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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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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본문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육상 경기에 비유하여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육상 경기장을 한번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경기장 관중석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앉아 있고, 운동장에는 선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증인이란 창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믿고 섬기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간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의 경주를 마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경기를 마치고 이제는 구원의 증인으로 관중석에서 우리의 경주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구름에 비유한 것은 그 숫가 무수히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하늘에서 구름처럼 우리의 삶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최초로 흑인으로서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을 역임한 콜린 파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걸프전의 영웅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뉴욕 할렘가 사우스 브롬크스 중학교 출신입니다. 범죄와 알콜 중독, 가난 속에서 공부한 불우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학생 여러분! 우리처럼 불우하게 이 학교에서 공부한 콜린 파웰이 합참의장이 되어 걸프전을 대승리로 이끌었다. 그에게 모두 편지를 보내자.”라고 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콜린 파웰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를 받은 콜린 파웰 합참의장이 친필로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후배들에게!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 중에는 훗날 판사도 나오고, 장군도 나오고,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도 나올 것입니다. 절대로 낙심하여 중퇴하지 마십시오. 공부 열심히 하십시오. 미래를 열심히 준비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의 꿈과 미래를 바라보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은 포월 장군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에 감동이 되고 꿈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 한통에 그 학교에는 폭력과 마약이 없어지는 좋은 학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는 보아주고 있고, 격려하여 주는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승리할 때마다 박수를 치며 격려할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어 넘어질 때면 안타까워하면서 빨리 일어나라고 힘을 북돋울 것입니다. 우리는 외로운 육상 선수가 아니라 허다한 증인의 격려를 받으며 달리는 신앙생활의 선수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1.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본문 1절에“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했습니다.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사람들은 뛰기 전에 먼저 몸을 가볍게 합니다. 아무 짐도, 소지품도 지니지 않습니다. 옷차림도 최대한 간편하고 가볍게 합니다. 

무거운 것이란, 신앙경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지나친 몸무게나 귀찮은 짐 보따리를 가리킵니다. 권투선수가 링에 오르기까지는 멋진 가운을 입고 나오지만 막상 경기를 시작할 때는 벗어버리는 것처럼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또한 무거운 것이란 경주자의 주의를 흩어지게 하는 것들을 말하는데,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오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음식이 될 수도 있고, 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좋지 못한 습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옷을 벗듯 다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했습니다. 직역성경에는 “옭아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했습니다. 하늘나라를 향해 경주하는 우리는 마음에 거리끼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나, 찬송을 부를 때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의 심신을 얽어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죄가 우리를 얽매기 전에 죄를 회개하여 죄 짐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말씀하시기를“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더럽히는 모든 죄는 우리가 회개할 때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인내해야 합니다.

2절에“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했습니다. 운동경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력 즉 인내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은 신앙생활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30장 18절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아 누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서양 격언에“하늘은 기다릴 수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을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37편 7절에“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서양 속담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쓰던 도구를 다 경매 처분하는데“이것은 팔지 않음”이라고 붙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낙심”이라는 도구였다고 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실패하도록 우리를 미혹하는데, 낙심케 하므로 포기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낙심하여 포기하므로 실패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참지 못하는 조급함입니다. 서양 격언에“참는 것은 아픈 곳에 바르는 고약이다.” 라고 했습니다. 상처에 바른 고약이 그 상처를 치료하듯, 인내는 우리들의 소망을 이루는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은 사람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문명의 발달이라는 것이 대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옛날에 가장 빨리 만들 수 있는 음식은 국수를 삶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국수를 삶아 먹는 불편을 덜어 주는 대용식으로 십분만 끓이면 먹을 수 있는 라면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10분도 너무 지루하여 1분이면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이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인스턴트 식품 용기의 뚜껑은 거의가 깡통 따개로 한참을 따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뚜껑에 붙어있는 고리를 잡아당기기만 하면 열리는 원터치 캔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소식을 주고받으려면 편지로 일주일 정도는 걸렸습니다. 그 후 전화기가 있어서 어디서나 연락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화기는 사람이 집에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불편함을 덜어주는 이동 통신 핸드폰이 나왔습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통화가 가능합니다. 편지도 이메일로 즉시 보내고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이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열어봐야만 전달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이메일 대신 스마트폰을 더 많이 이용합니다. 

먼 곳을 왕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한양까지 가려면 두세 달이 결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열차를 타고가면 두 시간 반이면 됩니다. 이처럼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특징은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문명의 발달이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는 것은 좋지만 사람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역기능도 있습니다. 조급한 마음은 기다리지를 못하고 조급한 마음이 습관이 되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인내하지 못하는 좋지 못한 성격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냄비나 포트에서 물을 끓일 때 스위치를 켜자말자 바로 끓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열을 가해도 끓지 않다가 100도에 도달하면서 갑자기 끓기 시작합니다. 물은 98도나 99도에도 끓지 않습니다. 임계점인 100도에 도달해야만 끓습니다. 나무를 부러뜨리기 위해 힘을 가하면 굽어지기 시작하지만 처음부터 부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점차 구부러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부러지게 됩니다. 꺾어지는 임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인내심이 부족하여 임계점을 기다리지 못하면 꿈이 성취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기도나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전도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은 것을 불가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응답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도해도 안 되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은 어느 날 나무에 오르려는 개구리가 30번을 실패한 후에 비로소 나무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하찮은 미물도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포기하는 법이 없는데 어찌 사람인 내가 조금 힘들다고 포기 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개구리를 통한 교훈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장 11절에 말씀하시기를“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하셨습니다. 

3.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경주하는 선수는 목표 지점을 향하여 달립니다. 이처럼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2절 말씀에“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믿음의 주”라는 것은“시작자, 근원자, 창조자”라는 뜻이며“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것은“완성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직역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믿음의 근원이시고 완성자이신 예수께 시선을 고정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구원의 근원이시며 구원의 완성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삼위 하나님가운데 한분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이십니다. 또한 세상 끝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시며, 구원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목표로 삼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고정을 시키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말고 지속적으로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추운 엄동설한이라 할지라도 렌즈로 태양의 초점을 한 곳에 모으면 불이 붙습니다. 이처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삶의 초점을 고정시키면 이때에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전 여행가 김찬삼 교수가 아프리카 밀림에서 일하고 있는 슈바이처를 만났을 때에 감명 깊었던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에게 가서 인사드렸더니 “당신은 무엇을 하는 분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세상을 넓게 알고 싶어서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좋은 생각이군요.” 라고 달하면서 "바지가 다 떨어졌군요. 괜찮으시다면 내 바지를 드릴까요?" 라고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입고 있던 자기 바지를 벗어서 주더라는 것입니다. 
김교수는 그 바지를 갈아입고 일주일을 아프리카의 성자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곳을 떠날 때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인간이 성공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들 중에 꼭 한 가지만 말씀하신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한 마디로“한 우물을 파시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른 것을 쳐다봐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잘 못했을 땐 낙심하기 쉽고, 잘한 것 바라보면 교만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도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바라보면 그를 험담하는 입술의 죄를 지게 됩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경제인들, 사업가들이 부정부패하고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보고 낙심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힘든 환경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힘든 환경을 바라보면 불안한 마음이 생겨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결코 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장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바라보았을 때는 무서워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이“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였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베드로는 물위를 걸었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부는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베드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고,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담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나신 자리가 마구간 구유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보다는 좀 낫게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지 몇 달이 안 되어 애굽으로 피난하였습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광야 길을 걸어 멀리 애굽으로 피난하셨습니다. 혹 외국에서 온 분들은 아직도 피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생활이 힘드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매일 매일 노동을 하며 살아가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 생활이 너무 피곤해 탄식하십니까? 30세까지 목수 일을 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큰 유혹과 시험으로 남모르는 큰 고민 중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면서 주릴 때에 들어오는 시험, 세상 영광으로 들어오는 시험, 모든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시는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몸이 약하고 병으로 고생하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의 약한 것을 아시고 질병을 대신 지시며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고통과 번민을 가슴에 품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큰 슬픔을 당한 분이 있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모략, 중상, 비판으로 상심한 분이 있습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갖은 비방과 중상을 받고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혹 다른 사람에게 냉대와 천시를 받고 마음이 상한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촌에서 하룻밤을 자려고 하시다가 배척을 받고“불을 내리자”는 제자를 오히려 책망하시며 다른 동리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혹 어떤 사람에게 오해가 있어서“내게 인사 안 하는데 왜 내가 먼저 할까?”하는 좀 용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어려운 문제를 당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피할 길이 없어보이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가 처형의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었던 친구가 배신하며 배은망덕할 뿐 아니라 악으로 성을 갚는 아픔을 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가룟 유다가 망치를 든 무리를 데리고 왔을 때, 유다를 향하여 친구라고 부르며 말고의 잘려나간 귀를 도로 붙여 주시는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거짓 증거로서 억울하게 재판을 받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제사장과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도 참으신 그 모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에게 모욕과 멸시를 받는 분이 있습니까? 희롱, 침 뱉음, 채찍을 맞고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의 짐을 지고 수고하여 헐떡이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기를 지시고 몇 번이나 넘어지시며 골고다를 걸어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형제가 나에게 지은 죄를 잊을 수 없어서 분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 있습니까?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못 박는 이를 위하여“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기도하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살인강도로 십자가에 못 박힌 우편 강도도 회개할 때에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눈이 보는 곳에 마음과 몸이 따라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항상 우리 생활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심령이 장성하게 됩니다. 풀이 태양을 보면 무성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화초가 태양을 보면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나무가 태양을 보면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절 하반 절에“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얻는 기쁨보다, 하늘에서 얻을 더 큰 기쁨을 생각하고 자기 앞에 놓인 수치를 개의치 않고 인내하셨습니다.“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는 말의 뜻은“무시하다, 경멸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는 것은“그리스도의 영화”를 가리킵니다. 현재의 잠시 동안의 고난을 극복하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경주하는 사람에게는 목표가 있듯, 신앙인의 삶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 도 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천국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신앙의 경주자입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심판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삶의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삶의 보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의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에 말씀하시기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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