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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리와 죄인의 친구 (마 1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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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와 죄인의 친구 (마 11:16-19)

신학교 다닐 때 ‘나와 너’라는 책을 읽었다. 은혜가 되어 여러 번 읽었다. 
마틴 부버라는 분이 쓴 책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둘로 설명한다. ‘나와 너’의 관계. ‘나와 그것’의 관계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관계이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비인격적인 관계이다. 사물을 이용하는 관계이다. 두 관계가 다 필요한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나와 너’의 관계가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부부관계 까지도 사랑의 관계인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내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급속히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거 같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를 추구한다. 그래서 내 이익 앞에서는 사랑도 변하고 우정도 쉽게 변질된다. 우리는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며 살고 있는가? 

1. 무관심한 사람 

점점 사람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많아지는 걸 느낀다. 내게 경제적으로나, 즐거움으로나 유익을 주는 사람 아니면 관심을 닫는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 하였다.” 이런 사람이 많다. 회사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다. 심지어 가족 중에도 있다. 관심이 없으니 책임감도 없어진다. 

광주지역 대학생 86%가 “부모가 스스로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응답은 7.8% 밖에 안 된다. 경기도는 괜찮을까?! 

언제부터 사람들이 이렇게 변했을까? 태초부터 그랬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대답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 나는 내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나는 내 아우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무한 개인주의이다. 무한 이기주의이다. 

옛날에는 무관심의 속도가 시속 40km 정도로 느꼈다면, 지금은 140km는 되는 것 같다. 
생활패턴이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제는 1인 세대로 빠르게 변해간다. 직업패턴도 사람끼리 일하지 않고 기계와 일하고 컴퓨터와 일한다. 대화패턴도 전에는 만나서 얘기하고, 편지로 하고 전화로 하다가 이제는 문자나 카톡으로 간단하게 한다. 전화하는 것도 실례란다. 
요새는 청소년도 청년도 스마트폰하고 논다. 스마트 폰을 통해서 소통한다. 

‘고스트 족’이라는 족속이 있다. 온라인에서만 인간관계를 하다 보니 현실에서는 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사람을 유령 대하듯이 하는 사람들 대한다고 한다. 특히 청소년층에서 이런 문제가 많이 생긴다고 한다. 
그럴수록 함께하고 싶은 욕구가 많다. 사람에게 있는 본능적인 욕구이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관심이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가족이? 친구가?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까? 얼마나 나를 알아줄까? 얼마나 이해해줄까? 

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다. 
사49:1 “여호와께서 태에서 나를 지으셨고 내 어머니 복중에서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마10:30 “너희에게는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하나님은 나를 다 아신다. 
나보다 나를 더 깊이 아신다. 긍휼히 여겨주신다. 변함없이 사랑해 주신다. 
절대로 나를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신다. 감사 감사하다!!! 

나는 누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까? 
나에게 맡겨주신 오이코스(가족 친구 동료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주자. 
하나님의 마음으로 관심을 가져주자. 그 마음으로 만나고 대화하고 기도하자. 

2. 비판하는 사람 

관심은 많지만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부담스러운 사람이다. 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세례 요한을 비판한다. 세례 요한이 먹지도 마시시도 않는다. 귀신이 들렸다고 비판한다. 
예수님도 비판한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고 비판한다. 특히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고 비판한다. 세례 요한은 먹지 않는다고 비판, 예수님은 먹는다고 비판한다. 

내가 옳다. 나만 옳다는 거다. 바리새인들이다. 바리새인의 기도이다.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께 책망받은 기도이다. 

인터넷에 악성 댓글 문제가 여전히 심각하다. 왜 그런 일에 열심일까?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의 ‘악플러의 심리적 특징’이다. 

1. 겁 많은 패배자형: 만성적인 욕구좌절로 열등감과 분노에 휩싸여 있는 겁 많은 패배자 유형이다. 살아오면서 긍정적인 성취를 경험한 적이 별로 없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여러 번의 패배가 쌓이면서 늘 자신감이 없고 자신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분노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불공정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피해의식 때문에 사소한 자극에도 흥분하지만 현실에서는 저항하지 못한다. 이들은 악플을 달면서 비로소 내면에 쌓인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2. 독선가형: 자신의 생각과 가치만 옳다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독선가 유형이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가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헐뜯는다. 대표적으로 지역주의자와 맹목적인 정당추종자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든 글이나 기사를 특정정당과 지역주의와 연관시켜 악플을 다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다. 

어디가나 이런 사람들이 있다. 많다. 교회에도 물론 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다. 실패를 많이 겪은 사람들이다. 거부를 많이 당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다. 인정받는 것이 더 필요한 사람이다.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 사람이 더 필요하다. 누가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가? 

3.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 

런던 타임즈에서 어떤 사람을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느냐? 물어서 뽑은 내용이란다. 
1)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에 그때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 
2)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3)나의 기쁨을 곱해 주기도 하고 나의 슬픔을 쪼개 주는 사람. 

이런 친구가 몇 명이나 있을까? 한 명이라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수님의 별명이 나온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시다. 세리와 죄인은 아무도 친구가 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절친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세리 출신이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이다. 세리 마태가 자기가 제자로 부름받은 사건을 9장에 기록했다. 

예수님이 세관에서 세금을 거두는 마태에게 다가오셨다. 세리 마태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라.’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모든 사람으로부터 멸시를 받는데, 예수님이 제자로 불러주시다니! 너무 감격해서 자기 동료들을 다 불러서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한다.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사를 하신다. 당시에는 세리의 집에 들어가면 안 되었다. 세리와 만나도 안 되고 세리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심지어 거지도 세리가 주는 돈을 안 받았다. 모르고 받았는데, 누가 ‘너에게 돈을 준 사람이 세리이다.’ 그러면 도로 갖다 던져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집에 가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이걸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붙인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가? 

마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시려고.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시려고... 

예수님은 어떻게 친구가 되어주시나? 
먼저 찾아 가신다. 찾아가서 만나주신다. 같이 식사하신다. 같이 대화하신다- 경청. 
같이 주무신다. 대신 희생하신다. 세상 끝 날까지 떠나지 않으신다. 절대로 싫다고 버리지 않으신다.

 사41:8-9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친구 삼아 주신다. 요15:15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사랑은 알 사람이 없도다.> 찬송시인 처럼 친구삼아 주신 주님과 우정을 쌓아가는 신앙생활 해 보자. 

우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의 오이코스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 주라. 오이코스의 절친이 되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찾아 가자. 같이 식사하라. 입이 즐거우면 마음도 열린다. 
같이 대화하라. 말하는 것보다 들어주라. 경청해 주라.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좋아한다. 
예수님처럼 대신 희생하라. 우리도 떠나지 말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다리자. 

조심할 일이 있다. 술 먹는 사람 친구 되려고 같이 술을 먹어도 될까? 
도박하는 사람 친구 되려고 같이 도박해도 될까? 바람피는 사람 친구 되려고 같이 바람피면 될까? 
히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시되, 끌려가지 않고 인도자가 되어 주셨다. 


맺는 말 

함석헌님의 <이런 친구를 가졌는가?> 시이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양보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친구이시다. 이보다 백배나 천배나 더한 영원한 친구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 주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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