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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 이야기(4) : ‘아니오’ 할 수 있는 용기 (창 39: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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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이야기(4) : ‘아니오’ 할 수 있는 용기 (창 39:7-18)
 
이 사회는 각종 중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중독증 환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중독은 크게 화학적 중독과 행동의 중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화학적 중독이란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흡연 중독 등을 말하고, 행동 중독이란 도박 중독, 인터넷 중독, 게임중독, 쇼핑 중독, 성 중독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이 전체 인구 5,000만 명 중에 약 7∼800만에 달한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7∼8명 중 한 명이 중독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서서히 중독사회로 빠져 들고 있습니다. 잘못된 습관이 고착화되어 삶의 일부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의지로 멈출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개인의 육체와 정신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와 안전까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경제적 손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중독으로 인해 사용되는 사회경제적인 비용이 100조가 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시 1년 예산인 약 20조의 다섯 배 이상이 중독문제로 소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독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충동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절제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하게 거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시간과 돈을 무절제하게 사용하게 되고 또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래서 결국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처럼 달려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중독에 빠진 사람들도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는 ‘아니요’라고 거절하며 반복되는 행동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절할 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시 깨닫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거절할 줄 아는 용기가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1975년에 허버트 펜스터하임(Herbert Fensterheim)과 그의 아내가 쓴 『아니오라고 하고 싶을 때 예하지 마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상대방에게 명백하게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특히 ‘아니오’라고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저자는 가르칩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기 삶을 기획할 줄 알고, 인간관계를 바르게 열어나갈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말입니다. 

전형적으로 착한 사람의 문제는 자기표현을 제대로 못 한다는 것입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의견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냥 감춥니다. 스스로 겁먹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혼자 가슴 속으로 ‘내가 왜 거절을 안 했지’하면서 억지로 끌려갑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절해야 할 것들 앞에서 용기 있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답게 살게 됩니다. 특별히 죄와 악, 거짓과 불의에 대해서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하나님이 참 좋고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NO!”라고 거절할 수 있는 것조차 용납하시는 걸까?’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까지 포함한 나 같은 문제아를 사랑하시고, 지켜보시고,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요셉이라는 인물을 보게 됩니다. 그는 원하지 않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향해서 ‘NO!’라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을 보면, 저도 남자지만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런 유혹에 빠지게 될 때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게다가 그 유혹은 갑자기 닥쳐온 것이었습니다. 결코 예고되지 않았습니다. 

유혹은 가까운 곳에서 친밀한 얼굴로 다가옵니다. 

어렸을 때 누가 마귀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머리에 뿔이 두 개 나고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는 존재를 그립니다. 그러면서 작정을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다가오면 내가 대결해야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은 그렇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달콤한 솜사탕처럼, 앉아 있으면 느긋해지는 안마의자처럼 슬며시 다가옵니다. 

보디발의 종이었던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가 다가오리라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혀 예측하지 않은 곳에서 유혹이 다가왔습니다. 이렇듯 유혹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자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가옵니다. 

또한 유혹은 일이 잘 될 때 들어옵니다. 고난이 있을 때는 괴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혹을 쉽게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가졌다고 여겨질 때,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올랐을 때, 마음대로 많은 것을 휘두를 수 있을 때 다가오는 유혹은 더욱 위험합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친위대장이었던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그는 거기서 10년 넘는 세월을 종의 신분으로 살면서 보디발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보디발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집안의 대소사까지 모두 위임했습니다. 한 마디로 보디발 집의 실질적인 2인자가 된 것입니다. 세상적인 말로 하면, 구겨진 인생이었지만 펴진 것입니다. 축복을 받은 것이고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공한 바로 그 자리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유혹의 미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9장6절은 요셉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창세기 39:6) 

요셉의 얼굴과 몸매 모두 멋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혹할 수 있는 매력적인 청년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이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10년이 지났으니 2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아주 매력적인 청년이 되어 젊음의 피가 끓고 활력과 정력이 넘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어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창세기 39:7) 

부탁이나 권유가 아니었습니다. 주인의 아내로서 종에게 내리는 명령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노예였던 히브리 청년에게 성적인 쾌락에 동참하도록 압박을 가했습니다. 게다가 성경을 보면, 이것은 한 번의 유혹과 한 번의 거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반복해서 유혹을 받았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세기 39:10) 

오늘날에도 젊은 청년에게 여인의 유혹이란 거부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성적인 욕망이란 가장 밑바탕에 놓여 있는 생존본능과 관련된 충동이기 때문입니다. 성적인 충동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 청년의 시기에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성적 유혹까지 가미되면 남자의 몸은 일종의 화약고같이 변해 버립니다. 기름에 성냥불을 그어대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치 시한폭탄처럼 터져버리게 되는 것이 남자, 특히 청년들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성적인 욕구가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젊은 남녀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부부가 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성을 즐기고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거룩하기까지 한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삶의 무질서와 타락이 동반됩니다. 사회적으로 잘나가던 사람들이 성문제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자주 보았습니까?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유혹이고, 미혹입니다. 

유혹 앞에서 ‘아니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위험과 유혹이 다가왔을 때, 청년 요셉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니오’라고 자기와 상대방을 향해서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하는 것만 용기가 아닙니다. 하지 않는 것도 용기이고 담대함입니다. 하지 않는 것도 내 인생의 강력한 힘입니다. 오늘 9절 말씀은 요셉의 이러한 강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창세기 39:9) 

그는 ‘아니오’라고 당당히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내 속에 나에 대한 자긍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나에 대한 자존감과 자부심이 있어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적 자아상을 꿈꿉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서 나는 이런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내 성품은 이렇게 되게 하옵소서. 내 언어와 행동이 이렇게 바꿔지게 하옵소서.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이렇게 이끌어 주옵소서. 내 꿈을 주님과 함께 품으며 가고 싶습니다.’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이상이 있어야 우리는 ‘아니오’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오’를 쉽게 하지 못 합니다. 특히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아니오’는 굉장히 큰 짐입니다. 누군가의 부탁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아니오’라고 거절할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저 사람의 인격을 거절하고, 훼손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자책감 때문에 때로 속으로는 ‘아니오’라고 하면서도 겉으로는 ‘예’라고 말하며 끌려가기도 합니다. 결국 내 인생에서 내가 주도적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오’를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에게 속박되는 것은 내가 ‘아니오’를 하지 못 해서 입니다. 

아주 평범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친구에게 “우리 오늘 점심 같이 먹자. 너 뭐 먹을래?”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아무거나 먹자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데리고 어떤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나오는 길에 함께 같던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야 나 억지로 먹었어. 사실은 나 이거 안 좋아하거든.” 친구는 애초에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 합니다.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때로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삶을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속에서 화를 내고, 속에서 분노하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굽니다. 

필요하면 아내에게도 “난 그거 못 해.” 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내들도 남편에게 “여보, 그렇게 하는 게 나는 싫어.” 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판단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내가 존중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받아줄 것은 받아주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유혹이 아니라면 피해야 합니다. 

‘아니오’를 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모욕하는 것처럼 들려서 저 사람이 내게 복수를 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까지 지켜온 내 자리를 포기해야 하면 어쩌지?’, ‘지금의 모든 것들을 다 놓치고 다시 0점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면 어떡하지?’ 

실제로 요셉이 그랬습니다. 여인의 유혹에 “NO!"라고 거절한 이후, 그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모든 특권을 상실합니다. 감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NO’는 필요했습니다. 

요셉이 말한 거절의 이유는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요셉은 주인에 대한 도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인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은 그의 아내입니다.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남편이 아니라 종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한계성은 곧 자기 정체성을 의미하며, 자존감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가 정체성과 자존감을 잃어버렸다면 이 한계성도 버렸을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주인에 대한 도리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요셉에게 왜 성적욕망이 없었겠습니까? 젊은 피가 끓고 있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에게는 보디발도, 보디발의 아내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은 아니다’ 하시리라는 것을 마음으로 확인하게 되자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멈춰설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 유혹은 반복되었습니다. 매일 지속되는 유혹을 물리치기 위한 요셉의 마지막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피하는 것,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나 이제부터 술 안 먹겠다!’ 결심하면서 술집을 향합니다. 가면서 다짐합니다. ‘내가 술집에는 가도 술은 결코 안 마실 거야!’ 이렇게 결심만 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아예 그곳을 향하는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지요. 유혹이 있는 자리인지 뻔히 알면서 주기도문 외우듯 나를 건져달라고 외치며 그곳을 가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방법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길은 그곳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창세기 39:12) 

요셉은 그녀가 붙잡는 옷을 그냥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아예 유혹이 없는 곳으로 피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들을 끊으십시오. 

잘못된 성적인 유혹뿐만 아니라 돈의 유혹, 직장에서 경험하는 잘못된 직분의 유혹 등은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 자리를 피하십시오. 그래도 여전히 그 유혹이 반복된다면 그것을 떠나야 합니다. 도망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양심에 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까? 돈을 취급할 때 그렇습니까? 직장에서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내가 아닌 여인에게, 혹은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내 삶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지금 ‘아니오’를 선언하셔야 합니다. 나에 대해서 ‘아니오’ 하시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하십시오. 떠나십시오. 너무 오랫동안 고민하지 마시고, 바로 지금 그것을 실천하십시오. 

‘아니오’라고 선언하고 나면, 어쩌면 요셉처럼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니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표현할 줄 아는 것, 특히 ‘아니오’라고 할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그 삶은 빛날 것입니다. 그래야 성숙하게 되고, 하나님이 쓰실만한 인물로 세움 받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믿음의 역사를 바르게 감당하는 우리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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