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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속에 있는 나 (창 29: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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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 있는 나 (창 29:21-30)

<시인과 촌장> 이라는 이름으로 가수로 활동한 [하덕규] 라는 사람이 쓴 <가시나무> 라는 노래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인기를 누리던 그가 어느 날 공허함으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려 술과 대마초등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누나를 통해 교회를 나가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지나 온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서 단 10분 만에 이 곡을 쓰게 되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지에 찔려 날아가고 /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우리는 살아가면서 두 눈으로, 또한 마음의 눈과, 생각의 눈으로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정작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숨겨져 있는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남과 비교하려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본능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정말 알아야 할 나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보는 데는 내가 보는 내가 있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내가 있고, 하나님이 보는 내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나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요? 세상의 잣대도 중요하고, 전문가적인 안목도 중요합니다마는 그 보다 앞서서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인정해야 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고서야 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조성하시고, 나에게 성정을 주시고, 어둠 속에서 빛의 자녀로 옮겨 주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그 앞에 선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것을 그대로 땅에 묻어 둔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 된 이해가 자신에 대한 잘못 된 이해를 형성했고, 비뚤어진 자기 이미지는 결국 자신의 재능을 땅에 묻어버리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곧 나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내 모습이 진실입니다. 내가 보는 나는 왜곡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도 비뚤어 보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나를 보려고 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 받으려고 하는데 그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심각한 불행은 불행에 계속 길들여진다는 점입니다. 그 불행이 체질화된다는 것입니다. 불행이 문화 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의고 무엇이 불의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거짓인지 진실인지 혼동되어 버립니다. 

한 종교문제연구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신뢰하고 사는지 신뢰도에 대해서 연구한 결과를 내놓았는데 그래도 제일 신뢰도가 높은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 다음이 군대요, 그 다음이 은행이요, 그 다음이 대법원순이었고 맨 마지막이 텔레비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조사결과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신뢰 할 수 있는 곳이 교회라고 하면서도 현실은 교회로 오지 않습니다. 전도한다고 열심히 합니다만 교회로 나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사에서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맨 마지막이었던 텔레비전 앞에 가장 많은 정보와 시간을 투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실해야 할 사람들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신뢰를 잃어가고, 신뢰를 보여야 할 교회가 기대와는 달리 신뢰를 잃어 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뢰할 만큼의 교회의 모습,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 앞에 우리의 모습을 회복해야합니다. 

점점 교회가 어려워지고, 전도가 어려위지는 이 시점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찾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다만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교회 다닌다는 것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는 우리들의 모습, 하나님의 자녀 된 내 속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야곱이라는 사람은 본래가 좀 간사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진실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고향을 떠나 외삼촌댁으로 피신하기에 이릅니다. 거기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으나 평생 그럴 수만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외삼촌의 딸인 라헬과 함께 양을 치면서 친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면서 외삼촌에게 “내가 7년 동안 일하겠습니다. 7년 후에는 라헬을 나에게 아내로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부탁을 하였고 외삼촌은 이것을 허락합니다. 

드디어 야곱이 그토록 기다리던 기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 보았더니 신부가 야곱이 바라던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노발대발합니다. 그리고 외삼촌을 원망합니다. 미웠겠죠. 하지만 외삼촌 라반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라헬은 건강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야곱이 아니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시집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이가 찬 언니 레아는 시력이 약했기 때문에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반이 생각한 것이 속된 말로 “끼워 팔기” 식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것이 심각한 문제로 발전됩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야곱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본문의 맥락으로 상당히 화가 난 야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속았다는 것을 알고는 외삼촌에게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속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지방의 풍습이 이렇고 저렇고 변명을 하려고 하지만 라반이 그를 속인 것도 사실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수고한 것,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정당치 못한 것을 지적하고 비판합니다. 당당하게 외삼촌 라반의 부당함을 공격합니다. 이 사건만을 놓고 볼 때는 당연히 야곱은 억울하고 라반은 백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런 시험을 주시느냐 입니다. 분명히 야곱이 이러한 시련을 겪을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에 대해서는 정당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반성함이 없습니다. 왜 자기에게 이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 사건 앞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이 나쁘다는 생각에 분노만 했지 나는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속은 것에만 분노 할 줄 알았지 내가 속인 것과 그로 인하여 분노했던 다른 사람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어디 야곱뿐이겠습니까? 가만히 보면 인간이란 언제나 이렇습니다.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분노는 참을 수 없고, 나로 인해 남이 당한 것에는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오늘 야곱이 그렇거든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도 여태껏 회개하지 않은 야곱입니다.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바로 회개할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는커녕 오직 외삼촌 라반은 나쁘고 자기는 정당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문제는 야곱의 삶을 보노라면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진정한 회개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훗날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보기 좋게 속습니다. 아들들이 막내 요셉을 놓고 벌인 일련의 사건이죠. 애굽에 팔아먹고는 죽었다고 하는 거짓말에 야곱이 속아서 숱한 세월을 애간장을 녹이며 살지 않습니까? 이거 회개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아무튼 지금 야곱은 라반과 자기와의 관계만 놓고 “내가 수고했다느니. 내가 정당하다느니. 당신이 분명 잘못했다느니”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회개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억울하게 속았다고 생각됐을 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참회하고 그 옛날의 잘못, 그 묻어 두었던 거짓을 회개하며 자신을 찾아야 마땅했습니다. 내가 남을 속인 것이 얼마나 악한 짓이었는지를 생각했어야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일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많은 불행이 한 여자 라헬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라헬을 지나치게 예뻐하고 사랑했기에 라헬이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도 야곱은 말리지 못했습니다. 훗날 그가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라고 고백하는데 아마도 그 험악한 세월의 상당한 부분이 라헬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싶습니다. 

야곱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날 때 그렇게 예뻐했던 라헬 곁에 묻히지 않고 레아가 묻혀 있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합니다. 깊이 뉘우치고 생각한바가 있기도 하거니와 흔히 말하는 죽기 직전에 철이 난 것입니다. 진작 그렇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쨌든 죽는 사람이 아무데나 묻힌들 어떻겠습니까만 그 질투 많은 여자 라헬은 혼자 묻히고 레아 곁에 야곱이 장사됩니다. 이제야 잃어버린 자신을 찾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 눈에 보이는 나를 믿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남들에 비해서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를 모르는 것은 불행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내 속의 나를 먼저 볼 줄 아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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