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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승리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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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승리 (고전 1:18-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는데,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슬하에 오직 공주만을 두고 있었던 그 왕은,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말 타기와 활쏘기였는데,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으로, 왕이 한 문제를 그들에게 냈습니다. “저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오라. 기간은 100일이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나무를 구하려고 제각기 길을 떠났습니다. 

그 젊은이들 중에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 나무를 구하다가 찾지 못하자,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현명한 왕이 되어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던 페로는, 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나무 십자가뿐이다.” 그 후 페로는 지혜로운 왕이 되어 오랫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 일화가 우리에게 교훈해주는 대로, 십자가야말로 하늘과 땅 곧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도는 양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전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한 없이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철학자들이나, 유대교의 랍비들이나, 헬라의 웅변가들, 곧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의 실패라고 단정하고 조롱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일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였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비웃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패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패로 보는 무리들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이단들이 그렇고, 통일교의 문선명은 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을 구속하는 일에 실패하였다고 하며, 그래서 자기가 구원을 완성시켰다고 헛소리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또한 그리스도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실패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요, 위대한 승리의 상징인 것입니다.

1. 십자가는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인류 역사는 한 마디로 전쟁과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의 투쟁, 참과 거짓의 투쟁, 사랑과 미움의 투쟁이 교차한 역사가 인류사입니다. 즉 악과 거짓과 증오의 화신인 사탄과, 참과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의 투쟁사라는 말입니다. 이 투쟁에서 항상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사탄은 여지없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사탄이 승리한 듯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였으나,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골 2:15절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정세와 권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사탄의 권세를 쳐서 파하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대반역자인 사탄의 유혹에 빠져 범죄한 직후,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사단의 머리를 부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목적을 파괴하고자, 사단은 온갖 훼방과 불의로 그리스도를 대적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마귀의 권세에서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는, 사탄의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와 권세의 승리인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악에 대한 의의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승리가 있기 전에, 인류사는 항상 왜곡되어 불의가 의에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 왔습니다. 그래서 합 1:4에도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고 탄식했습니다. 양심을 지키는 자는 손해를 보고, 무조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자는 이득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의의 편에 서는 자는, 패배를 당하고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양심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의가 승리해 주기를 바라고, 선이 이길 것이라고 응원하였으나,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불의가 승리하고, 거짓이 이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불의를 이기고 승리하심으로, 그 의를 의지하는 자는 모두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힘은, 악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부활이 없다면, 악이 승리했을 것입니다.

역사가 J. A 프라 은 “역사는 하나의 교훈을, 분명히 오직 하나의 교훈을 명확하게 반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는 도덕적인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궁극적으로 선은 승리하며, 궁극적으로 악은 멸망한다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어느 곳에 깨끗하고 정결하게,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자랑삼고 사는 청교도 같은 마을이 있는데, 한 처녀가 어쩌자고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마을에는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온갖 궂은일은 그 수도사가 다 맡아서 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마을에서 한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잘못하면 맞아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 해요. 그래서 결국 추방을 당하게 되었는데, 추방 직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어요.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역을 당하고 감옥에 처넣어졌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은 감옥에서 죽었어요. 그런데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예요. 남장 여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숙연해졌습니다. 이 수도사는 왜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라는 말을 안했을까요?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충족되고,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완전한 의의 승리인 것입니다.

3. 십자가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한 자들은, 증오와 독기를 품은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었다면, 인간의 미움과 증오가 하나님의 사랑을 정복한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미움이 하는 일을 모조리 타파하는 사랑의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싸움을 걸어와도 상대해주는 이가 없으면, 싸움이 되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옛글에 “악한 자가 착한 사람을 꾸짖거든, 착한 사람은 도무지 상대하지 말라. 

상대하지 않는 이는 마음이 깨끗하고, 꾸짖는 자는 입이 뜨겁고 끓느니라. 정히 하늘에 대고 침 뱉는 것 같아서, 도로 자기 몸에 떨어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소극적인 자세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배우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고,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4. 십자가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롬 6:9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또 다른 표현은, 역사는 죽음의 기록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성인도 죽었고, 철인도 죽었으며, 영웅도 죽었고, 대왕도 죽었습니다. 또한 이 죽음을 극복해 보고자 애쓴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이기거나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 어떤 권력이나 금력으로, 죽음을 극복한 인생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원치 않는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와, 아름답던 인생을 끝장나게 만들고 맙니다. 

롬 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모든 인간에게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죽음의 권세는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뜨리듯이 하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십자가에서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중생한 자입니다. 요 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전쟁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교회가 곡식을 거두고, 감사 예배를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감사의 예물 가운데는, 한 묶음의 곡식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감사의 예배는 드릴 수 없었습니다. 토요일 밤 야만적인 공습이 있었고, 그 공습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봄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서 있던 자리, 폭탄이 떨어졌던 자리에, 푸른 새싹이 움텄습니다. 여름이 오고 싹은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깨어진 기왓장 사이로, 잘 익은 작은 곡식밭이 하나 생겼습니다. 

엄청난 폭탄의 파괴력도, 그 종자의 생명력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은 죽음보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철장으로 질그릇 깨트리듯 부수어 버리시고,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사망이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15:26절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망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기독교의 중심 되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속이 믿어지면 예수 믿는 사람이고, 십자가의 구속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교회 출석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8년 파리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실화입니다. 한밤중에 불이 났습니다. 4층 아파트에 아버지와 아홉 살 미만의 4남매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래층에서 불길이 올라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유럽의 서민 아파트들은 빌딩들이 총총히 붙어있어, 이웃 건물과의 사이는 불과 1.7m로 어른의 키 정도가 됩니다. 아버지는 자기 집 창문으로부터 맞은 편 건물 창문 사이에 매달려 다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격려하면서, 세 살 난 막내까지 건너가게 하였으나, 아버지 자신은 불길에 그슬리고 지쳐서 결국 추락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실로 위대한 아버지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접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희생의 다리가 되어 주신 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가교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과, 산상보훈 같은 것은 대찬성하면서, 십자가의 구속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글 속에서 성구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많은 정치가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을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의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교회당에는, 예외 없이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기독교의 심벌마크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종교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탄생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만 생각하면, 2천 년 전에 사형을 받아 죽은 예수가, 결코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의 피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며,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서 하늘나라로 올라가겠습니까? 인간의 지혜로만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한 소리로밖에 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믿은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 능력이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 믿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내고, 생명을 살려내고, 세상과 마귀를 이기게 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 나가게 합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이러 저러한 일로 북한을 자주 내왕하고, 북한에 있는 고관들과 자주 만나서 얘기도 해보았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평양에 과학 기술대학을 세우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재단 이사장의 임명장을 받고, 큰 행사를 치루고 저녁에 파티를 하는데, “목사님, 목사님은 왜 우리를 돕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한 것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북한을 10여 년 동안 돕는데, 그 돕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곽 목사님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평양 시내에다가 굉장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얘기는 안하겠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뭘 요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한 말씀 해주셔야지요.”라고 졸라댔습니다. 그래서 곽 목사님은 “딱 한마디만 할게요. 예수 믿는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이것만 약속해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작년에도 400명 죽였다며, 인정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인들 죽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공산당원들이 말했습니다. “안 죽일 수가 없어요.” “왜요?” “반동이거든요.” “어째서 반동입니까?” “공산당보다 기독교인은 훨씬 셉니다.” 무엇이 세냐고 물었더니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죽기를 기독교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을 뻔했다가 산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그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은, 죽음까지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서울대 총장과 이명박 정부 때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운찬 교수가 미국의 뉴저지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강연을 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가운데 재미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자주 전철을 타고 다녔는데, 그러다 보면 아줌마들의 수다를 귀 너머로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수다를 들으며 관찰을 해 보니, 한국의 주부들은 ‘평등’을 가장 큰 가치로 두고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평등을 최고 가치로 두고 산다? 한국의 주부들이 수준이 대단히 높지 않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한국 주부들은 ‘평’자와 ‘등’자를 좋아하는데, ‘평’자는 아파트 평수의 평자고, ‘등’자는 아이들 학교 등수의 등자라는 겁니다. 한국 가정의 가치가 큰 집을 사는 것과, 아이들 공부시키는 것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이 추구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적으로 자랑하자고 들면, 누구보다 더 자랑할 것이 많았던 분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 소지자요, 당대 최고학부인 가말리엘 문하의 출신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알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찬송가 작시자도 ♪나의 평생 자랑은 주의 십자가로다.♪고 노래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과연 무엇입니까? 

312년 8월 28일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 근교 밀비오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력상 우위였던 정적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승리하여,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는데, 그 승리의 배경에는 신비한 설화가 숨어 있습니다. 전투를 하기 전날 밤 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보여 주며 “너는 이것으로 이겨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십자가 깃발을 들고 나가서 승리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대제는 주후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더 나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됩니다. 그 후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을 때, 그것은 정복자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탄을 이기시고, 죄악을 이기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승리를 확신하면, 바로 그 능력을 갖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 4:4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탐심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사망까지 이기는 영원한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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