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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판받으시는 왕 (요 1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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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받으시는 왕 (요 19:1-16)


유태인들의 혈통은 철저히 어머니를 따릅니다. 유태인 어머니에게 태어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자녀만이 유태인이 됩니다. 유태인들은 어머니를 가정의 중심이요 인생의 스승으로 여깁니다. 유태인 어머니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남편을 왕처럼 섬긴다면 너는 여왕이 될 것이다. 만약 남편을 돈이나 벌어오는 하인으로 여긴다면 너도 하녀가 될 뿐이다. 네가 지나친 자존심과 고집으로 남편을 무시하면 그는 폭력으로 너를 다스릴 것이다. 만일 남편의 친구나 가족이 방문하거든 밝은 표정으로 정성껏 대접하라. 그러면 남편이 너를 소중한 보석으로 여길 것이다. 항상 가정에 마음을 두고 남편을 공경하라. 그러면 그가 네 머리에 영광의 관을 씌워줄 것이다”

행복한 부부는 서로를 격려합니다. 불행한 부부는 서로를 공격하고 무시합니다. 이기심과 무관심이 가정의 행복을 앗아갑니다.
오늘날 이기주의가 주변을 복잡하게 만들어 갑니다. 영국 속담에 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 동안 행복하려면 여행을 하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집을 사라. 일 년 동안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그런데 일생동안 행복하려면 이웃을 섬겨라. 그럼에도 왜 섬기지 못합니까? 이기심 때문입니다.
분쟁의 원인이 어디에서 옵니까? 이기주의에서 옵니다. 남을 위해 주는 곳에서는 문제가 생길 리 없습니다. 나만 위해 달라 나를 알아 달라. 여기에서 복잡해집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행복하게 삽니다. 원인은 서로가 위해 주는 것입니다. 당신 위주로 살아갑니다. 반대로 나 중심으로 고집해보세요. 그 집은 불행해집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회적인 동물인가요?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같으나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삶들을 살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 나의 편리, 나의 쾌락, 나의 기쁨 외에는 전혀 다른 사람을 생각지 않는 그저 나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상대방을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과연 오늘 우리들에게만 나타나는 모습이었던가요?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머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을 재판하는 빌라도입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끌어다가 죽일 생각으로서 자기들의 제사장인 가야바의 뜰에서부터 또다시 로마의 관정으로 예수를 끌고 가게 됩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와서 성전 옆 총독 관저에서 직무를 하고 있는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고소하는 소리를 듣고 나왔습니다. 

“이 사람을 왜 고소하느냐?” 
“행악자입니다. 당연히 고소 받을만한 그런 행악자입니다.” 
“너희들에게도 자치 법이 있지 아니하냐? 행악자이면 너희 법대로 처리하지, 이러한 사람을 왜 로마의 관정에까지 데리고 왔느냐?” 하면서 데리고 가라고 합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총독각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이 없습니다. 당신네들이 우리를 지배하면서 웬만한 것은 처리하도록 했지만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일은 로마의 권한에 두었기 때문에 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죽일 권이 없기 때문에 로마의 관정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넘겨받은 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심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과연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지금 내게 질문한 그 질문이 당신 마음대로 하는 질문이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듣고 묻는 질문이요?” 라고 했더니, 빌라도 총독이 “여보시오. 예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소. 내가 당신나라 사람이요? 당신을 고소한 당신네 사람들이 당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한다고 문제를 삼고 있으니 그래서 묻는 것 아니겠소.”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총독의 말대로 나는 유대인의 왕이요.”라고 대답합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합니다. 죽일만한 죄는 커녕 아무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 놓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를 꼭 죽여 달라고 하니 그렇게 쉽게 놓아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어찌하든지 자기는 예수를 죽이지 아니하려고, 또 자기가 예수 죽이는데 가담하지 아니하려고 군중 앞에 나와서 제안을 합니다. 

“여러분, 곧 유월절 아닙니까? 이 유월절에는 항상 죽어야 마땅한 사람 하나씩을 내가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이번에 사면해야겠소. 사면하겠는데, 여러분을 괴롭히고 그 사람이 여러분 동네에 돌아다닌다면 무서워서 잠을 자지 못할만한 '바라바'라는 강도와 그리고 유대인의 왕 이 둘 중에 하나를 내가 놓아주겠소. 여러분들의 소원대로 해 주겠소. 예수를 놓아줄까 아니면 바라바를 놓아줄까?” 

요한복음에는 그저 “누구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 바라바를 놓아주랴” 하니까 “예수 말고 바라바를 놓아주세요.”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마태, 누가복음 전부 합쳐보면, “이 두 사람을 놓고서 둘 중에 하나만 내어주겠다, 누구를 택하든지 너희가 택하라.” 제안했더니 의외로 “그 무섭고 독한 강도, 바라바를 우리에게 내어주어서 우리가 밤에 잠을 못 잤으면 못 잤지, 저 예수는 죽여야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지 아니하려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노력합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예수님을 안 죽이려고 애를 씁니까? 마 26:19에 보면 자기 부인이 급히 사람을 보내 가지고서 빌라도의 귀에다 말을 해줍니다. 
“여보 당신, 오늘 그 사람에 대해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에게 상관하지 마십시오. 내가 어젯밤 꿈에 그 사람을 인하여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가는 당신 큰일 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사람이 예수를 살려보려고 2차 시도를 합니다. 
4절 이하의 말씀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무리 예수를 심문해 보았지만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죽이려면 너희가 죽여라.” 
그러나 백성들이 너무나 강하게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러면 나는 손대지 않겠다. 내 병사들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 않겠다. 너희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심각해집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만나서 심문할 때부터 뭔가 자세가 다릅니다. 당시의 빌라도 로마의 총독으로서 유대인들이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뭐 사람하나 죽이는 것, 파리 목숨하나 끊는 것이나 진배없을 겁니다. 간단합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예수에게 아무 일도 행치 않으려고 합니다. 성경 다른 곳에 보면 예수를 잡으러 갔을 때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나오시는 예수를 만나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입을 맞추고 떠나갔고, 예수님을 잡으려 할 때 예수님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를 찾습니다.” “내가 나사렛 예수니라” 그 때 잡으러 갔던 병사들이 대풍에 겨가 날아가듯, 확 쓰러진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잡아오는지 자기들이 끌려오는지 몰랐다고 하는 보고를 또 받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이 빌라도가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분명히 보통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런 수준 이상의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다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그는 예수님을 살려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니까 “그러면 너희 마음대로 하라.” 했는데, 흥분한 유대인들이 안할 말을 합니다. 
“저가 우리 법대로 한다면 당연히 죽어 마땅할 것은 저가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소.” 
당연히 유대인들은 그렇게 말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도 있고, 불살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간음한 사람도 돌로 쳐 죽이거나 불살라 죽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만약에 아니라면 그것은 당장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왜 못 죽이고 있었습니까? 로마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가 함부로 사형에 처하지 말라 했기 때문에 지금 법이 있는데도 못 죽인다”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죽을죄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빌라도는 그 말이 귀에 걸립니다. 

“뭐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래서 예수님을 저들에게 넘겨주려다가 다시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그대 분명하게 다시 말하시오. 당신 어디로부터 왔소?” 그러니까 땅으로부터 사람에게서 난 사람 자식이냐.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이제 묻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무 대답도 안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더욱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 빌라도가 예수님의 아무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을 보고 더욱 겁이 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려고 또 다시 애를 씁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은 가이사 황제가 보낸 총독인데, 우리에게와 당신에게 왕이 하나뿐인 줄 아는데, 어떻게 유대인의 왕이 따로 있다는 것을 당신은 인정하려 하시오? 만약에 가이사 황제 말고, 이 예수가 또 다시 왕이라면 두 왕이라는 뜻인데 당신이 그렇게 하고도 가이사의 충신이라 할 수 있겠소! 당신은 그러면 반역자입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직접 가서 고발하겠소.” 
이렇게 되니까 “그러면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그리고는 예수를 내어줍니다. 
그러면 이 빌라도의 중심은 어떤 것입니까? 그 하나는 “예수는 무죄” 또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를 죽여서는 안 된다.”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예수는 땅으로부터 사람들의 자식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온 곳이 다르다” 

이것을 빌라도는 정확하게 간파를 했습니다. 
많은 대중 앞에 나와서 “그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하노라.” 하면서 자기의 재판권위와 실력을 놓고서도 분명하게 세 번씩이나 “아무 죄가 없고, 이 사람을 죽일 이유를 찾지 못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어쩌지 못해서 예수를 유대인에게 넘겨는 주었지만은 유대인들에게 끌려가는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그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한 가지 명령을 더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 명패를 하나 만들어서 달라는 것입니다. 그 명패의 내용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라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얼마나 치밀한지 자기들의 글씨인 로마 글씨로서만 쓴 것이 아닙니다. 로마 글로도 썼고, 히브리 글로도 썼고 그리고 당시의 헬라 글로도 써서 당시에 읽을 수 있는 모든 족속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의 그 패를 볼 때 예수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대제사장들이 그것을 보니 기겁을 할 일입니다. 죄인이라고 죽이는데 우리의 왕이 아니라는 뜻에서 죽이는데, 빌라도가 직접 명령을 해서 써서 붙이니,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총독 각하, 그렇게 쓰시면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제발 그것 좀 붙이지 마십시오.” “내가 내 마음대로 붙이는데 당신들이 무슨 말이 많소!” 총독이 하겠다는 데야 누가 지금 그를 막을 수가 있습니까? 아니면 다시 사형 취소 그러면 더욱 낭패가 아닙니까?

그래서 절충안을 내세웁니다. 
“그러면 그 앞에다가 ‘자칭’이라는 두 글자를 좀 써넣어 주십시오.” 하니 빌라도가 말하기를 “무슨 소리? 나는 내가 쓸 것을 정확하게 썼소.” 그대로 붙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라고 정확하게 기록이 됩니다.
이처럼 빌라도는 중심으로 예수를 인정하고 살리려고 온갖 시도를 했고, 마지못해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는 했지만은 평소처럼 자기들의 병사로 자기들의 사형 집행관으로 집행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손에다가 넘겨줌으로서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아주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이 당하기 전에 이 예수를 로마쪽에다 넘겨버리고, 자기들은 유월절 절기를 깨끗하게 지키려고 로마의 관정 안으로도 안 들어갔던 저희가 아닙니까?

그러니 유대인들은 로마에다 예수를 넘겨버리고 로마가 죽이게 만들고, 자기들은 유월절에 깨끗함으로 유월절 만찬에 참여하려고 했는데, 이처럼 밀치고 닥치고 하다 보니 결국은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니까 어쩔 수없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넘겨받아 유월절에 예수를 죽이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다급했던지. 금요 유월절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의 시신을 처리하려고 해가 다지고 다음날까지 두어야 되는데 다음날까지 둘 수가 없어서 “가서 해지기 전에 예수를 끌어내리고, 강도들을 끌어내려서 뼈를 꺾어서 빨리 죽여라. 빨리 죽여라.” 했는데, 가서 강도는 뼈를 꺾었는데 예수님을 뼈 꺾으려고 보니까 얼마나 고난을 많이 당했던지 “이미 숨이 졌더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뼈는 꺾지 않고 창으로 찔러서 얼른 처리를 했습니다. 
이게 참으로 복잡하게 됐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로마 사람 빌라도가 죽이도록 만들려고 했지만 자기들이 뒤집어쓰게 되었고, 빌라도는 자기에게 넘어왔지만 어찌 던지 예수를 자기가 손대지 아니하려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넘겨준 이런 사실들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이 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 우리가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것, 이러한 우리의 노력과 이 빌라도의 노력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빌라도는 “예수는 죄 없다는 사실, 죽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 또 이 예수는 땅에서 난자가 아니고 하늘로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했다”고 보이는데, 이러한 중심과 이러한 “입술의 고백을 가졌다”라고 해서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죽여야 되는 예수인데도, 자기가 손대지 아니하려고 유대인들에게 다시 넘겨주었기 때문에 빌라도가 정상참작이라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 자기를 죽이겠다고 대드는 무리들 앞에서 이 사람 아무 죄가 없다고 세 번씩이나 외칠 정도가 되고 또 성경 다른 곳에 보면 절대 "이 사람은 죄가 없소. 나는 이 사람과 상관하지 않겠소" 하고 손을 씻은 이런 것 들을 보면 그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대단합니다. 예수께 대해서 굉장히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이 사람이 특별히 위로를 받았습니까? 성경은 그에게 죄 없다 아니하고 그를 “구원받았다”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나를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했으니까 빌라도가 죄 있습니까, 없습니까? “네가 나를 십자가에 넘겨주는 죄는 물론이거니와 너에게 나를 넘겨준 사람은 너의 죄보다 더 크다.” 그러니까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죄인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빌라도에게 “너는 죄인이다” 하니까 그 죄인이 안 되려고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고백한 신앙고백 우리가 흔히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며 함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뭐라고 합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 아무리 마음으로, 제 아무리 중심으로 원하고, 그리고 믿을지라도, 입술로 고백을 한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입술의 고백대로 행동하지 아니했다면, 제 아무리 중심으로는 믿었어도 육신이 약하여 나타나는 열매는 딴판으로 맺었다면, 하나님께서는 행함이 보장해주지 않는 그 입술의 고백은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중심으로 예수께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입술로 그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라고 외쳤다 하더라도 그의 중심의 생각과 그의 입술의 고백대로 행동이 따라줘야지 말 따로 행동 따로, 마음 따로 육신 따로 라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볼 때에 마음만 보고서 믿음이라 하지 않고, 입술에 “주여”만 보고 믿음이라 하지 않고, “주여, 주여” 하는 대로, 마음에 먹은 대로 행동으로 열매를 맺을 때에 “그 열매를 보고 아느니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마음속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알았지만 입술로 그는 대중 앞에서 공개까지 했지만 결정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빌라도의 중심을 보시고 그 마음 가지고 구원한 것이 아니라, 입술의 고백 가지고 그의 믿음 가지고 구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예수께 대한 결정적인 행동을 보고 그의 행위를 보고, 입술의 고백도 거짓이요, 그의 중심의 믿음도 거짓이라는 것으로 인정했던 것을 보게 되는데, 이 빌라도의 사건을 우리에게 적용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빌라도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은 해야 하는 것인 줄로 아는데, 마음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인 줄 아는데, 우리가 기도할 때나 모이면 입술로는 이렇게 살아야 주의 뜻이라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입술의 고백을 인정할까요? 그렇게 살지 않는 그 행위를 인정하겠느냐 그것입니다. 상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를 놓고 사도 야고보가 정확하게 정리를 해주셨는데, 약 4:17에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랬습니다. 
우리들 마음 속으로야 주의 뜻이 어떻다는 것 알고, 지지합니다. 주 뜻대로 살아야지 하면서 마음도 먹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유혹을 받아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데는 쉽게 몸도 마음도 내어주면서도 예수님처럼 살아봐야지 하면서도 성경의 말씀은 옳은 말씀이요, 진리요, 우리가 따라야 될 것이라고 하면서도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내 영광보다 더 크게 여겨야 된다는 것을 “아멘” 하고 입술로도 고백하면서도 막상 “주를 위하여 나를 부인하고 헌신하라”고 할 때 하지 않는다면 안 것으로 그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 고백했다 하여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굳게 생각했어도 행함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는 이중적인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약 2:14에도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많이 합니다만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다시 말해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행동은 엉망으로 딴 길로 갔지만 속에 믿음 하나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틀림없겠지요. 행동을 따로 하면서도 믿는 것은 또 틀림없이 믿어요. “나는 행동은 안 하지만 믿음 하나는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오늘 빌라도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빌라도보다는 조금 나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빌라도의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다를 바가 없고, 빌라도의 입술의 고백이나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빌라도는 실패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심도 좋았고 입술의 고백도 좋았는데 빌라도의 실패한 요인이 10절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이 구절이 빌라도를 죽인 겁니다. 
빌라도는 자기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 유대지역에 있어서는 절대권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를 놓을 권세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넘길 권세도 있습니다. 
빌라도는 절대권을 가졌습니다. 힘이 있는 자였습니다. 예수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빌라도가 예수를 세 차례나 예수님을 살리려고 시도를 하다가 백성들이 자꾸 소리를 치게 되면 이제 빌라도가 관정 앞에 나와서 “유대 모든 족속들 들으라. 

그리고 너희 지도자들 다 나와서 들으라. 내가 총독의 명으로 너희에게 엄명하노니 그리고 가이사 황제의 명을 받은 총독으로서 너희에게 명하노니 이 예수에게 돌맹이 하나를 던진다든지, 침을 뱉는다든지, 조롱한다든지 이 예수에 대해서 인격에 손상을 준다면 나는 그를 다 죽일 것이다.” 엄한 소리 한 번 내어버리면 그것은 절대적인 판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쳤는데 누가 감히 빌라도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예수를 못 죽입니다. 

그런데 그 같은 힘을 갖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예수를 넘겨주었습니까? 가이사 밑에서 계속 총독 노릇 하려고 그랬습니다. 가이사 밑에서 그 벼슬 유지하려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권세가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있으면서도 자기 사욕을 위해서 예수 살리는데 알고도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빌라도가 아닌 빌라도 밑에 있는 유대인이 이런 형편이 되어있다면 아무리 살리고 싶어도, 자기에게 힘이 없으니 못했을 때에는 차라리 그렇게 하다가 예수를 살리려고 하다가 죽으면 순교가 될 것입니다 마는 이 빌라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살릴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자기도 인정했고 세상이 다 인정하는데,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벼슬을 유지하려고, 자기의 수입을 계속 유지하려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중심에 안다면 무엇이든지 목숨 내어놓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다가 죽으면 뭡니까? 순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겠느냐?” “예 따라가겠습니다.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면 각각 자기를 부인해야 될 것이야.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 자만이 나를 따를 수 있을 것이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하여,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체면과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모든 여건을 다 부인할 수 있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자기 십자가를 진 자만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억울하게 죽으신 것처럼 우리가 주를 살리려고 한다면 우리도 억울하게 쫓겨날 수도 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쓸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세상에서 신앙생할 하면서 빌라도처럼 예수를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벼슬자리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사업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조건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행복한 그 환경 지키기 위해서, 가문 지키기 위해서, 직장 지키기 위해서, 마음은 확실히 믿으며 예수님 옳은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많은 사람에게 내어주어 버린다면,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데 버려둔다면 빌라도의 실패가 빌라도의 실패로 끝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천국이 그리 쉬운 곳이 아닙니다. 천국 가서 그 행복을 누리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바꾼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맞바꾸어 찾아낸 사람이라면 아무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귀하신 줄 안다면, 여러분께서 믿어 천국에 이르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닌 줄로 믿으시고 마음으로 믿는 대로 행동으로 옮기려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입술로 고백한 대로 그 믿음이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행위를 수반하는 입술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의 왕이 일개 총독에게 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집니다. 어찌 보면 감히 왕도 아닌 총독이 왕 중 왕이 되시는 예수님을 재판합니다. 왜 입니까? 바로 거기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건 사실 내가 받아야 할 재판이요 내가 져야할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내 대신 주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주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 예수를 놓아줄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죽어야 할 죄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또 놓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예수를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거기에 더하여 사랑에 이르기까지 순종함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리고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고 권능을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고 우리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런데 그걸 알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나 혼자서 내 힘으로만 세상을 살려고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다 어렵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주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모든 힘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지혜와 지식과 명철과 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 바울 사도가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니까 성경은 항상 내 마음속에서 옳고, 내 입술에서는 옳고. 그러나 내 행동은 항상 내 마음대로 가서 사는 생활, 계속 더하지 마시고, 말씀대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순간 이미 성령님이 내 안에 와 계십니다. 
어떤 분ㅌ은 말씀합니다.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래” 
어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도망치던 요나가 어떻게 됩니까?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지 않습니까? 결국 니느웨로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겁니다. 고생 박 터지게 하고 따르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기쁘고 당당하고 쉽게 사시렵니까? 지금 고달프다고요? 그럼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세상에 은혜는 공짜이지만 복은 공짜가 아닙니다. 심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심으시고 입술로 심으시고 행함으로 심으십시오. 그래서 풍성하게 거두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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