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왜 하필 다윗인가? (삼상 16:6-13)

첨부 1


왜 하필 다윗인가? (삼상 16:6-13)

오늘은 동화이야기를 좀 하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신데렐라 이야기를 다 아시죠. 신데렐라의 동화속의 주인공이 누군지 아시면 다 아시는 거예요. 신데렐라라는 아주 귀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일찍 떠나고 그는 계모 밑에서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계모와 세 언니들은 동생을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아버지가 있을 대는 잘해주지만 아버지가 안 계실 때에는 몹시 구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새엄마와 새언니들은 신데렐라를 아주 하인처럼 취급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히고 그리고 음식도 제대로 먹이지 않고 늘 굳은 일은 신데렐라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궁에서 무도회가 열립니다. 멋진 왕자의 부인을 찾기 위한 무도회입니다. 언니들은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들떠서 미장원에 가고 새 드레스를 입고 뭐 화장을 하고 난리를 떱니다. 자 그런데 신데렐라는 정작 갈수가 없습니다. 왜 그는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하고 입고 갈 드레스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훌쩍 훌쩍 울고 있는데 그의 고운 심성을 안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요술을 부려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호박을 가지고 마차를 만들고 또 쥐를 가지고 말을 만들고 다람쥐를 가지고 마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황금드레스와 유리 구두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신데렐라는 이제 멋진 처녀가 되어서 마차를 타고 왕궁 무도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이제 한 참 무도회가 진행 중인데 사실은 왕자의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없었는데 이 신데렐라를 보는 순간 이 왕자의 마음에 필이 꽂힙니다. 그는 신데렐라와 함께 춤을 추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밤 12시를 넘기면 안돼요. 그전에 돌아와야 되는데 그걸 잊어버렸어요. 열 두 시가 되어 종이 울렸을 때 신데렐라는 얼른 왕자와 작별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옵니다. 급히 나오다 보니까 그만 유리구두 한쪽을 떨궈 버리고 나왔습니다. 자 왕자는 이제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은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신하들은 유리 구두를 가지고 그 유리 구두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 전 백성들을 돌아답니다. 이 곳 저 곳 찾다가 신데렐라의 집까지 왔어요. 새언니들은 자기가 유리구두의 주인공이라고 신발을 막 신어보지만 신발에 발은 전혀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발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런데 옆에 하녀처럼 일하는 신데렐라가 있거든요. 신하들이 아니 저 자매에게 신발을 한 번 신게 해보면 어떻겠냐하니까 새언니들이 말합니다. 

제는 우리 집 하녀인데 신겨볼 필요도 없다고 해당이 안 된다고 그러나 신하들이 신데렐라에게 신발을 신겨보는 순간 신발이 맞았을까요, 안 맞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쏙 맞았는지 몰라요. 신발이 딱 맞춤신발이었어요. 그래서 신하들이 왕자에게 보고를 하고 왕자는 이 신데렐라를 자기 아내로 삼고 그는 나중에 왕비가 되어서 왕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리구두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이미 작정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사무엘 선지자는 뿔병의 기름을 부어 가지고 누군가에 부으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사람에게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일을 하려고 그가 뿔병에 기름을 채워서 먼 길을 떠납니다. 과연 그 기름부음을 받을 대상은 누구일까요.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사울왕은 처음에는 겸손한 왕이었지만 그는 나중에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외면하고 사무엘 선지자의 말도, 충고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드디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무엘에게 명령해서 내가 사울을 버렸음으로 너는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베들레헴 이새의 집을 아들 중에 한 사람이 내가 택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뿔병에 기름을 채우고 이제 기름을 부으러 가는데 그는 감히 소문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러 간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베들레헴에 도착을 했습니다. 베들레헴에 장로님들이 뛰쳐나와서 어떻게 된 일입니까? 두려워하며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까? 하면서 묻습니다. 내가 평화를 위해서 왔다. 내가 제사를 드리러 왔으니 이것을 준비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들을 그 자리에 초청을 했습니다. 

이새의 아들들이 이제 사무엘 앞에 한 사람 한 사람 지나가는데 첫 아들 엘리압을 보는 순간 사무엘 선지자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그렇게 키가 크고 잘생기고 꼭 탤런트 같았습니다. 아 이 사람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구나 막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는 거예요. 둘째 아들 아미나답이 지나가는데 아 이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예요. 셋째 아들 삼마가 지나가는데 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갔어요.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없었어요. 

그 때 사무엘은 이새에게 묻습니다. 너의 아들들이 다 지나갔느냐? 아닙니다. 말째가 하나 남아있긴 한데 그 아이는 볼 것도 없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 애는 아직 어립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아이를 봐야 됩니다. 그 아이를 데려오라. 그 아이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내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을 것이다. 엄중히 말합니다. 이새는 급히 전갈을 보내서 양을 돌보고 있는 막내 여덟 번째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다윗을 보는 순간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의 내적인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났다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그래서 다윗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을 부었더니 그에게 바로 성령이 임했고 그는 이제 이스라엘 왕으로 준비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의 이야기를 말씀 드리면서 저는 이런 설교제목을 정했습니다. 왜 하필 다윗인가? 그 여덟 명의 훌륭한 아들 가운데 왜 꼴찌 막내인 다윗을 하나님은 택하셨을까? 왜 하필 다윗일까? 우리는 오늘 이 질문을 가지고 이 본문을 접근해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말로 질문한다면 하나님은 왜 다윗을 선택하셨을까? 아니, 다윗은 어떤 조건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입을 수 있었을까?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선택받은 이유는 첫째, 하나님께서는 외모보다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옆에 분들에게 한 번 이야기 해주세요. “하나님은 외모보다 중심을 보십니다.” 네, 외모가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하나님은 외모보다 그 중심에 더 많은 비중을 가지고 계신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오늘 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아멘.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겉 모습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 외모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눈이라는 히브리어와 동일한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모라는 건 우리 인간의 눈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모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 용모 신장 배경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들 이것이 바로 외모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 만 봅니다. 또 그의 학벌도 겉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중심은 아닙니다. 중심은 마음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그 마음, 내면세계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것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내적인 겸손이나 신앙이나 인격이나 진실성 등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외형으로 보는 것은 늘 옳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중심은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로 요즘은 외모 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물론 외형, 첫 인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속사람 그의 내면인 것입니다. 

역사 속에 위대한 사람들은 아주 외모가 볼품없던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그는 얼굴이 울퉁불퉁하고 깡마르고 눈이 작고 튀어 나와서 아주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철학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종교 개혁의 칼빈. 그는 빼빼마르고 눈에는 항상 진물이 흐르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 개혁의 위대한 선물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럼 링컨을 보면 사실 따지고 보면 몸과 얼굴이 아주 깡마르고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리가 너무 길어서 신체에 밸런스가 맞지 않았고 그의 외모를 보고 사람들은 고릴라라고 놀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흑인들을 해방하는 위대한 업적을 우리 인류사에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바라보는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한 사도 바울. 그는 작은 키에 시력도 나빴고 간질병까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으면 너무 너무 위대하고 장엄한데 만나면 볼품없는 존재가 바로 사도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위대한 영성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에 그런 잘못된 풍조가 있다는 것을 깊이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제는 장애인의 날이었고 오늘은 전 교회가 장애인 기념 주일로 지킵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이 우리의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지적 장애인들이 있고 또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애우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 태어난 우리와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외모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을 똑같은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고 그분들을 사랑하고 그분들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그리고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장애인 주일을 보내면서 새롭게 결심해야 할 그런 내용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오늘 다윗의 중심을 보셨다. 그것은 다윗의 진실됨, 다윗의 정직, 다윗의 겸손 다윗의 긍휼을 보셨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몇 가지 예를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도 범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진정한 정직은 그가 잘못을 지적 받을 때 그는 변명하지 않습니다. 핑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회개하고 실토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정직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핑계하기 쉽지만 다윗은 정직하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일생동안 그를 괴롭힌 가장 대표적인 사람을 뽑는 다면 그의 장인이자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겸손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을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은 그 다윗의 겸손을 눈여겨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긍휼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대적인 사울왕의 손자 절름발이 므비보셋을 그는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왕위의 식탁에 늘 같이 함께 하고 그를 존귀한 손님으로 대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넓은 마음이었습니다. 

원수 된 사람의 손자였지만 그는 자기의 친구처럼 므비보셋을 가까이 대하고 존경했습니다. 존중히 여겼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진실 된 속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사람 보다도 우리의 속사람을 더 귀중히 여기십니다. 정말 오늘 우리 영신교회 교우들은 다 멋진 분들이지만 여러분들의 속사람이 더 아름다워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다윗이 선택받은 이유는 하나님은 서열 보다는 충성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은 가정들을 보면 제가 어릴 때도 보면 저는 칠 남매이기 때문에 제 위로 누님이 둘 있고 형님이 네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늘 어머니께서 장남을 제일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 맏아들 우리 장남! 그래서 우리 집에서 시계를 차고 있는 분은 장남 밖에 없습니다. 장남은 늘 새 옷을 입고 동생들은 늘 형이 입던 것들을 이어 받습니다. 신발도 늘 새것입니다. 장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장남이라는 것은 서열상 항상 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택하셔도 당연히 장남을 택하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막내인 다윗을 선택하셨을까? 간단합니다. 다윗의 충성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여러분 사무엘 선지자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동네에 왔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뉴스거리입니다. 아마 신길동에 싸이가 왔다! 그러면 여러분 아마 예배 안 드리고 가실 분이 혹시 있을까 모르겠어요. 이처럼 사무엘은 그 당시에 최고의 인기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새의 아들들이 초청을 받았다면 거기에 가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이새는 다윗에게 ‘야! 너는 갈 것 없어. 넌 너무 어리잖아. 넌 들에서 양이나 쳐’ 하고 다윗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일을 진실하게 수행합니다. 양떼들을 잘 돌봅니다. 

그래서 17장에 보면 다윗이 그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양들을 치다보면 사자나 곰들이 와서 양 새끼를 빼앗아 갈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그 맹수에게 달려가서 그를 죽이고 그 입에서 양 새끼를 빼앗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한 일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져 있는 양 무리들을 그는 소홀함 없이 최선을 다해서 돌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최고의 충성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 양 세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인물이라면 내가 한 나라를 그에게 맡겨도 괜찮겠구나’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어떤 분들은 큰일에만 충성하려고 해요. 작은 일에는 충성을 안 해요. 나에게 좀 큰일을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교회는 작은 일 큰 일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귀한 일이고 존귀한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더 크게 쓰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바로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구역장님의 일은 매우 위대한 일입니다. 내게 맡겨진 양떼들을 잘 돌봐야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의 직무는 너무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한 어린이도 마귀에게 빼앗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단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세 번째로 다윗이 선택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스펙보다 믿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스펙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떤 회사에 취직할 때 더 많은 스펙을 쌓아야 겠다. 그것은 자격증을 더 많이 준비해서 자기 배경을 더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스펙으로 보면 다윗은 보잘 것 없습니다. 그는 그저 양떼를 친 것이 그의 스펙의 전부였습니다. 오히려 스펙으로 보면 엘리압 그의 장남 형이 더 많은 스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삼형제는 이미 사울을 따라 전쟁터에서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전쟁에 나간 많은 경험 스펙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펙보다도 믿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엘리압에 대해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는데 마침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은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나와서 큰 칼을 휘두르는데 아무도 그 앞에 대항할 자가 없었습니다. 

40일 동안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너희 중에 나와 겨룰 자가 있으면 나와라. 아무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도 아브넬 장군도 나갈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심부름을 간 다윗이 거룩한 분노를 가졌습니다. 어찌 할례 받지 못한 자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내가 나가서 저를 무찌를 것이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 이야기를 큰 형 엘리압에게 전해주었어요. 그런데 엘리압이 다윗을 막 꾸짖었습니다. 네가 양떼를 돌보기 싫으니까 여기 와 전쟁 구경 하러 왔구나. 내가 네 맘의 악한 것을 알아. 네 마음의 교만을 알아. 하면서 비난합니다. 

저는 이것이 큰 형 엘리압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막내 동생을 이해하기 보다는 무조건 외형만 보고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압을 버렸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이방 사람에게 모욕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 왕에게 가서 내가 저 골리앗을 무찌르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울 왕이 말립니다. 

어린 네가 어떻게 가서 싸울 수 있겠느냐. 그때 다윗은 말합니다. 저는 양 떼를 돌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도 건져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불레셋 사람들의 손에서도 저를 건져 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내가 사자와 곰에게서도 승리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승리를 허락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내가 저 짐승과 같은 골리앗과도 싸울 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 이하에 보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길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자기 손에 물맷돌 다섯 개 밖에 없었지만, 어린 나이지만 저 무서운 장수 골리앗을 무찌를 것을 확신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의 배경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승리케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패배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자입니다. 우리는 패배주의에 열등감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저는 교우들에게 하나님을 믿습니까? 라고 질문하면 한결 같이 다 믿습니다, 대답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라고 질문하면 별로 대답을 안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그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해요.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에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분이에요. 그분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다윗은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서 물맷돌을 골리앗을 처지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옆에 분들에게 물어보십시다. 당신의 믿음의 사람 맞습니까? 여러분들 모두가 믿음의 사람이길 바랍니다. 

시편 89편20절에 보니까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역대하 16장9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오늘도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면서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과연 믿음이 있는자가 어디에 있느냐? 나만을 바라보고 나를 의지하는 자가 어디에 있느냐?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전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 이런 적용을 하고 싶습니다. 이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에게 너의 막내아들 그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새는 사람을 보내서 다윗에서 전갈을 보냈습니다. 자 그때 다윗이 양을 치던 다윗이 아니 언제는 아버지가 들판에 양을 치라고 하더니 이제는 돌아오라고요. 에이 기분 나빠 안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윗이 만약 그 자리에 오지 않았다면 사무엘 선지자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수 가 없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어요. 

여러분 이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내일부터 시작되는 천국잔치 말씀의 잔치는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천국잔치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기름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진실로 선택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에 기쁨과 변화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해요. 늘 하는 부흥회 그런거지 뭐. 아니에요. 이번 천국잔치는 하나님이 여러분들 위해 준비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것을 부어줄 수 있을까요? 이사야 55장3절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영혼이 살아납니다. 말씀을 들으면 인생이 변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기회 여러분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처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 도망는 없었더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역사의 현장, 기적의 현장, 은혜의 자리에 여러분들이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내일 저녁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그 은혜의 자리 생명의 자리에 꼭 참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매일부내는 시간 수 많은 예배 거기에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새로운 일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바로 하나님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고 계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뒤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꼭 내일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집회에 참석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경험하는 은혜의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영무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