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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의성령 (요 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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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성령 (요 16:1-15)


참으로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르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대 전제 하에 민주주의는 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내 뜻을 이루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우리들 안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데모를 일삼고 사회의 혼란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힘을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 또한 자기의 뜻만 펼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폭력보다도 더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언어적 폭력입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온갖 비방과 시기로 가득한 말을 퍼부어 댑니다. 

내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또 상대방을 핍박하기를 일삼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아주 죽이려고 듭니다. 나만 선이고 상대방은 악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서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사셨습니까? 낮고 천한 자리를 택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은 온 백성들이 저를 강제로라도 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자신은 세상을 떠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이 그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오늘 본문 가운데 엄청난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우리가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사랑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세상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대접 잘 하겠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내게 속해 있기 때문에 너희가 내가 당한 핍박을 받고 내가 당한 미움을 받을 건 정한 이치 아니냐? 그런 얘기가 5:19절에 나왔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 앞에 18절에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나 자신이 세상에서 미움 받는 사람이 아니냐? 앞으로 또 미움을 더 받을 사람이고 또 그런데다가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사람이니까 너희를 사랑했을 탠데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도리어 나의 택함을 입고 내게 속한 자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미워하는 거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입니다. 한국에 복음화가 시작된 지 1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이 짧은 역사 가운데 어찌 순교자가 그리도 많습니까? 백여 년 역사밖에 안 되는 기독교에 순교자가 이렇게 많다는 건 한편으론 한국교회는 이렇게 순교자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순교자가 많다고 자랑거리도 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창피하고 부끄러운 얘기도 되는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악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면 이렇게 기독교인을 많이 죽였느냐?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순교를 하면서까지 신앙을 지켰다고 하는 이건 자랑스러운 얘기지마는 한편으로는 예수 믿는다고 막 잡아 죽이던 무지하고 완악하고 몽매한 족속이란 얘긴데 우린 사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가 사회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느냐 하면 첫째는 너희가 미움 받기 전에 내가 먼저 미움을 받았다. 내가 미움 받았는데 너희만 사랑 받을 수 있느냐? 그리고 둘째는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 미움 안 받겠지. 세 번째는 세상이 무지해서 그렇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의 본문이 시작이 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출교라는 건 교회로부터 내쫓는다는 얘기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면 출교는 제거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고 그냥 족보에서 지워 버리기도 하고 동네에서 “너는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니다.” 하고 동네에서 내쫓기기도 하고 직장에서 그냥 파면을 시키기도 하고 그래 넓은 의미에 다 출교입니다. 지금 아랍 회교권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회교도가 예수 믿으면 그냥 족보에서 제해 버리는 거고 동네에서도 쫓겨납니다. 거기서 예수 믿는다는 건 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건데 믿고 싶어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죽이기까지는 안 한다 해도 어디에도 취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장사를 하려고 해도 그 집 물건 불매 운동을 일으켜서 아무도 사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남 몰래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그 땅을 떠나지 않고는 살 길이 없습니다. 이건 회교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 사람 예수 믿으면 유대교에서 출교합니다. 그렇게 할 뿐 아니라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거다. 하나님을 위해서 너를 죽인다.” 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라는 말이 종족에 따라 다 다릅니다. 회교도는 알라신을 위해서 너를 죽인다는 얘기가 되고 다 각각 자기들의 신을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 죽이는 것이 다 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천주교도가 개혁자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습니까? 그들이 죽일 때 무슨 영목으로 죽였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죽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까지 이교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공산당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보다 천주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이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 죽일 적에 하나님을 위해서 죽인다고 해서 죽인 겁니다. 바울도 예수 믿기 전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부터 앞장을 서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러 돌아다녔는데 사울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박해를 했느냐 하면 그게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하나 잡아 죽일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걸로 알고 그렇게 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고 바울이 백팔십도로 바꾸지 않습니까? 

종교 개혁 전후 삼십년 어간에 천주교도가 잡아 죽인 개혁교도 수가 313년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까지 300년 동안 로마 정부가 잡아 죽인 기독교인 수보다 훨씬 많다는 겁니다. 믿지 않는 로마 정부가 예수 믿은 사람 잡아 죽인 수보다 예수 잘못 믿는 천주교들의 손에 의해서 잡혀 죽은 수효가 훨씬 더 많다는 걸 알아야 되고 그 후에도 지금까지도 여전히 천주교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기독교인들이 회교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보다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로마 정부는 몰라서 그랬지만 천주교는 얼마나 무서운 죄를 졌습니까? 그럼에도 천주교들은 교회 무오를 주장해요. 교회에는 오류가 없다. 

나중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가운데 한 마디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입니다.” 예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인 줄 알고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무지해서 저렇게 합니다.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거 아닙니까? 이건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교회들도 어떤 때 하나님도 깜짝 놀라실 일을 하면서 그거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착각을 하는 때가 있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착각을 왜 하게 될까요?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하고 신앙을 혼동하는 이유를 3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결국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이제야 하느냐 하면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으니까 상관이 없지만 이제는 나는 떠나야 한다. 

내가 떠나고 난 다음 너희도 나처럼 환난을 당하게 될 터인데 그러면 그때 너희가 내가 한 말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핍박을 당한다고 해서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마라 그건 어디까지나 너희가 나를 미든 자요 내게 속한 자라는 뜻이니 오히려 감사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모든 것을 심판할 때가 속히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이 떠나시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이 말씀을 왜 주께서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보내신 뜻을 이제 이룩하고 또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보내 주신 하나님께로 도로 돌아가야 하는 마당인데 그런데도 여전히 제자들은 이런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세상적인 일, 땅 위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세상 영광만 바라볼 뿐입니다. 

행 1:6에서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까지도 제자들의 관심은 땅 위에 속한 것에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관심은 이 세상 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제자들이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해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두운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14장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다락방 설교 즉 누상보훈의 말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이라는 큰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세상을 떠나시는데 그러한 얘기를 단편적으로 했을 때 제자들은 반응은 어땠습니까?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럴 때마다 주님이 보좌에 앉으실 때 누가 그 좌우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 하는 이 부귀영화에만 관심이 집중돼 있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고난을 말씀하실 때마다 오히려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내가 떠나가는 마당인데도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런 일에 대해서 제자들이 별로 관심이 없다는 얘기 아닙니까? 또 단편적으로나마 내가 그런 말을 했을 적에 너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이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유감스럽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 마음에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서 날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은 너희들이 그렇게 슬퍼하거나 우울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고 도리어 너희들이 감사해야 할 아주 매우 유익한 길이라고 이제 7절 이하에서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사실을 말한다면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아주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일이 왜 유익한 일이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까? 사실 유익이다 무익이다 하는 것의 평가가 그리 쉬운 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굉장히 유익한 일 같은 생각이 드는데 실상은 아주 손해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게 도무지 내게 손해만 되는 일 같은데 나중에 보니 오히려 매우 유익한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판단을 못합니다. 판단을 해도 훨씬 지난 후에서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고 미리 이것은 유익한 일이겠구나 이건 무익한 일이겠구나 하는 판단이 얼른 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유익한 일을 도리어 우리는 손을 가로 저으면서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도 많고 때로는 또 무익한 일인데 발버둥을 치면서 그것을 취하려고 어리석은 몸부림을 칠 때도 사실 없지 않습니다. 이게 유익한 일인가 무익한 일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잘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우리에겐 매우 부족해요. 
보십시오. 주 예수님이 이제 떠나가신다는 것이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아주 속상한 일, 실패같이 생각되고 그래서 근심스럽기만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 실상은 너희들에게 아주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첫째는 예수께서 떠나심으로 보혜사가 오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자께서 떠나지 아니하시면 보혜사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성자께서 떠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하나님께 이제 보혜사를 보내도록 요청을 할 것인데 그래야 보혜사가 오시는 것이니 그러니까 내가 떠난다는 게 유익하다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그냥 남아 계시면 막 10:45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물로 보내셨는데 그걸 하시지 않고 예수님께서 그냥 세상에 살아 계시면 그건 하나님의 목적하신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질 않는 것이니 이건 아주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떠나셔야 되는데 떠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니까 유익하고 또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보혜사가 대신 오실 것이니까 이것이 유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자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세상에 그냥 계시게 되면 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는 것이요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게 되니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희생이 동반되지 않는 사랑 나를 죽이지 아니하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나보다 앞서 세우고 다른 사람을 일으켜 주는 이 일을 위해서 우리 역시 수고를 아까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것이요 그로 말미암아 보혜사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게 되니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토록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이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나를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을 세우는 귀한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오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보혜사의 중요 역할을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죄에 대하여 둘째는 의에 대하여 셋째는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여기 책망하신다는 말은 진실을 밝힌다 사실을 폭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어느 순간 이게 잘못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 나도 모르게 눈물도 쏟아지고 애통하게 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첫 번째 역할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꽤나 의로운 줄 알고 살아갑니다. 나는 그래도 꽤 착한 편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아주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말들도 합니다. 누구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내 안에 얼마나 더럽고 추한 마음들이 가득합니까?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내 안에 나도 감당하기 힘든 그런 화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고 “내 눈 속에는 들보가 들어 있는데 그건 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하는구나. 하지만 먼저 너희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해요. 흔히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것도 왜 그런고 하면 항상 나는 의롭다는 전제하에 보거든요. 나는 아주 양심적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런 나의 숨겨진 모습을 성령께서 다 드러내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히 아니오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깊은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다 드러내 보여주시는데 거기에 대해서 아니라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나의 모습을 나도 몰랐습니다. 아니 억지로 모른 척 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의로운 척 그렇게 살았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성령께서 드러내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없이 누구도 자기 죄를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거기다가 깨달았다고 해도 통회 하고 회개를 하는 데까지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게 보혜사가 오셔서 하시는 역할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그렇다면 죄라고 하는 게 뭐냐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죄라고 합니까? 
우리가 흔히 죄라고 할 적에는 어떤 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을 말하기 쉽습니다. 물론 법률로서는 행동화 된 것을 죄로 규정하고 다스리는 거지 행동화 되지 않은 것은 손을 못 댑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아직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법에서는 이걸 손대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람 속에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증거도 잡기가 어려운 것 아닙니까? 그래서 법에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손을 잘 안댑니다. 

물론 죽이진 않았다 할지라도 죽이려는 행동이라도 했으면 살인미수로 법의 저촉을 받겠죠. 그렇지만 아직 아무 행동도 나타나지 않았으면 계획이 다 돼 있어도 그걸 법에서 손을 못 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행동화된 것만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건 무엇이냐 하면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다른 것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왜 모든 사람이 죄인이냐? 

나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착한 행실만 힘써 왔는데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말은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착하고 안 착하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사실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아무개가 아무리 성자라고 할지라도 성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성자 예수를 네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죄라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의 도덕이 죄로 규정하는 거나 법률이 규정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라 죄인들아 회개하라고 할 때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죄인이라고 하느냐? 

이거 명예훼손이다. 그런 반항도 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얼마나 도덕적이냐 얼마나 율법적이냐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거고 내가 성부 하나님을 믿고 있느냐? 성자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느냐, 안 믿고 있다면 믿지 않는 그것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도적질 안 했다고 할지라도 믿지 않는 것 곧 불신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그런 얘기하면 별소리 다 듣겠네. 하고 콧방귀를 끼겠지만 성령이 우리 속에 임재를 하셔서 우리 속에서 역사를 하시게 될 적에는 그 죄인이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으면서 며칠씩 통회 자복하는 거는 그 사람들이 어디 가서 살인강도를 했기 때문에 그런 거는 아닙니다.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시면 지금까지 성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것 성자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았던 그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교회당이라는 데는 순 도둑놈들만 모인 데라. 그러니까 만날 모여가지고서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해 달라고 그러고 기도만 하면은 죄인이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목 메인 소리로 기도를 하는 게 아니냐?”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 앞에서는 성인군자처럼 산 사람도 성자 예수를 자기의 구주로 받아 믿지 않았다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해서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어찌할꼬? 그랬을 적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듣고 회개하라 그리고 죄 없이함을 받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죄를 책망한다는 것은 너 나쁜 놈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성령이 의에 대해서 책망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의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흔히 내가 도덕적으로 남에게 조금도 억울한 일은 한 일이 없고 남에게 무슨 손해를 끼친 일이 없고 남을 희생시키거나 그런 못된 짓은 내가 한 일이 없다. 난 도덕적으로 흠 잡힐만한 게 별로 없다. 그러니 이만하면은 내가 그래도 그냥 의로운 사람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도덕적인 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의라고 할 적에 이 도덕적인 의를 생각하면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고 남에게 못할 짓을 해도 된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물론 그런 짓은 하면 안 되죠. 그러나 그런 짓을 하나도 안 했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거냐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도덕적인 의를 우리가 힘써야 됩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의를 내가 달성했다 그래도 이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에 율법적인 의가 있습니다. 율법적인 의는 옛날 유대인들이 추구하던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조항을 하나하나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 조항을 세밀하게 구분해서 이것을 다 잘 자키면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틀니를 낀 사람이 안식일 날 틀니를 끼고 다녀야 되느냐 빼놓고 다녀야 되느냐 하고 토론을 한 결과 그거 빼야 된다. 틀니라고 하는 것도 이 틀에다 끼우는 것이니 그것도 짐을 운반하는 것이라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틀니도 안식일 날은 다 빼놔야 된다. 그렇게까지 강조를 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의족을 해서 끼웠는데 안식일 날 의족도 떼어 내야 된다. 의족을 끼고 다니는 건 짐을 운반하는 거니까 안식일을 범하는 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적인 의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신앙에도 어떤 이는 도덕적인 의 예수 믿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다 흠이 없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건 당연한 말입니다. 당연히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선행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고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 기도를 하고 하는 것이 공로가 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데 이건 다 율법주의적인 의거나 도덕적인 의에 불과할 따름이고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취급받으려고 생각하는 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마땅한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 앞에 이론 사람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게 바로 자기의 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의 의는 일체 인정을 못 받은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성인군자처럼 천사처럼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거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의인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헤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의래야 됩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있는 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의라야 되는 것인데 그럼 하나님의 의라는 게 뭐냐 하면 그건 다른 말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기 의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불교적인 생각이고 유교적인 생각이고 이교적인 생각이고 세속적인 생각이지 자기의 의가 문제가 된다면 예수가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고 오셨다고 해도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엡 2:1은 “인간이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이요 성경이 실상을 보여주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실상은 하나님 앞에 그냥 죽어 있는 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라는 건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떠나는 것입니다. 손가락이 사람의 몸에서 떠나면 그 손가락은 죽어서 썩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말라서 그냥 아궁이 속에 다 들어가서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거기서 무슨 잎이 피고 열매 맺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 분리라는 것이 죽음입니다. 생명의 본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이 떠나 버렸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다 죽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죽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죽은 자인데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시 살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자기 자신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살려요. 자기가 자기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처음부터 죽질 않았겠죠. 그러니까 이건 전혀 불가능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자기가 무슨 노력을 하거나 자기가 무슨 도를 닦거나 자기가 무슨 덕을 쌓거나 자기가 선한 일을 해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힘에 의해서 자기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자력에 의해서 자기가 의를 구축하고 그 의를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행세한다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사 64:6은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씀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사람이 최선을 다해서 내가 이렇게 의롭게 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의도 사람의 눈으로 볼 적에 의지 하나님의 눈으로 볼 적에는 걸레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러운 옷이란 말은 걸레 조각이란 말입니다. 다 이렇게 잘 했고 이렇게 착하게 했고 이렇게 봉사를 많이 했고 하는 이런 것들이 인간의 눈으로 볼 적에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의가 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적에는 걸레 조각이라고 그래 인정을 못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내 힘으로 벗길 수 없는 죄를 벗겨주기 위해서 내 힘으로는 쟁취할 수 없는 의를 내게 가져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우리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걸 믿어라. 그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면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의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내가 의롭게 됐다고 믿으면 그리스도의 의라는 세마포를 내가 입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내가 아무리 더럽고 추한 인간일 지라도 내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의인이라고 인정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의는 이신득의라고 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도 하고 또 칭의라고 해서 의롭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또는 인의라.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의를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 저분이 내가 벗길 수 없는 죄를 벗겨주셨다. 내가 받을 수 없는 내가 만들 수 없는 구원을 저분이 만들어 주셨다. 그걸 나는 믿어. 그리고서 그리스도의 의를 내가 입는다는 말이고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것을 하나님께서 또 의로 보시니깐 그게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고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래야 의로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심판에 대해서 이제 책망을 하십니다.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믿지 아니하면 그게 죄라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내가 이제 너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의다. 그리고 11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이 세상 임금이라는 건 마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귀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돌무덤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여기까지는 마귀가 승리한 겁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예수는 참패하고 마귀가 승리한 것이겠죠.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사흘 후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죄 없는 예수를 죄인을 만들어 가지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서 돌무덤 속에다 묻어 버리는 것이 마귀가 한 일이고 거기까지 해서 끝났으면 마귀가 승리하는 건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귀는 패배를 했고 예수님은 승리를 하셨습니다. 그래 이 세상 임금이 심판 받았단 얘기는 마귀가 심판 받았다 마귀가 패배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부활하심으로서 마귀가 심판을 받게 됐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다 그와 같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고 이것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그리스의 의를 덧입은 우리들에게는 하늘나라와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귀한 상급과 면류관을 하늘나라에서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성령께서 믿는 우리들에게 어떤 일을 하십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랬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지혜를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여 주십니다. 말씀을 기록할 때도 성령께로부터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을 한 것이요 말씀을 깨닫는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깨달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게 된 것이 바로 성령의 말미암아서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즉 성령께서 오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아직 죄 가운데 있고 죄의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우리들을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임금의 잔치 자리에 참여한 자가 누구입니까? 산울가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때 그 청함을 받고 잔치 자리에 참여하되 예복을 입고 참여한 자가 그 잔치 자리에서 잔치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예복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무개는 어때서 안 되고 아무개는 어때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나의 판단이요 세상의 판단일 뿐입니다. 오직 주님은 내가 예복을 입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보실 뿐입니다.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종하여 예복을 입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요 그래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 나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를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것이요 예수를 영접하는 우리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하늘나라가 우리 앞에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어떤 세상의 어려움도 능히 견디고 이기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 앞서 가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의 길을 지도해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들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에 이르는 것처럼 그렇게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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