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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결단 (마 1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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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결단
마태복음 16:24-28

노량진에 가면 사육신을 모신 묘가 있습니다. 찾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역사 유적입니다.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모의를 하다가 발각이 되어서, 온 몸을 불로 지짐을 당하고, 육신이 여러 조각으로 찢겨서 죽은 사람들입니다. 사육신은 비록 자기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육신이 조선 왕조 역사 속에서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비록 자기의 뜻을 이루는데는 실패한 사람들이지만, 지조 있는 남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가치있는 결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것을 결단하고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분이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음을 통하여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게 된 것도 사실은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위대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24-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은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말씀하신 요지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표현을 하면 결단입니다. 누구든지 나사렛 예수를 따라가려거든 결단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가기 위하여 목숨을 잃을 각오로 결단을 해야만 하고, 십자가형을 받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결단을 하고, 나사렛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하고 예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가리켜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Rubicon강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 갈리아 치살피네와 이탈리아의 경계가 되고 있던 작은 강입니다. BC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가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간 행위는, 당시 로마법으로는, 장군이 자신에게 맡겨진 지방 밖에서 군대를 이끄는 것을 금한 법을 어긴 것입니다. 따라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행위는, 결국 로마 원로원에 대한 선전포고였고, 그러 인하여 벌어진 3년에 걸친 내란 끝에,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됩니다. 여기서 유래한 ‘루비콘 강을 건넜다.’라는 표현은, ‘어떤 행동과정에서 첫 발걸음을 떼었다.’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벌였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외국에 정벌을 나간 장군들은, 자신의 군대라고 해도 군인들을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너서 들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법은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원로원이 만들어 놓은 법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정치가 타락해서 귀족들은 매일 연회를 즐기고, 자기 농토를 늘리고, 서민들의 삶은 더 고달파지기만 했습니다. 그것을 개혁하기 위해서 갈리아 정복군 사령관인 줄리어스 시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썩은 세상을 뒤집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민을 하지만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가에서 고민하다가 마침내 루비콘 강을 건너기로 결단을 합니다. 강을 건넌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고 뒤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로마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자신은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목숨을 걸고 싸워서 이기는 길 밖에 없습니다. 줄리어스 시이저는 그 싸움에 이겼고, 황제가 되어서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아서 로마제국의 번영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큰 일을 위해서는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이 내용은 성경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도 실제는 모두가 다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하는 고민과 아픔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우기가 되어서 강물이 요단강 강뚝에까지 차 있는 요단강을 앞에 두고, 요단강을 건너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던 지도자 여호수아도, 아마도 잠시나마 루비콘 강을 앞에 두고, 어쩔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시저와 똑같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비록 그간 사십년간이란 오랜 기간 동안 광야 길을 걸어왔지만, 현재 거주하고 있는 모압 땅 헤스본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경험하지 못했을 만큼 사람이 살기에 안락하고 좋은 곳입니다. 샘물도 풍부하고, 초지도 좋고, 땅은 농사 짓기에 너무도 기름진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르우벤 지파와 갓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여하겠지만, 자기들의 기업을 요단 동편으로 지정해달라고 모세에게 청을 하여 허락을 받았겠습니까? 그 정도로 요단 동편도 기업이 없이 광야길을 사십년간 떠돌았던 이스라엘에게는 너무나 살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이 들자 야훼께서는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호수아이지만 야훼의 가나안으로의 진군 명령에는 이스라엘이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1) 가나안으로 진군하라는 시기가 우기라서 요단강 물이 강뚝에까지 이른 때라는 점입니다. (2) 가나안의 형편이 사십년전과 비하여 변화된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땅에 거하는 아낙자손은 예전 그대로 있고, 그들은 다 거인 자손이고, 돌로 축성한 성을 가지고 잇고, 철병거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3) 이스라엘 장정보다도 가나안 땅에 거하는 장정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면 바로 이런 이들과 생명을 건 싸움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은 주인이 없는 땅이 아니라 어였한 주인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그런 곳에 들어가서 주인을 몰아내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이니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런 점을 생각한 지도자 모세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지금 이스라엘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자리를 잡기 위하여 이미 전쟁을 치루어서, 적들도 없고, 이스라엘 민족이 장악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하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가자라고 명령을 하면, 왜 구태여 전쟁을 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만 하느냐?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가운데에는 이미 일찍이 그런 생각을 굳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 여호수아는 이런 어지러운 형편에서도 야훼의 말씀을 따라서 올바른 결단을 합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동쪽 땅에서이미 보장받은 편안한 삶을 더 누리기를 포기하고, 야훼의 명령대로 요단강을 건너가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이미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준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도 야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 수 있고, 야훼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많은 위험 요소가 자리를 잡고 있는 요단강을 건너는 것보다는 더 열심히 야훼를 중심으로한 믿음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야훼의 말씀대로 믿음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으면, 전능하신 야훼의 능력을 보지 못하고, 야훼의 영광을 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만일 지도자 여호수아가 야훼의 명령대로, 계절이 우기라서 강물이 강뚝에까지 가득찬,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물벽을 만드셔서, 강물의 흐름을 끊으시고, 요단강 바닥을 드러내신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단순한 이스라엘의 함성으로만, 견고한 여리고 성벽을 무너지게 하셨는지를 볼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모든 표적은 단순한 인간의 방법이나 지혜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런 표적은 오직 야훼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한 사람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고민하는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수 1:5-9절에서 말씀하기를,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야훼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시고,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야훼의 말씀을 믿고, 들은대로 결단하고 믿음대로 행동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보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야훼께서는 지도자 여호수아가 오직 야훼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요단강을 건널 때에, 야훼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한다는 증거를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수 3:7절에서는 말씀하기를, ‘바로 오늘부터, 내가 너를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보는 앞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고,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하겠다.’라고 하셨고, 수 3:10절에서는 말하기를, ‘이제 이루어질 이 일을 보고,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셔서,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히위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신 것을 보여주려면, 지도자 여호수아와 같은 위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위대한 결단이란, 오직 야훼에게만 방법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해결자가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서를 보세요, 병들어 죽어가는 딸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당시에 세관이 있는 항구 도시인 가버나움이란 도시의 회당장이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나사렛 출신의 청년 목수인 예수 앞에 나가서, 그것도 사람이 무수히 지나다니는 뱃터에서 예수에게 절을 하고, 딸아이의 치유르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딸아이가 방금 죽었다는 소식 앞에서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열매로 그는 죽었던 딸아이가 살아나는 것을 봅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장 야이로의 결단을 본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루살렘 성의 주변 성읍인 베다니에 살던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란 이가 있습니다. 갑자기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어 무덤 안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나 된 때에 베다니에 도착을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 앞에 왓을 때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살 것이라고 합니다. 마르다가 예 주님 마지막 부활의 날에 살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물었고, 마르다는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겨 놓아라.’라고 하셨고, 마르다가 말하기를,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셨고, 그래서 무덤의 돌문을 열자, 예수께서 무덤에 있던 나사로를 불러내어 소생시켰다고 요한복음 11장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마르다의 결단이 죽은 오라비를 소생하게 했습니다.
           
건강전도사로 부르는 고 황수관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연세대 병원을 짓는데 교직원들이 헌금을 하게 되었는데, 마음속에 감동이 와서 5천만 원을 작정했습니다. 그 때 황수관 박사는 아직 자기 집도 없을 때였습니다. 작정헌금을 써서 낼 때까지도 괜찮았는데 쓰고 나와서 집에 가서 아내를 볼 것을 생각하니까 겁이 덜컥 나더라는 것입니다. 집도 제대로 없는데 돈이 어디서 나서 갚으려고, 5천만 원씩이나 헌금을 써냈느냐고, 달려들 것을 생각하니, 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는 말도 못하고 혼자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나에게 5천만 원 쓰도록 감동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돈을 낼 수 있는 방법도 주세요.’ 그리고 얼마 후에 1억 짜리 CF 광고가 들어와서 해결했다고 합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야훼의 명령을 의지하여, 많은 위험한 요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단강을 건너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사실 요단강을 건넌다고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닙니다. 요단강 도하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감당하는데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나면, 가나안 땅에 본래부터 살고 있던 많은 민족들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전쟁은 싸워봐야 승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변수가 가장 많은 것이 사람이 하는 전쟁이입니다. 끝나기 전까지는 이긴다는 신념은 있을지 몰라도 이긴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은 다릅니다. 여러분은 이미 승리할 것이란 확답을 받고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야훼의 백성들에게는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는 위대한 결단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야훼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결단을 하고 출발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 그 다음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성령의 뜻을 따라서 결단하고 새 삶을 출발한 이들이 감당해야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준비를 다 하고 계신다는 점을 이 시간 분명하게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 25절에서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바른 결단을 하면 잃어버리는 것 같아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다시 회복하고 찾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방정식은 먼저 잃버린 후에 다시 찾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정식은 먼저 찾은 후에 영원히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는데 반하여, 예수의 방법은 먼저 주고 나중에 받고, 먼저 빼앗기고 나중에 더 많이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예수 때문에, 교회 때문에, 복음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을 결단할 때 주저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성도 여러분에게 먼저 몇 가지 결단할 것을 부탁을 드립니다. 결단을 하되 먼저 예배에 대한 결단을 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예배를 통하여 덧입을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주님께서 응답해주시는 역사 또한 예배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요한계시록도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주님에게 예배를 드리다가 본 계시와 환상과 환청입니다.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보다 넘치는 은총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도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님과 여러분의 구체적인 영적 교제 또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정성을 다하여 참석하고자 결단을 하고, 실천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신령한 예배생활에 성공해야만 믿음생활에서도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현대인은 시간이 갈수록 바빠지기 때문에, 교인들이 주일 낮 예배만 예배인 줄 생각하고 낮 예배만 나오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주일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와 심야기도회에도 정성을 다하여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훼께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요단강을 건너라고 합니다. 사실 어찌보면 지도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아도 한 평생 살다가 죽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도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만일 요단강을 건너고자 하는 결단을 내리지 않았으면, 야훼의 능력과 영광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 자손인 유대인이 지금과 같은 복을 누리고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손들과 이웃을 위하여 항상 아름다운 믿음의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곧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결단하지 않았으면 세리장으로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썩어질 물질은 모자라지 않았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날마다 나름대로 결단을 거듭하며 삽니다. 하지만 결단을 하되 무엇보다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고, 날마다 성경을 읽고,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를 모시고, 예수만 바라보고, 사모하며 살기 위하여 순간마다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나사렛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을 내리고, 십자가를 질 결단을 내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나사렛 예수를 닮아가고 따라가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분명하고 값진 결단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항상 뜨겁게 끓어오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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