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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가 선포된 아침 (요 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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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선포된 아침 (요 8:3-11)


‘맥스무비’라고 하는 영화전문사이트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조사를 했습니다. 지난 일 년간 흥행했던 영화들을 놓고 그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물었습니다. “앞으로 10년 후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어떤 영화이냐?” 단순히 가장 좋은 영화를 물은 것이 아니라 10년 후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두 편의 영화가 뽑혔습니다. 첫 번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레미제라블”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한국 영화 “7번방의 선물”입니다. 여러분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레미제라블의 장 발장, 그리고 7번방의 선물에 나오는 여섯 살짜리 지능을 가졌다는 딸 바보 아빠 용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지금 사람들은 그토록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시간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실 때 지난밤 감람산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고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바로 그때의 장면입니다. 하늘의 진리, 천국의 소식을 전하고 계신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훼방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여인을 끌고 왔는데 그야말로 말씀이 선포되고 전파되는 참으로 은혜로운 그 자리를 기세도 당당하게 이 말씀의 자리로 들어오는 이 사람들은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많은 사람들이 있는 다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끌고 가서 세워놓고 이제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여기 여자가 한명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간음하다가 우리가 현장에서 잡아온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모세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했습니다. 선생은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질문에는 보통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알고 하는 질문과 모르고 하는 질문입니다. 모르고 하는 질문은 유익합니다. 겸손하게 배우려고 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고 하는 질문은 위험합니다. 시험을 하든지 논쟁을 하려고 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시험하는 중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럴 때 여기서 나오는 답이 딱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을 돌로 쳐야 되겠습니까, 놓아주어야 되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서 돌로 치라고 하면 예수님은 곤란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은 오로지 로마 황제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예수님이 “이 사람을 법대로 돌로 쳐라.” 하게 되면 살인교사죄로 로마법에 걸려서 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고발당하게 됩니다. 만약에 또 “놓아주어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모세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또, 모세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고발당하기 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위기의 딜레마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좋은 답변이 없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때에 몸을 굽혀서 땅에 글을 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무언가를 쓰셨다는 것입니다. 기록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해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직접 여쭤봐야 될 일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주님은 저 살기등등한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그 공격적인 질문에 몸을 굽힌 채로 글을 쓰시면서 대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도 쉬지 않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말을 해보라고요. 답을 해보라고요. 선생님은 뭐라고 답을 하겠습니까?” 이 다그치는 질문을 주님은 묵묵히 글을 쓰시며 그 공격을 홀로 견디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회피가 아닙니다. 드디어 주님은 그곳에 글을 쓰시면서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이 뭡니까? ‘이 여자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또 거기에 따라서 저 예수를 어떻게 고발할 것인가?’ 이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때 글을 쓰시면서 이들의 생각을 바꾸어 가십니다. 분위기를 가라앉히시면서 예수님의 그 말씀, 예수님의 진리, 예수님의 참된 사랑의 세계로 그들을 끌고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던 좌중, 또 그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그리고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이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드디어 일어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저 여인을 돌로 치라.”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말씀에 대해서 그 깊이에 계속 놀라곤 합니다. 특히, 우리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그 지혜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참 귀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원문의 해석에는 이 말씀을 쉽게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있느냐? 그렇다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여자를 돌로 치게 하라.” 이런 뜻입니다. 그 사람을 먼저 돌로 치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데 아무도 내세우지를 못합니다. 

평소 같으면 “당신이 먼저 쳐! 당신이 깨끗하잖아! 당신 정결하니까 앞장 서!” 할 수 있을 텐데 감히 그러지 못하는 겁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못하고 서로 눈들을 마주치고 있지만 다들 그렇고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속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나도 그렇고 그런 인간이지만 너도 별 볼일 없구나.’ 지금 그러고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이 사람들이 율법의 법도를 지키고자 했다면 중요한 것을 빼놨습니다. 이 여인을 현장에서 끌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현장에 이 여자 혼자 있었습니까? 그 남자도 끌고 왔어야 합니다. 

왜곡된 것입니다. 타락한 것입니다. 율법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생각과 해석과 실천 방식이 왜곡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율법에 담겨있는 그 사랑은 외면하고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욕심의 도구로 삼고 정죄의 수단으로 삼고 그리고 왜곡되고 타락된 방식의 모습, 특히 이 사람들은 지금 꽉 묶여있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혼낼 것인가? 어떻게 죽일 것인가? 저 예수를 어떻게 고발할 것인가?’ 이 생각에만 꽉 매여서 묶여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죄는 이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다면 그를 먼저 돌로 치게 하라.” 이 말씀으로 그들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엉거주춤 어쩔 줄 몰라 하고 이 사람들이 서있을 때 주님은 다시 몸을 굽혀서 글을 쓰셨다고 했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어른에서부터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들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몇 해 전 전주 교도소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이 전주 교도소에서는 해마다 두 번씩 교도소 체육대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그해 가을 체육대회는 특별히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난여름에 부임했던 교도소장이 20년간 수용자들, 또 2급 이상의 모범 재소자들을 생각해서 그분들의 가족들, 부모님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체육대회를 하는데 거기에 종교 교화 위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재소자들, 직원들 모두 모여서 아주 열띤 흥겨운 체육대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씨름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줄다리기, 배구, 족구…. 여러 가지 대회를 했습니다. 거기다가 오색 풍선이 날아다니고 만국기를 펼쳐놓고 응원을 하고 굉장한 분위기로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분위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숙연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오전 마지막 경기, 이름하여 효도관광 달리기였다고 합니다. 이 효도관광 달리는 이름처럼 수용자들, 재소자들이 자기 부모님을 자기 등에 업고 운동장을 도는 게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마음껏 흥분되었던 분위기로 응원이 나오며 땀 흘리면서 즐거웠던 분위기였는데 그때 숙연해진 것은 화약총 소리가 땅 났는데 아무도 출발할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심판들이 자세히 봤더니 그 부모님, 아버지 어머니 만난 재소자들이 그간에 쌓인 이야기를 하느라고 달리지를 못하는 겁니다. 아들의 등에 업히기는 했지만 그 등에 업힌 채로 “그간에 어떻게 살았냐?” 지난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 또 아들의 등에 업히기는 했지만 눈물이 나는데 아들도 눈물을 흘리니까 어머니가 아들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면서 “울지 마라.” 자신의 눈에도 눈물이 계속 나는데 아들의 눈물 닦아주는 어머니의 모성, 또 재소자들이 내 아들 같아서 이래저래 손을 흔들고 있는 어머니들…. 이분들은 화약총 소리가 “땅” 났는데도 그 소리도 못들은 것입니다. 

그 소리도 못들은 채로 서로 얼굴을 비비대고 얼굴을 만져주고 눈물을 닦아가면서 출발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판들이 재촉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출발을 하는데 이 분들이 아들의 등에 업혀서 운동장을 도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재소자들, 직원들도 그야말로 눈물이 나서 그 어찌할 바를 모르고 뒷짐 지고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무기수들, 때로는 10년 넘게 철창 너머로만 가려진 유리창 사이로만 바라보던 어머니, 또 아버지는 아들의 등에 업힌 채로 이제는 자기보다 거 커버린 아들의 등에 업혔지만 아들이 힘들까봐 “살살 해라. 힘들게 가지 마라. 괜찮다. 천천히 가자.” 그 경기는 그간에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이 가족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잠시나마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마음껏 울 수 있는 자유, 이것을 누린 것입니다. 그곳 직원들이나 재소자들이나 거기 온 모든 교화 위원들이 한 마음으로 눈물 흘리는 자유의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자유가 어디서 옵니까?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모두가 떠난 자리! 여기에 오늘 사실상의 주인공인 한 여인이 이제 남아있습니다.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이 그 마음의 수치,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여인인데 차림새는 어떻습니까? 그 옷매무새는 어떠하며 머릿결은 어떻겠습니까? 온 몸이 엉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끌려오는 동안 무슨 말을 들었겠습니까? 가진 협박, 저주, 많은 멸시의 말로 인해서 참으로 고통스러운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고독과 두려움, 공포,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게 지금 온 마음에 가득 매워져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조금 전에 돌로 맞아 죽어도 이 여인은 말도 못합니다. 그럴 만큼 양심의 가책으로 완전히 둘러있는 상황입니다. 이 비극의 주인공과 같은 여인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다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던 이들이 있느냐?”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풀어보면 “그 사람들 다 어디 갔느냐? 아무도 정죄하는 이가 없더냐?” 이 말씀입니다. “고발하던 사람들 다 어디 있느냐? 아무도 정죄하는 이가 없더냐?” “없습니다.” 예배자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 영혼을 향한 주님의 존재론적인 물음인 것입니다. 

“널 정죄하는 자가 없더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그 죄의 멍에를 벗어버려라.” 복음의 역사는 바로 이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양심의 가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책 후의 반응입니다. 오늘 우리는 방금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그 여인을 정죄하고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성경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에 떠나갔습니다. 

죄인임을 발견한 순간, 마음에 찔리는 순간 예수님을 떠나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어찌 보면 더 큰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 자리를 도망가고 싶은 여자입니다. 당장 도망가고 싶지만 혹시 좀 전에 나를 끌고 갔던 그 사람들이 뒤늦게라도 봉변하지 않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혹은 또 방금 나 때문에 저 곤혹을 당하신 어려움을 당하신 저 분,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두둔하시며 나를 구해주신 이 분의 처분과 도움이 필요한 이 여인, 바로 그 상황과 그 가책 속에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그 어려운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은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어거스틴은 교회를 병원에 비유해서 표현합니다. 교회라고 하면 자신의 죄를 기꺼이 인정하는 자세! 그리고 치료를 맡은 그 의료진들의 실력에 대한 믿음을 희망으로 갖고 있는 그 연합된 환자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는 교회 공동체! 여기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구원의 신비는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로 인해서 비참한 그 여인, 죄책감에 빠져 있는 이 여인을 찾아와 만나시고 그 죄의 무거운 짐을 풀어주시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그 죄의 짐을 풀어버리고 자유함에서 살아가라. 내가 그 자유를 위해서 왔다.” 주님은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입니다. 얼마든지 정죄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위가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정죄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여인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시는 사랑! 그 어렵고 곤란을 주는 고발자들의 공격을 묵묵히 받으시던 예수님의 그 사랑, 그리고 그 여인으로 하여금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 품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 주님은 오신 것입니다. 그 시간은 아마도 성전에 동녘의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그 아침에 이 여인에게 들려지는 자유의 선포! 그 안에서 우리는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을 더불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목회하는 교회 이야기를 잠깐 드리겠습니다. 어쩌다가 생긴 금요 친구 모임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기도실에 노숙자 한 분이 새벽에 기도하러 들어갔더니 거기 방석을 깔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너무 냄새가 나서 모른 체할까 하다가 깨웠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돈을 쥐어드리면서 “저기 가까운데 가면 찜질방 사우나가 있으니까 거기 가서 씻고 푹 쉬면 좋겠습니다.” 하며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인사를 하며 가면서 저한테 하는 말이 꼭 다시 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는 꼭 다시 오지 않아도 되는데 이분이 정말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오신 게 아니라 매주 열심히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에는 안보이고 주중에만 오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친구들도 점점 데리고 오십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들께 “여기 오시면 조금씩이라도 용돈을 드리십시오.” 했는데 하도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오니까 시간을 정했습니다. “금요일 오전 9시 30분” 이게 어쩌다 생긴 금요 친구 모임입니다. 간간히 기도회를 갖고 빵과 라면을 나눠드리고 함께 격려하고 힘차게 사랑이야기도 나누며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이 크게 부흥하고 말았습니다. 어떨 때는 70~80명이 몰려오시는 겁니다.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신문에서 와서 찍어가고 기독교 잡지에서 와서 인터뷰를 해가기도 하고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 이게 쉬운 일입니까? 여기저기서 항의도 많이 들립니다. “사지 멀쩡한 사람들 도와주는 게 잘하는 일인 줄 아십니까? 저 사람들 도와준다고 해서 그 사람들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지 아십니까? 고마워나 하는지 아십니까?” 이런 말들을 하십니다. “동네가 깨끗했었는데 저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담배꽁초고 술병이고 지금 널린 게 그때 그 모임 때문에 시작된 겁니다.” 이런 항의도 있었습니다. 

제 마음에도 회의가 생길 때가 있었습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데….’ 이런 속담도 자꾸 생각났습니다. 그런 중에 희망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씨라는 어떤 사람이 꾸준하게 나오다가 한동안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씨가 어느 날 따로 찾아오셨습니다. 금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에 오셨습니다. 저에게 인사를 하는데 “목사님! 이제는 자주 못 뵐거 같습니다.” “아니,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어디 가세요?” “제가 이제 직장을 잡아서 나가고 있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하면서 검정 봉지를 내미는데 “이게 뭐예요?” 하고 열어봤더니 박카스입니다. 

그것도 12개짜리 한 박스였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 분이 직장 잡았다가 첫 월급을 타자 그것으로 날 주겠다고 이렇게 사 오신 거였습니다. 그분이 자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그토록 원망했는데 자기도 술만 먹으면 정신을 잃게 되고 또 동거하던 여자를 너무 너무 때리고 살림도 다 망쳐놓고 또 술만 먹으면 어머니, 형, 누나 이런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모든 욕설을 하면서 원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 나를 차별했느냐, 왜 나를 미워했느냐? 왜 때렸느냐? 찾아가서 다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협박 욕설을 했다는 것입니다. 유치장에 갈 일도 여러 차례 생기고 그러다보니까 일자리도 잃고 어느 날 밤늦게 술 먹고 집에 왔더니 집이 텅 비었다고 하셨습니다. 같이 살던 여자가 버티겠습니까? 살림이고 돈이고 통장이고 싹 챙겨서 도망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 남자가 노숙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지하철 무임승차하고 몇 푼 생기면 술로 연명하고 아무데나 쓰러져 자고 그러면서 몸도 마음도 망가져 가는데 어쩔 수가 없더랍니다. 생각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대로 살면 안 되는데….’ 그런데 힘도 없고 용기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사람도 없고 아무 것도 힘주는 것이 없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다가 어느 겨울 밤 추운 날에 그날도 무임승차로 송탄역에 내려서 잘 곳을 찾는데 예쁜 크리스마스 추리가 보였다고 하십니다. 

당시 저희 교회가 송탄에 있는 교회인데 지하철역이 너무 썰렁한 것을 보고 크리스마스트리를 하나 장식해두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놓고 거기 조그마하게 글을 써두었습니다. “송탄의 성탄 트리” 그리고 그 밑에 썼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보고 물어물어 저희 교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들어갔는데 기도실에서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저희 교회를 만나서 모임에 나오면서 자신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무슨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신부도 아니고!” 그날 새벽 제가 고마웠던 것은 자신의 몰골을 보고 다짜고짜 화내면서 쫓아내지 않은 것이 그렇게 고마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감사하고 고마웠던 것은 전 당시에 벌써 기억에 다 잊었지만 그날 제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되었냐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눈물이 고마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그 사랑은 하나님의 눈물과 함께 있지 않았겠습니까? 

사실 목회를 하다보면 멀쩡하신 분들도 깊이 만나보면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로 자존감이 뭉개지고 원망 불평 욕설 이런 것이 마음에 차있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먹고 살아야 된다는 이유 때문에 수치와 죄책감을 뭉개버리면서 양심조차도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심정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 형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경우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 무한하신 사랑! 십자가에서 흘리신 하나님의 눈물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그날 그분의 손을 붙잡고 오늘 분문의 말씀을 함께 읽어드렸습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말씀을 대신하였습니다. 함께 울며 손을 잡고 기도하던 그날 그 시간 저는 그 시간을 ‘아름다운 졸업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엘레오스(eleos)”라고 합니다. 영어로 “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라함(מחר)”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태와 같은 무한한 사랑, 우리 주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자유가 선포된 그 아침을 만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 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나누는 것! 이것이 영생에 속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찬송이며 간증일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 속에서 영원한 자유로 초대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살아있음으로 인해 감사드리고 그 말씀이 지금 성취됨을 인하여 겸손히 머리를 숙입니다. 이제로부터 하늘의 영생에 이르기까지 저희가 은혜와 진리에 매인 삶을 살도록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으로부터 임하시는 천국의 빛이 오늘 우리의 가정과 삶의 자리에, 그리고 교회 위에 더욱 풍성히 비추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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