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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눅 13:6-9; 롬 8: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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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눅 13:6-9; 롬 8:35-39)

 1.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포도나무도 흔하고 무화과나무도 흔하지만,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넓고 잘하면 키가 10미터까지도 자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무화과나무의 그늘에 가려 포도 농사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원 주인은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아마도 포도원 한쪽 넓은 공터에 심었겠죠. 아무튼, 포도원 주인이 그런 이례적인 일을 한 것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특별한 애착과 기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났건만 그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3년 동안 해마다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포도원을 찾았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은 지 2-3년 지나야 열매를 맺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제 그 나무는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자, 마침내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땅만 차지하고 있는 그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 해만 더 시간을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2. 

이 비유의 말씀은 대부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초점이 맞춰져서 해석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무화과나무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포도원지기의 마음을 헤아려봅시다. 포도원의 주인도 냉정한 사람은 아닙니다. 열매를 기다렸던 삼 년이란 세월은 무화과나무에게 충분한 기회를 준 주인의 너그러움을 반증하는 시간입니다. 

아무튼 주인은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포도원지기에게 “찍어 버려라!” 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 명령 역시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누군들 그런 나무를 마냥 두고 보겠습니까? 

이에 대해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청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여러분, 포도원지기가 그 동안 무화과나무를 방치해두었기 때문에 다음 일년 동안에는 나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원지기는 누구보다도 더 간절하게 그 나무에 열매가 맺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년 최선을 다해서 돌보았을 것입니다. 마치 부모의 마음이 어려움 당하는 자녀에게 더 가듯이, 어쩌면 포도나무를 돌보는 것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써서 무화과나무를 돌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아무 열매도 열리지 않았을 때, 가장 안타깝고 속상했던 사람은 바로 포도원지기였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결코 포도원지기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마치 자기 탓인 양, 한 해 더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마치 자식이 잘못했을 때 부모가 “다 내 탓”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더 공을 들이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한 말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3년이나 기다렸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4년 차에도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다음 해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주인의 명령을 따라 포도원지기가 무화과나무를 찍어 던져버리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다음 해에도 또 다시 “한 해만 더 시간을 주세요”라고 부탁할 것입니다. 그 다음 해에도 또 “정말 한 해만 더 기회를 주세요”라고 간청할 것입니다. 절대로 무화과나무를 포기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못하는, 그것이 포도원지기의 사랑입니다.

3.

이 포도원지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던 소돔성을 위하여 하나님과 씨름을 했던 아브라함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심판하실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 성에도 의인이 있을 터인데, 악인 때문에 의인까지 멸망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집니다. 그리고는 “그 성 안에 의인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여쭙습니다. 

하나님은 그렇다면 “그 성 전체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시 간청합니다. “마흔 다섯 명만 있으면요?” “마흔 명만 찾으시면요?” 그 다음에는 서른 명, 또 다시 스무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 명의 의인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을 받아냅니다.(창 19:16-33)』

최선을 다해서 조카를 지켜주려는 아브라함의 사랑이 얼마나 가슴 뭉클합니까?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지켜주려는 포도원지기의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다음 날이면 자신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질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어주시던 주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복음 13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 13:1) 

교우 여러분, 예수께 누가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까?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사랑스럽기에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도대체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슨 큰 일을 했길래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한 마디로, 저와 여러분이 사랑 받을 자격이 충분하기에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까? 자신의 몸과 맘을 추스를 여유조차 없을 인생의 가장 큰 고비 길에서도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입니까?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결국엔 죄인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롬 3:23) 우리가 아무리 역사를 바꿀만한 큰 일을 하고 교회사에 길이 남을 큰 업적을 이룬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은 전적으로 값없는 은총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4.

톨스토이는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야말로 나는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사실은 사랑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을! 사랑 속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살 수 있기에 그것을 걱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에 돈 걱정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그것은 “다만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사실은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모의 사랑이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주었고, 누군가의 사랑이 있다면 또한 그 사랑이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지 육체적인 필요를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충족시켜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함께 살리는 것은 바로 사랑인 것이죠. 

몇 주 전에 둘째 아이와 한바탕 전쟁을 벌였습니다. 아이는 그 동안 저에게 쌓였던 불만을 한껏 쏟아낸 후에 제 방으로 갔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 서로의 마음이 가라앉은 후에, 제가 아이 방으로 갔습니다. 등을 돌리고 앉은 아이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네 말대로, 아빠가 너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다. 네 마음을 몰라준 때도 많았다. 

오늘처럼 네가 나에게 화를 낼 때에도 속상하지만, 내가 너에게 너무 부족한 아버지라는 것을 확인할 때에 더 속상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널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널 나에게 보내주신 순간부터 널 사랑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히 널 사랑해. 그것만 꼭 기억하면 좋겠어.” 잠시 정적이 흘렀고, 아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다가가 안아주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그날 함께 울었습니다. 실컷 울었습니다. 

여러분,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지 않은 자녀, 부모의 사랑이 필요치 않은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가 아무리 부족해도, 자녀에게 부모의 사랑은 행복을 위한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부족하고 무능한 부모의 사랑도 자녀에게 그렇게 절대적인데,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에 응답해주실 수 있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입니까? 그 절실한 사랑을 우리가 구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주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사랑을 거절하시겠습니까?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힘입어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5. 

형제자매 여러분, 다른 것 다 잊어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는 사실은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다 믿지 못해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계 3:9)는 사실은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말씀은 다 외면해도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 15:9) 하시는 예수님의 초대는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내 남편(아내, 부모)’이 제일 좋은 사람입니까?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입니까? 다른 집보다 허름해도, 그곳에는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교회’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입니까? 비록 다른 교회보다 초라해도, 그곳에는 나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믿음의 벗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은 바로 내가 사랑 받는 곳,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포도원지기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누가 주님만큼 저와 여러분을 조건 없이, 그리고 가없이 사랑해주겠습니까? 인생의 도를 일깨워주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는 스승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힘들거나 외로울 때에 도움을 주는 친구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은 만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만큼 크고 놀라운 사랑은 없습니다. 일평생 그 크고 진실하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로마서 8장에 있는 바울의 신앙고백을 읽음으로써 마침 기도를 대신하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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