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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다 (레 26: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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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의 가름대를 부수다 (레 26:3-13)


["너희가, 내가 세운 규례를 따르고, 내가 명한 계명을 그대로 받들어 지키면, 나는 철 따라 너희에게 비를 내리겠다. 땅은 소출을 내고, 들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너희는, 거두어들인 곡식이 너무 많아서 포도를 딸 무렵에 가서야 타작을 겨우 끝낼 것이며, 포도가 너무 많이 달려서 씨앗을 뿌릴 때가 되어야 포도 따는 일을 겨우 끝낼 것이다. 너희는 배불리 먹고, 너희 땅에서 안전하게 살 것이다. 내가 땅을 평화롭게 하겠다. 너희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것이며, 아무도 너희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땅에서 사나운 짐승들을 없애고, 칼이 너희의 땅에서 설치지 못하게 하겠다. 너희의 원수들은 너희에게 쫓기다가, 너희가 보는 앞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들 백 명이 너희 다섯 명에게 쫓기고, 그들 만 명이 너희 백 명에게 쫓길 것이다. 너희의 원수들이, 너희가 보는 앞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나는 너희를 보살펴, 자손을 낳게 하고, 자손이 많게 하겠다. 너희와 세운 언약을 나는 꼭 지킨다. 너희는, 지난 해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미처 다 먹지도 못한 채, 햇곡식을 저장하려고, 해묵은 곡식을 바깥으로 퍼내야만 할 것이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 나는 너희가 메고 있던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서, 너희가 얼굴을 들고 다니게 하였다."]

• 슬픈 역사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가끔 시편을 명상하다가 가슴 먹먹한 슬픔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구절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시120:6). 세상에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우리 경험은 이게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라는 말을 잘 압니다.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 평화롭지 못하면, 또 평화를 선택할 용기를 내지 못하면 평화는 늘 저만치 물러나는 신기루일 뿐입니다. 예레미야도 처연한 심정이 되어 자기 시대를 고발합니다.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은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입으로는 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렘9:8)

여러분도 아마 독이 묻은 화살에 맞아 정신이 혼미해진 때가 있었을 겁니다. 평화는 모두의 꿈이지만, 그 꿈은 꺼질듯 위태롭기만 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63주년이 되었습니다. 서로를 냉랭하게 응시하는 시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박봉우 시인의 시구처럼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서로 응시하는 저 쌀쌀한 풍경’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남과 북의 당국자들은 서로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한사코 신뢰의 과정에 들어서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분단 체제를 즐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북쪽에서는 3대 세습 체제를 완성했고, 남쪽에서는 분단을 빌미로 한 기득권층이 형성되었습니다.

몇 해 전 베를린 집회에 갔을 때 저는 일부러 라이프찌히를 방문했습니다. 동서독 분단 시절, 동독의 공업도시였던 그곳에 갔던 것은 바흐가 생애의 마지막 20여 년 동안 칸토르(cantor, 성가 음악 담당자)로 일했던 토마스 교회를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독일 통일의 물꼬를 텄다고 평가되는 성 나콜라이 교회에 들러 촛불 하나를 밝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평화를 갈망하는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성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후기 고딕 양식 그리고 바로크 양식의 탑으로 구성된 예배당 앞에서 제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모두에게 열린 교회’(Kirche offen für Alle)라는 입간판이었습니다. 그 구절이 마치 지치고 상한 영혼, 두려움에 떠는 모든 이들을 두 팔 벌려 환대하는 주님의 품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교회 담임자이던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ührer) 목사는 1982년 9월부터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슬로건 하에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평화 기도회를 개최했습니다. 동독 당국에 의해 박해를 받던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반체제인사 등 많은 이들이 그 기도회에 동참했습니다.

그 교회 안에 열 지어 서있는 기둥은 ‘종려나무’를 형상화해 놓은 것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통일 이후 교회 밖 광장에 그 기둥의 조형물을 세워놓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민중들의 삶의 자리임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평화가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교회가 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려 합니다.

• 성결법전의 결론

오늘 읽은 레위기 26장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법을 가르친 ‘성결법전’(레17-26장)의 결론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준수할 때 받을 복과, 그것을 파기할 때 직면하게 될 재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욕망의 지배에 굴복할 것인가?’ 복과 재난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주어집니다. 성결법전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는 명령과,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레19:18)라는 명령입니다. 이 둘은 사실은 하나입니다. 거룩한 삶은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배려와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란 물론 세속적인 것과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예배와 관련된 것이나,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거룩할 성聖’ 자를 붙이곤 합니다. 성전, 성물, 성체, 성사, 성인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거룩함이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상을 떠난 거룩함은 위선이 되기 쉽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나 몸짓은 신령해 보이지만, 드러난 삶은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거룩함은 속된 것과 구별되지만 속된 것 속에서만 드러납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기에 여러분께도 익숙하겠습니다만 레위기 19장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을 잘 드러내보여 줍니다.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말라는 말과 희생 제물에 대한 명령을 빼고는 딱히 종교적이라 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어버이를 공경하라,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이면 안 된다, 도둑질/사기/속임수/이웃을 억압하지 말아라, 품꾼의 삯을 떼먹지 말아야 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여 저주하지 말고,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지 말아야 한다, 재판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 남을 헐뜯지 말아야 한다, 이주 노동자를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노인들을 공경해라.’ 어찌 보면 너무나 상식적인 말들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 게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은 결국 공생의 길과 연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홀로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결법전에서 매우 중요한 규정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규정입니다.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계명은 일정한 기간이 지날 때마다 공동체에 발생한 불평등을 해소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산술적인 평등함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힘이나 부의 지나친 편중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장의 노예법은 히브리 노예를 7년마다 놓아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5장에 나오는 면제년 규정은 모든 빚이 탕감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속죄일날 수양의 뿔나팔(Jobel)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희년(jubilee year)에는 땅은 원주인에게 돌아가야 하고, 종으로 팔렸던 사람은 자유인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명령의 신학적 근거는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세상에 잠시 왔다가 가는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때가 되면 그 분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안식년과 희년을 지킨다는 것은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겸손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든 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열매를 거두어들일 때가 되어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지만, 그들은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서 설마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하였지만 그들은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땅이 자기들 차지가 될 줄 알고 아들을 포도원 밖에서 죽였습니다. 그 악한 농부들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마21:33-41).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운명을 예고하기 위해 들려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등장하는 악한 농부들의 모습이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약속된 평화의 나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와 계명을 그대로 지킬 때 받게 될 복은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철 따라 비를 내리시고, 땅은 소출을 내고, 들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핍의 고통을 더 이상 겪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해로운 짐승을 없애시고, 세상에서 칼이 설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해로운 짐승은 사람을 위협하는 맹수를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은유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사야는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 세계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상입니다(사11:7). 

우열을 가리고, 힘의 서열을 정하고, 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육식 동물의 세계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초식 동물의 세계입니다. 불가능한 꿈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면 그 꿈은 현실이 된다고 말합니다. 칼이 설치지 못하는 세상, 생각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공포에 짓눌린 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을 숭상하던 원수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세상, 우리는 이런 세상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됩니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11-12)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장막을 마련하고 함께 사신답니다.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분이 계시는군요. 마치 시부모가 자기 집에 들어와 살겠다고 하는 것처럼 들리시나요? 우리끼리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으신 거지요? 하나님은 심지어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닐겠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할라카halakh’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할수록 암담한가요?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처럼 든든한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야훼라는 말 속에는 몇 가지 중층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창조주, 보호자, 생명을 북돋는 자라는 뜻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자로, 감시자로 우리 가운데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얽어매는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서 우리가 얼굴을 들고 다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따를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됩니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온갖 속박들로부터 놓여나는 길은 하나님과 확고히 접속되는 것입니다. 장자莊子의 양생주 편는  ‘제지현해帝之縣解’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분은 그것을 하나님께 매인 해방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길 때 일체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를 분단체제 속에 가두어두려는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그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성결법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명령, 즉 진정한 이웃 사랑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휴전선은 남과 북 사이에만 드리워진 게 아닙니다. 어느 결에 우리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많아졌습니다. 그 경계선이 하나 하나 철폐될 때 분단의 망령은 물러갈 것입니다. 경계선을 철폐하는 일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그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추고, 특권이나 기득권을 자꾸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 사이를 버름하게 만들어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만든 후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나누고 지배하라’(divide and rule)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속죄 혹은 구속을 뜻하는 ‘어토운먼트atonement’를 파자破字해보면 ‘하나 되게 한다’(at+one+ment)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의 말 한 마디, 눈빛, 행동 하나하나는 분단에 기여할 수도 통일에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들을 하나님이 함께 살라 하신 존재로 받아들인다면, 스스로를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보냄을 받은 존재로 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이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대적이고, 가혹하고, 이기적이고,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좀 더 개방적이고, 관대하고, 겸손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런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역사의 큰 변화를 말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향해 회심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현존을 삶으로 증언하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미 우리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고, 돌보는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런 멋진 삶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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