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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창 4:1-9)

첨부 1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창세기 4:1-9

교회사를 살펴보면 세계 선교역사 가운데서, 특별히 한국에 대한 선교역사는 다른 나라나 민족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색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증거의 역사가 여러 사도들, 특별히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열두 사도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움을 받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서, 이방인의 땅인 안디옥과 키프로스와 에베소를 지나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까지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서 나라와 민족이 발전하고 그런 나라들이 국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는, 심각한 박해와 핍박을 견뎌내야만 하는, 순교자의 피를 흘려야만 하는 아픈 과정이 있었지만,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은 지금은 ‘제 1세계’라고 불리는 구역을 구성하였고, ‘제1세계’라고 불리는,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복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복과 번영을 함께 맛보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시아권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한 나라입니다. 특별히 개신교의 세력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서는 대표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대한민국은 숱한 고난을 거치고도, 놀라운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조선왕조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패망을 하였고, 일제에게 36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당하다가, 이 민족의 자주적인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아래서 해방을 얻고, 국가의 주권을 되찾기는 했지만, 남북이 분단된 채로 있다가, 해방된지 5년만에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면서도,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과 중국군 대 한국군과 유엔군으로 이루어진 본격적인 국제전이 한반도에서 벌어졌습니다. 6.25전쟁으로 한반도는 초토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섭리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 당한 이런 민족적 고난과 어려움은 요셉의 고난처럼, 하나님께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연단이었고 담금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민족보다도 한민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민족을 철저히 낮추신 후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통해서만 이 민족을 살리기로 작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전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가운데서, 반세기만에 한국은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세계적인 기독교 국가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계를 움직이는 섭리는 예측할 수가 없고, 그 가운데서 한국을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역사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고난의 시절이 지난 지금입니다. 세계 선교역사에서, 유래가 없이 고난 후에 갑절의 은혜를 받은 한국교회였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그 어떤 민족보다도 모든 부분에서 큰 성장과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흥 후에,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서, 초창기 교회의 순수한 열정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의 엘리트주의가 목회자상을 왜곡시키고 있고, 예배와 말씀이 프로그램화 되어가면서, 영성이 메말라지고 있는 것이, 최근의 한국교회의 실상입니다.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리고, 믿음을 지키던 복음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예배의 홍수 속에서, 이제 많은 교인들이 “예배 버티기 모드(mode)”로 전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예배의 회복’을 위하여, 영적인 긴박함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에수께서 원하는 예배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본문 창세가 4:1-9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그 점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아담과 하와가 세상에 나와서 살다가 첫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가인이라고 합니다. 이름의 의미는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가인의 동생으로 아벨이란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 후에 가인과 아벨은 성장해서,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이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몹시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하였는데,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기를.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라고 합니다. 어느 날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기를, "우리 들로 나가자"라고 하여 들로 나가서는, 들에서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죽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묻기를,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자, 가인은 대답하기를,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을 이야기에 의하면, 색감에 예민한 사람은 색감을 1/1000도까지 구별한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같은 지휘자는 100개 이상의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동시에 연주하는 가운데서 잘못된 소리를 내는 악기를 집어내는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도 예배에 있어서 전문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행위 중심적 예배, 위선으로 포장된 예배, 기복적인 예배, 과시적인 예배 등 아론의 금송아지를 연상케 하는 잘못된 예배의식을 분별하고, 참된 예배자로서의 모범을 보이고, 예배에 있어서는 1/1000도를 분별하는, 영적 통찰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첫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예배론을 말할 때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을 해석하기 힘들 때,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구약성경에 대한 신약성경 기자들의 해석을 인용하는 방법입니다. 다행히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에 대한 내용이, 신약에 언급되어져 있어서, 해석에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요한일서 3:12절에서 사도 요한은 ‘가인’ 자체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라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에 있는,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속한 자의 예배”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황금으로 만든 솔로몬 성전을 기뻐하신다. 그 이유는 그 성전이 가장 비싸고 화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질중심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규모와 부동산의 가치 때문에 예배를 받는 분이 아닙니다. 

예배의 외형주의에 빠진 다른 유형의 사람들은, 아벨의 제사가 동물제사였기 때문에 가인이 드린 땅의 소산보다 더 좋은 예물이어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3:12절에서 사도 요한은, 가인의 제사가 열납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를, 가인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3:12절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동생을 쳐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예배행위만을 받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드리는 예배도 받는다는 점을 그리스도인은 유념해야만 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doing)를 받지 않고, 존재(being)를 받는 분입니다. 실제로 예배행위(doing)가 아닌, 사람의 존재(being) 자체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런 존재론적 예배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사마리아 여인이 장소적 예배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존재론적 예배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기를, ‘예배하는 자들이 ‘이 산과 예루살렘’과 같은 공간적 장소에 매여서 예배할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안에서 예배를 드리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요 4:23-24절에서 말씀하기를,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 존재가 산제물로 드려지는 예배를 말하는데, 로마서 12:1절의 말씀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체를 받으셨냐? 받지 않으셨냐?를 더 중요하게 보고 계시지, 아무리 훌륭한 재물과 예물을 바쳐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은 백성의 제물이나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 12:1절에서 로마교인에게 말하기를,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라고 합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오줌을 싸고, 똥을 싸고 하는 아기를,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온 몸으로 아기를 위해서 희생하고, 따뜻하게 감싸주고 돌보아주는 것이 바로 부모입니다. 아기 입에 들어 갓던 것도 거리낌 없이 먹습니다. 아기가 무엇을 토해도 아주 쉰운 자세로 받아내는 것이 부모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아이가 바로 나의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의 말대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림자적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는 예배는, 당신의 자녀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내게 속한 자식, 내가 낳은 자식이 드리는 예배를 받기를 원합니다. 반드시 화려한 옷을 입고, 많은 헌금을 내고, 사회봉사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는 것만은 아닙니다. 

한국교회 가운데는 건축비만 800억이나 들여서 지은 예배당이 있습니다. 반면에 월세를 전전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꼭 외형만 보고 예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녀의 중심을 보고, 예배를 받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외적인 것 때문에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언약의 백성이라는 자기정체성을 굳게 붙들고, 당당하게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이런 자녀들이 드리는 예배라면, 세상의 고된 노동 때문에 지친 몸으로, 교회에 와서, 아버지를 의지하고 예배시간에 조는 것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때로는 돈이 없어서 헌금을 못해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 때문에 하늘의 만나를 공급해 주시고, 그런 자녀를 기뻐하는 분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외형적인 예배보다는 먼저 평소에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으로 사는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본문 2절에 가인과 아벨의 직업이 소개가 되는데,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되었고, 차자인 아벨은 유목생활을 하는 목자가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이, 가인의 재물은 열납 되지않았고, 아벨의 재물만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다고 합니다. 

이 기사를 구체적으로 이해 위해서, 창세기 11:2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노아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정착생활을 하기를 바래서 시날 평원에 모여서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당시 노아의 후손들은 하루하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회의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이끄심과 보호보다는 자신들의 힘으로 정착하여 살아가길 원하면서, 평지에 정착을 하고 자신들의 흩어짐을 막기 위하여 바벨이란 높은 탑을 쌓으러고 기획을 하고 실천을 합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자기들의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어쩌면 가인이 농사를 짓기 위하여 정착을 했다고 하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헤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인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를 드리기에는 부적합한 상태일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당시 가인과 아벨의 마음과 믿음 자세가 비록 형제간이지만 서로 크게 달랐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보호 밖에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땅을 의지해서 살고, 땅을 섬기면서(아바드) 사람을 산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방향으로,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세상에서는 자신을 나그네라고 여기고 자기의 삶을 산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가인과 아벨의 삶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통해서도 드러나게 되었고,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히브리서 11:4절에서 증거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런 제물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의인이라는 증언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두고 증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 믿음을 매개로 해서 아직도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중심을 봅니다. 예배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지고 와도, 그 중심에 하나님께 대한 지정한 신뢰감과 믿음이 없다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서 드리는 예배도, 바로 여러분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라서 살겠다고 하는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믿음을 여러분의 중심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이스라엘이 전쟁터에서,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서, 오직 야훼의 능력만을 의지한 채로, 전쟁터로 나가서, 야훼의 말씀에만 순종함으로써,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서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언제나 승리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도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인,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조건이나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남군 연합에는 로버트 Lee 라는 아주 유능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군인 링컨에게는 로버트 Lee에 견줄만한 장군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링컨은 그것마저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링컨은 마치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처럼, ‘말이나 병거의 숫자를 의지하지 않고, 방백을 의지하기보다는 야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내게 더 좋다.’라고 고백하면서, 오히려 유명한 장군이 없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폭풍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의지하고 믿는 것의 근거가, 사람이나 직장, 자신의 명예나 학위가 되지 않도록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여러분도 아벨처럼 마음 중심에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모시고, 언제 어느 경우라도 상관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세로 믿음생활을 감당해서, 여러분의 모든 기도가 하늘의 응답을 받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님은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유다서 1:7-11절에서 유다서 기자는 교회에 침투한 이단에 대해서 말하기를,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의 성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음란함에 빠져서 다른 육체를 좇았으므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몽상에 빠져서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무엇이든지 본능으로만 알고, 바로 그 일로 멸망합니다. 그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을 걸었으며, 삯을 바라서 발람의 그릇된 길에 빠져들었으며, 고라의 반역을 따르다가 망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인의 길’이란,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행위를 말하기보다는 ‘가인의 불경건성, 불결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의하면, 가인의 악은 아벨의 살인 이후에도 ‘그는 육신의 쾌락에 빠졌고, 강탈과 폭력으로 축적한 부로 재산을 늘렸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치와 약탈로 이끌었고, 악한 행실에서 그들의 선생이 되었다.’라고 증거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을 갔다.’는 표현은, 진리와 상반된 행위와 불결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22-26절에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싸운 일이 있으면 먼저 불화한 형제와 화해를 하고 아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도 로마서 12:1절에서 요구하는 예배도 (Life Style), 곧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약 1:27절에서, 참된 경건에 대한 정의를, 자신의 영이 삶을 통해서 일치되어야 되어야만 한다고 하면서 말씀하기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믿음이 좋은 어느 집사님이, 영적으로 충만해지려고, 깊은 산 속에 올라가서, 열흘 동안 금식하며 기도를 하고, 성령 충만해서 기도원에서 내려오는 길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남의 집 과수원에 들어가서 사과를 따먹고, 열심히 땀 흘려 가꾼 남의 텃밭에 들어가서 무를 뽑아 먹었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면, 과연 열흘 동안의 기도가 참된 예배가 되었을까? 여러분 스스로 생각을 해보기 바랍니다. 

이사야서와 아모스서에 보면, 사람들은 굶주려 가는데 종교지도자들은 제사 제물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 종교적 권력으로 가난한  사람을 압제하고, 정치와 종교가 유착되어서, 세상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들이 드린 제물 때문에 구역질이 난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그런 사람들이 성전에 와서 드리는 제사는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 돌아가라.’고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삶이 나누어진 이원론적인 예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믿음과 삶이 일치되는 예배를 원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믿음이 경건의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녀가 아버지 서재로 살며시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이는 말 없이 아버지 옆에 조용히 앉아서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얼마 후에 아버지가 말하기를 "얘야 뭐 원하는 것이 있니?", "아니요" 소녀는 말하기를, "그냥 여기 앉아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녀는 조용하게 서재를 나갑니다. 그러니까 이 소녀는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달라고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 곁에 있고 싶고, 아버지를 사랑해서 온 것입니다. 소녀가 나가자 아버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시간을 보내면서,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좀 더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던가? 나는 하나님께 간구 할 일이 있을 때만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았는가?"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주님께 기도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필요한 것이 많아서, 종종 하나님께 급히 달려가서, 간구를 드리고는 충분히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지도 않고, 다시 급하게 달려 나옵니다. 그런 이에게 주님은 말씀하기를,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가만히 들어보게요

조지 뮐러는 아침시간에 기도하면서 성경을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뮐러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들 중의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게 되고, 그러므로 나의 마음은 안정되고, 용기를 얻고, 조심하게 되며, 내 마음을 견책하고, 훈계를 받곤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나의 마음은 주님과의 체험적인 교통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아침에 신약성경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주님의 보배로운 축복의 말씀을 본 후에 내가 하는 첫 번째 일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었고, 마치 그 말씀으로부터 축복을 얻어내듯이,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이 말씀에 대해서 대중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한 내가 묵상했었던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영혼을 위한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내가 거의 이런 규칙적인 일을 한 결과는, 불과 얼마 후에 나의 영혼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고백하게 되고, 또한 감사드리고 또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소원을 드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처음에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나, 곧 나 자신은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예배는 믿음과 삶과 예배가 일치해야만 합니다. 이제부터 이런 삶을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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