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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원대로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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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원대로 (마 26:36-46)

1. B.C.620년경, 예레미야는 나라(유다) 멸망 직전, 약관 20세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렘1:5-6) 

그는 결혼도 금지 당한 채로 자기 나라(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백성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적군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한다는 예언, 참으로 백성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나라 민족의 파멸이라는 하나님의 심판과 한 줄기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항복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강하고 거센 반발에 부딪쳤고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고향 사람들까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궁중 감옥에, 시위대 뜰에 있는 구덩이에 갇히기를 거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왕을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질그릇(오지병)을 깨뜨리며 “사람이 한번 깨뜨리면 다시 주워 붙일 수 없는 토기장이의 이 질그릇처럼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박살내겠다. 

시체가 너무 많아 묻을 곳이 없으므로 이 곳 도벳 골짜기에 갖다 쌓을 것이다.” 라고 예언함으로 유다의 파멸이 돌이킬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렘19장) 이를 듣고 있던 성전 질서 감독관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잡아 폭행하고 쇠고랑을 채워 감금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받았을 때 두려운 나머지 이렇게 사양합니다. 

“(렘1: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렘1:7-8)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가감없이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박해와 핍박은 점점 가중되고 견디기 힘든 온갖 조롱과 멸시를 홀로 당해야만 했습니다.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 날로 거세지는 반발과 핍박의 와중에서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도 해보았습니다.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포기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하고 있자니 하나님의 말씀이 속에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뼛속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음을 토로합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예레미야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렘20:14-18)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스럽구나. 내 어머니가 나를 낳던 그 날이 복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야, 아들! 자네에게 아들이 생겼어!' 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스럽구나. 그 사람이 여호와께서 사정없이 무너뜨린 성처럼 되었더라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를, 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않았는가?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죽었더라면, 그것이 나의 무덤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무엇 때문에 태에서 나와 이런 고생과 슬픔을 겪으며 수치 가운데서 나날을 보내는가? 

한 마디로 자신의 삶을 통째로 저주하는 것입니다. 전심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행했는데 너무도 힘들고 괴로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의 구원을 위해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했는데 그들의 회개는커녕 돌아오는 것은 핍박과 조롱, 비난뿐이어서 통탄해 하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러한 치욕 속에서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보내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부모를 저주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저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렘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출생하기 전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2.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성 동쪽 벽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감람산 기슭에 있는 동산입니다. 이곳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자주 들른 곳이었습니다.(눅 22:39; 요 18:1-2) 

예수께서는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죽음을 몇 시간 앞두시고 최후를 준비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막14:33)과 함께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지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고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돌을 던져 닿을 만한 거리에 가셔서 땅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자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괴로워 몸부림치시며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자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그리고 잠시 제자들에게 가보니 함께 기도하리라고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잠에 떨어져 곤히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희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정신 차려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이 약하구나.” 라고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고난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나는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보니 여전히 곤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눈이 피곤하여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는 그들을 자도록 두시고, 세 번째로 가셔서 똑같은 말씀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도하셨습니다.
 

3. 예수께서는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실로 고난의 쓴 잔,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심히 고민하사 슬퍼하셨습니다.”(막 14:33) 이 말은 ‘극심한 불안과 근심하시며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에 잠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로 예수께서 지금과 같이 곤경에 처한 적은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고통이 실제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 있어서 죽음의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지만, 그것보다도 한층 심한 고통이 되는 것은,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고후5:21), 하나님으로부터 저주(詛呪)를 받은 바 되는 것이었습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인류 최악의 고통스러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실로 ‘심히 고민’이 되셨던 것입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게다가 십자가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이기 때문에, 인간이 당해야 할 저주를 스스로 자취한 것에 대한 마음에 심각한 갈등으로 더욱 더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실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노여움의 잔을 마셔야 하는 인간 예수의 고통을 철두철미 체험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이 너무 심해서 거의 죽을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이러한 ‘고민과 고통’에 본질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연민(憐憫)과 격려로써 그 제자들이 자기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셔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셨던 제자들이었지만,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드린 기도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히브리서5:6-10을 보겠습니다.

(히5:6-10)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성전)에 들어가 제사(예배)을 드릴 때, 양이나 염소 등의 제물을 죽여서 번제단(燔祭壇)에 올려 불에 태웠습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희생될 제물을 가지고 성막 번제단 앞에 가서 제물 위에 손을 얹고 지은 죄를 고백합니다. 

이러한 행위로 자신이 지은 죄가 제물에게 전가(轉嫁)됩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지은 죄를 동물이 뒤집어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뒤집어 쓴 동물은 죽어야만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동물을 ‘속죄의 제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함 받기 위해 대제사장이 희생된 동물의 피를 가지고 1년에 한 차례 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래야 모든 백성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제사를 매년 해야만 했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증거한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9:12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기 위해 온갖 압박을 가하고, 심지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애굽 왕 바로의 압제 아래 이스라엘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과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세워 바로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내보내라.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강퍅한 바로가 그냥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리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10가지 재앙이 하나씩 하나씩,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때마다 애굽 전역에 걸쳐 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내게 된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장자 죽음의 재앙이었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은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어있지 아니한 집에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난 것, 즉 초태생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앙으로 어린양의 피를 볼 수 없었던 왕궁의 바로 왕의 장자를 비롯해 모든 애굽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자, 강퍅한 바로는 그만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되었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은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 전역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누구든지 이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재앙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는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를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갔다 해서, 넘을 유(逾), 넘을 월(越)자를 써서 유월절(逾越節)이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이 절기를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누구든지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어린양의 희생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양,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보이지 아니하면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없듯이, 이 시대에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되시어 피를 흘리시고 그 몸이 찢기셨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처럼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피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걸머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인류의 죄 사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사실을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예루살렘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막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피흘려 희생하므로 휘장을 열어,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휘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을 ‘지성소’(至聖所)라고 합니다. 그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그 ‘지성소’에 희생된 피를 가지고 들어가 ‘언약궤’ 위에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속죄의 제물을 합당하게 여기시면, 그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희생의 피가 부어지는 ‘언약궤’ 위를 가리켜 ‘시은소’(施恩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언약하신대로 죄 사함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온 인류를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어린양의 피를 ‘언약궤’ 위, ‘시은소’에 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휘장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온 인류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예수께서 열어놓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휘장으로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 찢겨 희생되심으로 그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에,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고 했습니다.

(히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하신 것은, 온 인류의 죄사함을 위한 대제사장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희생되셔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고 속죄의 제물로 희생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목전에 두시고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는 예수께서 겪으신 수난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 자아, 옛 사람을 철두철미 십자가에 죽이는 생활을 말합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에 어떠한 역경과 고통이 따른다 해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일로 받아들여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 사는 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12:2)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사는 삶이 가장 가치있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생활에 십자가가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그 십자가를 지고 삶으로, 마침내 ‘하나님 오른편’, 축복의 오른편에 앉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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