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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 받는 구원 (행 1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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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받는 구원 (행 15:1-21)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성공적으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간증을 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찬양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기뻐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기쁨을 나눈 사람도 있었지만 이 일에 대하여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반대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본문 1-2절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본문을 보면, 일단의 무리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까지 내려와서 “구원 받는 것도 좋고, 성령 받는 것도 좋고, 예수 믿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거기에 더해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이 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소집됩니다.
6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견을 개진합니다.
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
야고보가 결론을 맺습니다.
19-20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세상에 있는 여러 종교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행위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 종교입니다.

① 행위 종교란 인간의 선행과 자비심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종교로서 인간의 공로에 무게를 두는 종교를 말합니다.
불교 유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가 이 범주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이 무슬림은 가끔 폭탄을 짊어지고 ‘나 죽고 너 죽는’ 자살테러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이 자살테러를 하는 무슬림을 보면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살 테러는 이슬람의 순교자가 되는 길이고, 순교는 그들이 말하는 낙원에 이르는 최고의 행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살 테러를 구원을 얻는 최고의 행위로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위 종교의 전형이지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로부터 ‘선행을 많이 해서 모든 악업을 지워라’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들은 선행을 많이 해서 그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지우고도 남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적선할 것을 종용합니다.
이런 것들은 행위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입니다.

② 은혜 종교란, 구원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라는 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얘기이고,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구원은 인간의 선행과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선행 또는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성경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인간은 그 어떤 선행으로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저런 사람이 천국에 못 간다면 누가 간단 말이야.”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남한테 해코지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얘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위와 비교하여 얻은 상대적인 의일 뿐이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조명도에 따라 깨끗함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시지요?
지금 교회 안에 먼지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먼지? 없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이 정도의 조명도에서는 먼지가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깨끗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 햇살이 창틈으로 강하게 비취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 알갱이가 보이지요.

그렇습니다.
조명도에 따라 깨끗하다는 판단이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끼리 비교할 때는 잘 산 것 같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에 비추어보면 그도 역시 죄인일 뿐입니다.
어디에다 자기 공로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에 도달할 수 없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② 성경은 겉으로 드러난 악한 행위만 문제 삼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숨겨진 악한 생각도 문제 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보십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에 미움만 가져도 살인이라고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 22)
사람들은 간음이란 행위를 하여야 ‘간음’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음욕만 품어도 간음했다고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 28) 
자기의 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 은혜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천번 만번 되풀이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히 9: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 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다같이 찾아봅시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구약 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염소와 송아지의 죽음으로 대속했습니다.
왜 죽어야만 죄가 용서됩니까?
죄란 말 몇 마디로 해결되는 그렇게 단순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라 생명을 버려야만 용서되는 위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동물 속죄 의식은 불완전한 속죄이기에 매년 한번 씩 시행해야만 했습니다. 
이 동물 속죄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영원한 속죄의식의 예표입니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룹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습니다.

그런데 교우들 중에는 ‘구원을 위해 뭔가 더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자기 구원을 불안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현재는 80% 구원 받은 것 같아. 20%는 내가 더 노력해야 하겠지. 담배도 끊고, 술도 먹지 말고....... 그래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겠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성도들의 생활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생활의 변화가 구원을 완성시킨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적전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의 공로가 0.00001%라도 영향을 준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을 미완성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을 뭔가 더 보태야할 불완전한 구원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완벽한 삶을 살았느냐, 얼마나 실수를 하지 않았느냐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고,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를 물으십니다.
우리에게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고, 죄가 있고, 야곱처럼 사기꾼 기질이 있다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지난주일 오후 예배 때 우리 신정균 목사님이 좋은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을 주목하고, 사탄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주목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을 주목하시기에 아무리 잘못됐다할지라도 우리를 그의 자녀로 여기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영적상태를 주목하면서 “그렇게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참소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 때 여러분은 사탄의 참소를 물리쳐야 합니다.“사탄아 물러가라. 나의 구원은 내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100%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야.”

둘째, 본문에서 배우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토론 정신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을 하여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입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들이 이의 없이 그 결정에 따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토론 문화에 다소 서툰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 불필요한 갈등을 빚어내고, 국가 공동체는 국력을 낭비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교회는 아주 성숙합니다.
몇 가지 주의할 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옳다 그르다’ 보다는 ‘싫다 좋다’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토론에서 필요한 것은 이성적 사고와 판단인데, 감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회의에서 필요한 것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인데, ‘싫다 좋다’의 문제로 몰고 가 결정을 내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투표하는 행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옳다 그르다’, ‘바람직하다 바람직하지 않다’를 따져서 투표해야하는데, 투표장에 들어가면 달라져요.

‘그래도 내 고향 사람인데.......’
‘사람은 좀 못해도 내가 나온 학교 출신인데.......’
‘우리는 핫바지냐?’
‘여섯 번 떨어지고 일곱 번째라는데........ 이번 떨어지면 바깥에 나 앉아야 한다는데......’
뭐 이래가지고 이성적 판단이 완전히 마비되고 정서적으로만 나가요.

교회 회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견을 잘 듣고 그것이 ‘옳다 그르다’, ‘바람직하다 바람직하지 않다.’를 생각해서 자기 의사를 표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남선 교회 회원인데........’ ‘우리 속도원인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인데’라는 등의 호 불호에 따라 반응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주의해야할 부분입니다.

2) ‘봐라, 내말 안 듣더니........’라고 결정 사항을 승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결정이 내려지면 내 의견과 다르더라도 모든 구성원들이 승복해야합니다.
승복하지 않으려면 왜 토론합니까?
기껏 토론해 놓고 내 의견과 맞지 않는다고 승복하지 않고, ‘ 그 일이 잘 되나 보자.’라든가 ‘봐라, 내 말 안 듣더니.......’하면서 공격의 빌미를 찾는다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태도를 보십시오.

전쟁을 할 것이냐 하지 않을 것이냐를 토론할 때는 입 가진 사람은 다 한마디 했습니다.
언론 매체마다 연사들이 출연하여 ‘된다. 안 된다’ 침 튀기는 토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한사람도 중얼거리거나 궁시렁거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승복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국회의 파병동의에 의하여 병사를 이라크 전쟁터에 보내 놓고도 이의를 달았습니다.

여러분, 후진국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통령 선거 끝내 놓고 꼭 반대 데모하는 나라는 후진국입니다.
세계를 한번 둘러보세요.
선거 끝내 놓고 데모하는 나라는 하나같이 후진국이 아닙니까? 
선진국은 0.1%차로 질지라도 승복합니다.
결정 사항을 진심을 승복하지 않는 태도는 성숙한 태도가 아닙니다.

3) ‘내 편이냐 네 편이냐’라는 편 가르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하여 내 의견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 ‘내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 라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기고 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의견(opinion)을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고, 힘(power)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힘을 갖기 위하여 내 편이냐 네 편이냐 편 가르기를 하게 됩니다.
편 가르기를 하면 공동체가 분열되고 약화됩니다.

초대 교회가 사안을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싫다 좋다.’로 결정했다면 분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사도회의 결정 사항을 승복하지 않았다면, ‘오직 예수’파와 ‘예수와 율법’파로 분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사도회의 결정 사항을 의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힘으로 받아들였다면 ‘예루살렘 사도파와 바울파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분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내 죄를 내가 아는데 이런 나를 용서하셨다니.......’라는 감격으로 신앙생활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좋다 나쁘다.’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건전한 판단과 승복정신으로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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