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불굴의 사도들 (행 5:33-42)

첨부 1


불굴의 사도들 (행 5:33-42)

주의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왔을 때, 베드로와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새벽에 성전으로 달려갔습니다. 새벽부터 그들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감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날 아침에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체포당하고 공회에 끌려가서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기보다는 사람의 종이 되기 쉽고 조직의 종이 되기 쉽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 가지로 증거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바로 그 예수였다. 이 예수는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신 예수였다. 그리고 이 예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임금과 구주가 되신 예수였다." (:30-31절)

그리고 그 다음에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일에 내가 증인이다." 이 말처럼 설득력 있는 말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 보면 사도들의 모든 설교가 예수님께 집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2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나는 작정하였노라.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분토로 여기겠다." 사도 바울이 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만 알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생명을 걸고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예수님 외에는 없다"여야 합니다. 내가 외칠 대상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내가 들어야 할 깃발은 예수님의 깃발 외에는 없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려지고 120문도들에게 내려지며 삼천 명의 성도들한테 내려가고 오천 명의 성도들한테 역사하여지게 되자 솔로몬 행각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사도들을 통해서 성령이 충만한 교회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시기와 분노가 가득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들 모두가 근심과 걱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흥분되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될 폭발 직전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33절에 보면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 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잘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법에 의해서도 사람을 처단했고 예수님도 처단해서 죽인 사람들인데 누군들 못 죽이겠습니까? 그 때는 종교법으로서 숱한 사람을 율법에 의해서 정당하게 죽이던 때였기 때문에 이들이 죽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찮게 굴고 소란을 떨고 문제를 일으키고 선한 행인들을 충동해서 예수 믿게 만들고 유대교인들을 개종시키는 이런 사도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다 없애자고 하는 무모한 음모가 진행되게 되어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졌습니까? "예수를 죽인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그러나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그 예수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성령님이시며,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면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 이러한 증언을 한 까닭입니다. 이 소리를 솔로몬 행각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사도의 말을 전적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도의 외침을 곧 하나님의 목소리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전도에 힘을 쏟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니 종교 지도자들이 가만히 있을래야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 중에 놀라운 한 사람,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교법사가 나타났습니다. 가말리엘이라고 할 것 같으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당시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가말리엘에게 와서 다 사사를 받을 정도로 위대한 최고의 랍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힐렐 제사장의 손주로서 그때까지도 찾아보기 힘든 대단한 최고의 랍비였습니다. 모든 나라, 이방나라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금대의 솔로몬이라고까지 칭할 정도로 가말리엘은 대단한 교법사였습니다. 교법사란 율례와 법도와 유전을 가르치는 랍비를 말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운명을 걸머진 공회원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을 넘어설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엄격했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은 최고로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교훈의 권위는 그를 추종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도 바로 그의 문하생입니다. 바울의 그의 훌륭한 학식도 바로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그때 당시에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라고 찬사를 받았기 때문에 바리새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35절에 보니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조심이라는 말은 감정으로 해도 안 되고 분노로 해도 안 되고 일시적인 어떠한 판단에 의해서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례와 법도와 전통을 가르치는 가말리엘의 상당한 수준에서 말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조심스럽게 하자 하면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분노를 가라앉게 하는,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는 데는 성공을 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를 들어서 말했습니다. 

이전에 드다라는 자가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랑을 하며 스스로 모든 사람들한테 앞장을 서서 큰 종교운동을 했었습니다. 드다는 자칭 메시야라고 나섰던 사람으로 그가 갑자기 죽음으로 얼마동안의 혼란기가 있었습니다. 드다는 "나는 여호수아의 후예이다. 나는 여호수아처럼 이 민족을 구할 것이다." 이런 얘기도 서슴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 때 400명이나 그를 따라다녔던 것을 우리가 잘 알지 않냐? 그런데 그가 죽고 나니까 쫒아 다니던 모든 사람들이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예를 들었습니다. 

또 갈릴리의 유다라는 사람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보는 대로 구레뇨가 시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그곳 거민들로 호적을 하게 했습니다.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호적을 하게 했는데, 그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나서서 이것을 저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께만 세금을 바칠 것이지, 그 누구에게도 세금을 내지 못한다"라는 말로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로마 정부를 대항하여 일종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다 역시 결국 잡혀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니까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이렇게 역사적 재료를 들고 나오면서 설득을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라는 그자도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두고 볼일이 아니겠느냐? 분노에 가득 차 있는 종교 지도자들을 가라앉히고 설득을 시키고 그들을 이해시켜서 가말리엘의 주장에 따를 수 있도록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자도 숱한 사람이 따르지 않았냐? 그러다가 빌라도 총독이 그를 죽였지 않냐? 그런데 잠깐동안 그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저렇게 난리가 나고 있지만 좀 더 지나면 괜히 그것을 말리거나 박해와 탄압을 하게 되면 더 크게 될 것밖에 없으니까 내버려 두라. 그러면 저절로 드다와 유다같이 시들어져 버리고 말 것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이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태선 장로가 일어나 전도관을 세우고 난리였는데 그가 죽자 조용해졌습니다. 자칭 예수, 부모, 아버지라 하는 이만희씨와 신천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능욕을 기뻐하는 제자들(41절)

한 사람의 인간됨됨이는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가? 즉, 그 사람의 행복관이 무엇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지 즉, 그 사람의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보면 압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타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현재 중심적인 사람이 있는가하면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의 이야기는 사실 보통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능욕을 받는다는 것은 욕을 먹고 매를 맞고 핍박을 당하고 더 나아가서는 순교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을 참고 견디는 것까지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그것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보통 상식을 뛰어 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명예가 있는 자들도 아닙니다. 수양이 잘된 사람들도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철인도 아니고 고명한 스승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 촌의 어부들입니다. 그들의 성격도 제각각 입니다. 과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유부단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약삭빠른 삶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인간성도 제각각 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오면 다 도망갑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날 것 같으면 언제라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뗍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게 되니까 낙심하고 불만을 터뜨리면서 각각 제 고향으로 흩어져 갔습니다. 

이런 자들이었는데 이들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이 이처럼 이들을 변화되게 하였습니까? 세상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정치적인 환경이 변한 것도 없습니다. 경제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여전히 그들의 상황은 흑암이고 무질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변했습니다. 연약했던 자들이 능력의 사람들로 바뀐 것입니다. 능욕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능욕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바꾸어 놓았습니까? 오직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십자가사건을 보면서 그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그 하나님께서 오늘 나와 함께 하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능욕을 기뻐하는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능욕을 당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고 기쁘다는 신앙입니다. 위대한 신앙입니다. 

또한 사도들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케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를 안지는 능력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도 부활하는 능력을 그때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능욕 받는 일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바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시어 구원의 역사에 동참시키심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것에 그들은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 감격 속에서 그들은 능욕을 당하는 것마저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신앙 속에서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2)고 했습니다. 오늘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깨닫고 그 분의 부르심에 감격하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를 쉬지 않는 제자들(42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쉬어서는 안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 먹는 일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를 쉬면 영혼이 질식되고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전도하는 일, 즉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하나님의 책망을 부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전하는 일을 부단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생애는 곧 복음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나 제자들의 순교 역시도 다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40절을 보면 그 당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많은 핍박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본문의 "채찍질"의 原語는 "가죽을 벗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들의 핍박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특히 제자들 중에 사도바울은 그 숱한 어려움 중에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애를 바쳤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려움 중에도 전도하는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로마서 1장 14절의 말씀처럼 복음에 빚진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번째는 로마서 1장 16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힘과 은혜와 복음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했습니다. 전도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기 때문입니다. 

네번째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의 말씀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에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삼아 주심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은 바로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전도는 또한 모든 재앙을 이겨낼 힘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의 말씀처럼 전도의 문이 열려있을 때 우리 모두 전도의 사명을 갖고 쉬지 말고 전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