고 요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백성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공회 의원들의 사주를 받아, 예수님을 놓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또다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예수님을 내가 어떻게 하랴?” 이 때 빌라도는 모든 인생에게 가장 중요하며,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물론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지 않으려고 그와 같이 물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공회 의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에게 넘겨 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으리라고 빌라도는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어떻게 하랴?” 이는 모든 사람이 대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문제는 빌라도가 던진 질문의 방향이 틀린 것입니다. 그는 그 질문을 자기에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잘못된 대답을 얻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어떻게 하랴?” 왜 이 질문에 모든 사람이 대답해야만 합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이에 대한 답변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면 절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예컨대 마1:23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태어나시기 전에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어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요1:3 말씀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온 천하 만물을 모두 다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막2:10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또한 마28:9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경배도 받으셨습니다. 경배의 대상도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요8:19 말씀처럼,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12:44 말씀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14:9 말씀처럼,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막9:37 말씀처럼,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이 온전한 사람이심을 밝힙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어린 아이로 태어나셔서, 나신 지 팔일이 되어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도 키도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리기도 하시고, 목마르기도 하시고, 피곤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울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피도 흘리시고, 친히 죽음도 맛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에,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했습니다. 

예컨대 사7:14 말씀처럼,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미5:2 말씀처럼,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야 했습니다. 사9:1 말씀처럼,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셔야 했습니다. 슥11:12 말씀처럼, 예수님은 은 삼십에 팔리셔야 했습니다. 

그것도 시41:9 말씀처럼, 예수님은 함께 떡을 나눠 먹던 자에 의해서 배반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53장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자의 묘실에 장사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습니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대답은 자명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니면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와 우리의 가족들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믿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영생을 얻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본시 유대인들이 사람을 처형하는 방법은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22편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넘겨지셔서, 로마식의 처형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막15: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바라바를 놓아주랴, 아니면 예수를 놓아주랴?” 무리는 대답했습니다.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 빌라도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라?”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며 말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을 죽이기를 바랐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참혹하며, 가장 수치스럽게 죽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옷을 벗긴 채로 못 박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죽음도 금방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못 박힌 상처에서 조금씩 피가 새어나오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까마귀와 같은 들새가 날아와서, 눈과 살을 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너무도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그들의 반응이 도무지 이해가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막15: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이는 빌라도가 무리에게 던진 세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의 형벌은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형벌은 반란죄와 같이 큰 악을 행한 죄수에게만 해당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빌라도는 공회 의원들의 고발에 따라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분봉 왕 헤롯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도 예수님을 가리켜 옳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세 사람의 증인이 있었으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음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무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그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빌라도의 질문에 무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악한 일을 했다라고 대답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들은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더욱 소리 질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때 무리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뜻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행2:23 말씀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오순절 날에 사도 베드로가 무리에게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53:6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사53:10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무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을 빌라도에게 요구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 때 무리는 자기들의 말로 자신들을 정죄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눅23:34 말씀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에 따라 사도 베드로는 행3:17∼19에서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를 질렀던 자들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 지른 자들도,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들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데도, 용서함을 받지 못할 만큼의 큰 죄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읍시다. 그리하여 모든 죄의 짐을 다 벗어버리고, 하늘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날 밤 공회 의원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하인들도 손바닥으로 쳤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막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끝내고, 이제 최종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자기 입으로 적어도 다섯 번이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를 놓아주었습니다. 

마27:24 말씀처럼, 빌라도는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무리의 소리에 굴복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몇 차례의 민란이 있었습니다. 또다시 민란이 일어나 가이사에게 좋지 않은 보고가 올라가면, 그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살인한 자인 바라바를 놓아 주었습니다. 그 대신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먼저 채찍질하고, 그 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누구에게 넘겨주었겠습니까? 군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사람의 감동을 전하지 않습니다. 만일 성경이 사람의 감동을 전하려면, 영화에서처럼 채찍질을 자세하게 묘사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전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채찍을 당하셨다는 사실만 단순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채찍질이 엄청 고통스러웠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막대기에 여러 가닥의 가죽 끈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끝에는 날카로운 돌이나 뼈 또는 금속 조각이 붙어 있었습니다. 죄수는 옷을 벗긴 채, 기둥에 묶여 등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두 군인이 양쪽에 서서 번갈아가며 채찍질을 했습니다. 살갗이 터지고 근육이 갈라지면서, 뼈나 내장이 삐져나오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죄수가 채찍질을 당하는 중 죽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몸도 채찍질로 인해서, 십자가를 지시기가 어려울 정도로 상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처럼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사53:5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모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죄의 병에서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공회 의원들처럼, 악의로 예수님을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무리처럼,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헤롯 왕처럼, 예수님을 업신여길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처럼, 예수님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결정은 각자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도 각자가 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처럼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결과는 멸망입니다. 

올바른 결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나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나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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