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말의 신앙 (살전 5:1-11)

첨부 1


종말의 신앙 (살전 5:1-11) 
  
1992년 다미 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이, 한국 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지도, 벌써 20년이 지나갔다. 그 날의 충격과 여파는, 한국기독교 100년 역사상, 가장 컸다. 1992년도 사건 이후에 한국 교회는, 종말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사라졌다. 종말신앙을 말하면, 이단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종말신앙은,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이요, 보상이다. 또 초대교회의 마지막 소망이고, 기독교 역사상, 고난 받고 핍박받는 자들의, 가장 큰 위로였다. 재림신앙이 없이도, 마지막 때를 인내하고 승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마귀의 가장 큰 역사는, 시한부 종말론 자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성교회의 재림신앙을 약탈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드는 일이다. 재림의 예수님과 종말신앙에 대한 무관심은, 마귀 역사지, 결단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다.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 보통 4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다. 

(1) 자연 재해를 통한 종말이다. 

환경파괴로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말이다. 환경오염, 기후변화, 생태계의 교란 등으로,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실제로 엄청난 환경오염이 자행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 대가를 치루고 있다. 

최근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 폭우, 폭설, 등 이상기온 현상과 환경 재난이, 실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엄청난 지진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난다. 때문에 지구 종말이라는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2) 핵전쟁을 통한 종말이다. 

지구상의 핵무기는, 지구를 몇 백 번 박살낼 수 있다고 한다. 어떤 미친놈이 핵무기를 잘못 다루어, 상대국을 공격하게 되면, 피차간에 핵무기를 쏘아, 핵전쟁이 일어나, 그때 종말이 온다는 말이다. 

(3) 지구의 종말은 없다. 

지구의 종말이 없다고 단정하고, 종말을 주장하는 것은, 종교단체에서 공연히,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갖게 하려는 것이라며, 기독교를 표적삼아 욕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종말이다. 

(4) 주님의 재림을 통한 종말이다. 

성경에 기록된 종말을 믿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은, 하나님에 의한 종말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멸망이나, 행성충돌로 인한 멸망도 아니다. 핵전쟁으로 파국을 맞는 것도 아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죄로 물든 세상을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종말이다. 예수님이 다시 온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정확하고, 오류가 없기에, 반드시 성취된다. 

종말은 분명히 온다. 종말을 준비하라는 말은 우리의 추축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고 경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4장에서는, 예수님의 재림과,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해서 권면하고, 5장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교훈한다. 그렇다면 이 말세를 사는 성도들은, 과연 어떤 자세로 종말을 준비해야 하나? 

1. 재림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한다(1-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와, 시기에 관해서 쓸 것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반드시 다시 오시는데, 그 날과 그 시간은 모른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오실 날이, 밤에 도둑같이 모르게 이른다는 말이다. 도둑이 남의 집을 털 때, 예고하고 터는 도둑은 없다. 

“여보세요. 나 도둑이오. 내가 4월 28일 저녁 11시에, 당신 집을 털 것이요. 그러니 기다리시오.” 이런 도둑은 없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도, 몇 월 며칠에 다시 오겠다 하지 않았다. 반드시 다시 오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고 승천했다. 그러기에 굳게 믿기를 축원한다. 

사람들은 그 날과 그 때가, 어느 때인가를 궁금해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막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늘의 천사도, 그날은 모른다. 심지어는 오실 예수님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날짜를 알고 싶어 한다. 이단은 자기에게만,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스스로 이단임을 증명한다. (행1: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그 날을 알려고 하지 말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마치 임신한 산모가, ‘평안하다, 안전하다’할 때, 애기가 태어날 날은 대충 알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산통이 오고, 아이가 태어난다. 

이처럼 갑자기, 주님도 알지 못하는 때에, 오신다는 것이다. ‘이르리니’(에피스테미)는 ‘위에 서다. 습격하다.’는 뜻이다. 도둑이 갑자기, 습격하는 이유는 2가지다. ① 한 밤에는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할 때이며, ② 집 주인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했다. 누가 피할 수 있는가? 사람은 피할 수 없다. 모두에게 임하게 된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을, 거부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다. (막13:26-27)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날은 지구의 어느 한 쪽에만, 오시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오신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상공에 오시면, 미국이나 아프리카 백성들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초자연적인 재림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재림 주라고 외치는 미친놈들은, 모두 다 가짜다. 주님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신다. 

그 모습을 사람들이, 다 보게 된다. 그때 천사들이 동원되어,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땅 끝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게 된다. (계1:7上)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이만희는 구름 타고 온다는 말을 부정한다. 

(히12:1上)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그는 구름을 허다한 증인으로 해석하고, 증인들 사이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자기가 보혜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구름타고 온다는 말은, 영으로 온다고 한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라(행1:11)을 부인한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으니, 주님의 재림을 의심하지 말라. 그리고 아직 멀었다고 태평하면 안 된다. 그날과 그때를 모른다는 말은, 오늘 저녁에도 올 수 있고, 내일 올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재림신앙으로 무장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재림신앙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 날짜를 알려고 하지 말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불시에 기습을 당하지 않는다. 

(4-6)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낮과 밤, 빛과 어둠은, 무엇을 말하는가? 밤은 보지 못함을 말한다. 도둑들은 보통 밤에 오기에, 어두워서 도둑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이 들어있다. 도둑이 낮에 오면, 우리는 볼 수 있기에, 대비할 수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이 오심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정신 차려야 한다. 정신을 차리라(νήφω)는, ‘술을 끓다, 술이 깨다.’라는 단어다. ‘술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의 상태’를 말한다. 술에 취하면 상황판단도 안 되고, 몸도 마음대로 안 된다. 그래서 업어 가도 모르고, 도둑이 다 털어가도 모른다. 그러기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여기서 ‘다른 이들은’, 믿지 않는 사람이다.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술 취해서, 있는 것처럼 말라. 믿는 우리는 ‘낮에 속한 자’들이다. (7-8)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도둑이 왔을 때, 대비하지 못하는 자는, 깨어있는 자들이지만, 술에 취해서 있을 것이다. 완전히 잠이 깨어서, 맑은 정신으로 있을 때, 도둑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정신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낮 시간에 합당한, 행위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을 주시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마24:4-13) 읽어보면, 우리 시대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깨어 경계하라는 말이다. 엉터리에 끌려가지 말라는 말이다. 

적그리스도와 이단들이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외쳐댄다. 난리의 소문, 전쟁의 소식, 기근과 지진, 핍박과 환난이 계속된다.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다. 소돔과 고모라 때와 같은, 현상이 있을 것이라 했다. 신앙보다는 인간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무섭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서도, 아직 예수님이 오실 때가 안 되었다고 방심한다면, 그 사람은 시대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보고, 깨어 있기를 축원한다. 오늘 주님은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어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기차를 탔을 때, 종착역에 다가오면, 사람들은 내릴 준비를 한다. 비행기를 타도, 비행기가 내려서 공항에 도착하면, 모든 승객이 미련 없이 짐을 챙기고, 내릴 준비를 한다. 오늘 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내릴 준비를 않고, 미적거리고 있지 않는가? 

또한 (딤후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이것도 우리 시대 이야기이다. 이 시대는 예수님을 믿어도 지나치게, 부담스럽게 믿기 싫어한다. 

그래서 교회 봉사자원자가, 나날이 줄어든다. 연초만 되면, 주일학교 교사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 목자들도 그렇고, 봉사직분에 사람을 찾기 어려워, 목사님들이 속을 끓인다. 대다수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 즐기기 원하지, 힘든 봉사와 헌신은 기피한다. 부담 없이 예배만 참석하고, 돌아가길 좋아한다. 

신앙생활이 여가생활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나 여가생활이 아니다. 생명이 걸려있는 영적생활이다. 그런데 그렇게 절박하게, 믿는 사람이 없다. 돈벌이를 위해선 열심히 뛰는데 주님을 위해서는 적당히 하고자 한다. 

정말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실, 말세가 된 것을 믿는다면, 이렇게 주님을 믿어도 될까? 과연 이런 모습이, 올바른 신앙일까?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음을 알고, 깨어 있어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깨어 있기를 바란다. 


3.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가?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 재림과 심판을 두려워했다. 8절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했다.  어떻게 구원의 소망인, 투구를 쓸 수 있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어떠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가? 

바울은 이 질문들에 대답했다. (9-10)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①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선물로 받게 하심이었다. 

②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목적이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지하고 있다.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권면하다(파라칼레오)는  가까이 부르다, 초청하다, 위로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2가지로 말할 수 있다. 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초청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다. 

그제야는,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그때, 주님이 다시 오신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위한 준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했다. 

그리고 (막16:15) “또 이르시되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 다시 오신다고 했다. 그러기에 선교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작업이다. 특별히 주님은, 영혼구원을 기뻐한다. 그 일에 힘쓰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오늘 이 시대가 말세임을 깨달았다면, 영혼 구원하는 선교사역에, 더 힘써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고는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한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지구상에 아직도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인구가, 20억이 넘는다니,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한다. 

개인의 종말이 먼저 올지, 지구 종말이 먼저 올지, 아무도 모른다. 지구의 종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종말을 대비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나의 종말이 올지 모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나만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 주변의 영혼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권면해야 한다. 그리고 (덕을) 세워야 한다. 어떤 것이 덕인가? 덕 중에 최고의 덕은, 지옥에 가지 않게 하고, 천국 가도록 돕는 것이, 최고의 덕이다. 

우리의 가족 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분이 있나?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날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가실 줄 알았다면, 제대로 복음을 전했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떠날 줄 몰랐다. 그렇게 떠나고 난후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믿지 않고 죽으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② (4:18)에서 ‘위로하다.’로 번역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쉽게 상처를 받기에, 이 세상은 고달프고, 매정한 장소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가, 심판하러 오심을 생각할 때,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감정들은, 우리 마음의 평안함을 깨뜨려, 낙심하게 만들 수 있기에, 서로 위로하기를 원한다. 

미소, 포옹, 악수 같은 간단한 것으로부터, 참을성 있게 듣는 것, 동정, 우정 등과 같이,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방법들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오히려 염려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 복음의 진수는, 예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데려 가신다. 다시 오실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다. 그러므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덕을 세우자. 

  
결론이다. 

분명히 종말이 온다. 지구 종말도 오고, 내 개인 종말도 온다. 어느 것이 먼저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것이 먼저오든지, 별 차이가 없다. 준비되어 있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말하기를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가, 오늘 오후에 오실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다. 오늘 종말이 와도, 담대히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