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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욘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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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욘 1:4-17)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교양과목 중에 '인류학'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강의 중에 언젠가 교수님께서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유사점들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특히 침팬지와 같이 유인원에 속한 동물들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든지 시행착오를 통해 올바른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학습 능력 등 상당한 지적 활동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분노 등의 감정들을 느끼며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한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그 안에서 서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협동도 하지만 반면에 서열 다툼도 치열하게 벌이고 조직에 도움이 안 되는 약자는 냉정하게 도태시키기도 하는 것들을 볼 때에 반드시 인간만 '사회적 동물'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내용으로 강의를 하시던 교수님께서 제일 마지막에 "하지만 동물에게도 종교가 있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 진화론을 믿는 학자들은 사람 아닌 다른 동물도 종교적 감정이나 행위를 가질 가망성까지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심이란 것은 '동물이 점점 더 지적으로 진화한' 결과 나타나게 된 산물이 결코 아니라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침팬지를 아무리 교육시킨다 해도 종교심을 가지게 만들 수는 없지만, 사람은 원래 창조 받을 때부터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종교적 동물'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있는 그와 같은 본질적 종교심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종교심이란 것이 반드시 참 신을 찾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참 신'을 모시고 있는 '바른 종교'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온갖 종교들 중에서 왜 기독교 신앙만 유일하게 참된 종교가 되는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세상 종교는 사람이 필요할 때만 신을 찾지만, 기독교 신앙은 '자존하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믿습니다. 

본문 4절부터 10절에 "4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5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7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8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9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에 나온 대로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 임박한 멸망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습니다. 
이 다시스란 오늘날의 스페인 서남부의 지브랄타 해협에 위치한 큰 항구도시로서 당시 사람들이 지중해를 '다시스의 바다'라고 불렀을 정도로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는데, 하나님께서 요나더러 가라고 명하신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에 있었습니다. 
  
요나가 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하여 갔던 "욥바"란 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50km 지점에 위치한 항구도시였는데 항만이 좁고 수심도 충분히 깊지 않아서 다시스로 왕래하는 대형선박이 정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욥바에서 다시스까지 지중해를 완전히 가로지르는 그 먼 거리를 왕래하는 배 자체도 매우 드물었는데, 요나가 욥바에 가자마자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으니" 아마 요나는 자기 뜻대로 일이 술술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바다 위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대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타고 로마로 가던 배가 겪었던 '유라굴로'라는 대풍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 지중해에서 악명 높은 폭풍이었습니다. 
그런 폭풍 앞에서 사공들이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5절에 나오는 대로 "두려워하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뱃사람이 폭풍을 만나는 것은 가장 두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체 동력이 있는 배들인 까닭에 웬만한 파도는 헤쳐 나올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도 무전으로 구조 요청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처럼 나무로 만든 배에 돛과 노가 동력의 전부였던 시절에는 배가 전복되기도 훨씬 쉬웠을 뿐 아니라, 일단 파선되고 나면 그 망망대해에서 구조를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으니 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 사공들이 보여 준 공통적인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근동 사회는 각 민족마다 자기 고유의 신이 있는, 그것도 한 민족 내에서도 여러 신들이 있는 소위 '범신 종교'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배가 파선될 위험에 빠지게 되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본능적으로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외치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선장은 물론 자기 자신의 신의 이름도 불렀겠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배 밑층에 내려가서 잠들어 있던 요나까지 깨웠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선장이 말하는 "하나님"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신'을 뜻합니다. 
즉 '당신이 믿는 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당신도 그 신에게 살려 달라고 빌어 보시오. 그러면 당신의 신이든지 우리가 믿고 있는 신들 중에 하나이든지 간에 어쨌든 한 신에게라도 제대로 그 기도가 걸리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소?'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장과 사공들이 믿었던 신들과 요나가 믿었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신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요나가 '제비 뽑힘'을 당한 후에 자신을 소개한 말에서 나타납니다. 
9절에서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라고 했는데, 이 '히브리 사람'이란 '이주해 온 자' 혹은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왔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미로 타 민족들 앞에서 스스로를 '히브리 사람'이라고 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요나는 자신을 두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즉 요나가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은 그 배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믿던 '자기의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신이었습니다. 
그 신은 지엽적인 신이 아니라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신은 각 민족에게 속한 신이 아니라 '하늘에' 좌정하고 계시는 최고 절대주권자였습니다. 
그 신은 '나의 신, 너의 하나님' 하는 식으로 공존하는 여러 신들 중에 하나가 결코 아니라 '유일무이한 참 하나님'이셨던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장과 사공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신을 찾는 본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오직 사람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즉 하나님 고유의 속성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도록 지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하게 됨으로써 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입은 영적 본성이 오염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비록 타락하기는 했지만 원래 그처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던 본성은 남아 있는 까닭에 불신자들도 여전히 신을 찾고 있는 것이며 단지 참 신이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 신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상 종교를 믿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바로 '자기가 필요할 때에 각기 자기의 신을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슨 간절한 소원이 생길 때, 혹은 아주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에만 신을 찾는 것입니다. 
돌이나 나무 아래에 정화수를 떠 놓고 손 모아 비는 것이나 복채를 가지고 무슨 신통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순전히 기복주의 종교에 빠져 있는 자들까지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뿐 아니라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엄청나게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아이고 하나님' 하면서 신을 찾는 것이나, 신을 부인하는 철학자조차 '신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줄 알고 논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사람에게는 신을 찾고 의지하려는 본능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참 신은 그처럼 사람이 필요로 해서 생긴 대상이거나 사람이 찾아 주어서 있게 된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그처럼 '사람 쪽의 동기 때문에 만들어진 신'이 결코 아니라, '여호와' 즉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반응이나 조건에 아무 상관없이 그냥 영원 전부터 '자존'하고 계시는 신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의 신들과 기독교의 하나님은 실로 극명하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사람을 위하여 신이 존재하는 종교'란 오로지 '인본주의 종교'일 뿐입니다. 
그런 종교는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은 신' 곧 우상을 섬기는 헛된 종교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신이란 사람이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절대자가 결코 아니라 그저 '사람의 심부름꾼이나 종'밖에 안 되는 비참한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반면에 참된 종교는 당연히 '신본주의 종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종교 – 오직 기독교만 하나님을 이렇게 믿고 받들고 있는 진짜 종교인 것입니다. 
그저 무언가 필요하고 상황이 급할 때만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당연히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하는 헛된 세상 종교와는 달리, 우주와 만유의 절대주권자이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살아 계심을 고백하고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세상 종교는 권선징악의 윤리만 가르치지만, 기독교 신앙은 '죄 사함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구세주'를 선포합니다. 

11절 이하 17절에 기록하기를 "11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12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17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는 종교적 본성은 '사람이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다들 공감하게 만듭니다. 
이것 역시 본문에서 발견되는데 우선 아까 7절을 다시 보면, 대풍을 만나 파선 직전의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사공들이 취한 두 번째 행동이 바로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 모두는 '재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원인은 '누군가가 신에게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또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신의 진노'를 유발시킨 범죄자를 찾기 위한 제비뽑기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제비가 요나에게 당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자 사공들은 요나에게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너의 신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우리까지 같이 받게 되었는지 이실직고하라.'는 문책이었습니다. 
나중에 요나가 모든 것을 자백한 후에 10절에서도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라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즉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상식으로 통하는 윤리였던 것입니다. 

그런 인과응보의 윤리는 그 '보응'을 반드시 '본인'이 받아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즉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만 그 죄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의 잘못을 자백한 이후에도 "바다가 점점 흉용"하게 되자 사공들이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라고 물은 것도 바로 그런 사고방식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2절에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고 하면서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죄를 순순히 시인했을 뿐 아니라, 그 죄값 역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본인이 받아야 마땅함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즉 그는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에게 내리시는 심판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공의로운 처사라고까지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아니, 사실상 하나님에 의하여 완전히 코너로 몰린 요나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요나의 그런 자복과 자청에도 불구하고 사공들은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최후의 노력을 다해 보았습니다. 
생사람을 물에 던져 제물로 삼는다는 것은 그 우상숭배자들에게도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바다가 그들을 항하여 점점 더 흉용"해지자 그들은 결국 신이 내리시려는 벌을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길도, 막을 길도 없음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외치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직후에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고 했습니다. 
그 대풍이 자연적인 폭풍이었다면 차츰 잠잠해졌을 것이지만, '곧' 그치게 된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일임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처럼 요나를 물에 던진 후 바다가 잔잔해지자 사공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고 했지만, 이것이 그들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개종했다는 의미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그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종교심을 따라서 그저 '신의 인과응보'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즉 '벌은 당연히 죄를 지은 사람이 받는 것'이며 요나가 그 죄값을 치렀으니 이제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끝났다는 안도감에서 제사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에 오직 하나님께서만 행하시는 놀라운 일이 따라왔습니다. 
그처럼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하나님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산 채로 삼켜 "삼일삼야" 동안 그 물고기 뱃속에서 생존하게 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미'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기 전부터 그를 구원해 주기로 예정하시고 준비를 완벽히 해 놓으셨음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요나는 자신이 그저 죽음의 벌을 받아야 마땅할 뿐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구원이란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공들 역시 신에게 죄를 지은 요나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할 뿐이라고만 여겼지 하나님께서 그를 큰 물고기를 통해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무조건적인 구원, 기적적인 구원'을 요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참 하나님만 하시는 위대한 일, '창조 사역'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인과응보와 그러니 '악을 행하지 말고 선하게 살도록 힘써야 한다.'라는 권선징악의 사상은 모든 세상 종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윤리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결코 아니며 기독교 신앙에서도 똑같이 통하는 교리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종교의 의미가 끝나 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그저 '사람을 착하게 살도록 만드는' 데에만 그 목적이 있다고 하면, 굳이 종교를 가질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저 '자신의 양심을 따라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기만 하면 그런 종교인들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권선징악의 종교에서는 '죄 사함'의 은혜와 기쁨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않고 양심적으로 산다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스스로 내세우는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오직 자신의 선행이라는 공로에 대한 당연한 결과이니 아무 감사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게 된 사람도 '촛불을 몇 개 켜고 주기도문을 몇 번 암송해야 하는' 등등 본인이 그 죄값을 직접 치름으로써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니 거기에 '구세주의 은혜'가 작동할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세상 종교들과는 달리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자신'을 솔직히 자복한 후에 곧 따라오게 되는 놀라운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무조건적인 구원'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본인이 벌을 받아야 한다.'라는 인과응보의 원칙 대신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를 십자가를 통해 대속해 주심으로써 그 받아 마땅했던 영벌 대신 영생을 얻게 된다.'는 실로 엄청나게 기쁜 소식입니다. 

권선징악의 교훈만 있는 종교는 사실상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신을 빙자한 윤리도덕'에 불과합니다. 
그런 세상 종교를 믿는 자들은 '구원은 내가 착하게 산 공로로 당연히 받게 되는 것'이라는 교만이나 '나는 죄가 많으니 벌을 받을 도리밖에 없다.'는 절망, 이 둘 중에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직 참된 기독교 신앙만이 다른 그 어떤 종교에서도 찾을 수 없는 '복음 중의 복음'을 누리게 해 줍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자복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구원'을 거저 받게 되고 그 은혜를 인하여 진정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늘 충만히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요나의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 동시에 당신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대한 예표라고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즉 본문에 기록된 사실은 사람이 지어낸 무슨 우화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신 실화였으며, 그 보내실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구속사의 진리를 뚜렷이 밝혀 준 사건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풍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생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 사공들과 요나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만이 참된 '자존자'이신 동시에 또한 당신만이 진정한 '구원주'이심을 만천하에 선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종교라고 다 같은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살아 계신 절대주권자'를 유일신으로 믿는 종교만 진짜 종교입니다. 
신이라고 해서 결국은 다 같은 신이 되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죄 사함과 구원'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신만 진정 참 신이신 것입니다. 
그처럼 신이 주체가 되지 않고 인간의 소원풀이를 위한 심부름꾼이 되어 있는 종교는 신앙이 아니라 그저 '미신'일 뿐이며, 영생의 구원은 없이 그냥 권선징악의 교훈만 가르치는 신이란 사실상 신이 아니라 그저 '교주'일 뿐인 것입니다.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입니다. 
천주교와 자유주의 기독교와 WCC 등을 통해 종교다원주의와 범신론과 '현대판 금송아지 우상종교'가 점점 더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저 종교개혁자 선배들을 통해 회복되었던 정통신앙을 더더욱 굳게 다져야만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여러 종교들 중에 한 종교'가 아니라 오직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참 신'을 믿고 '참된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온갖 우상숭배자들이 '각기 자기의 신'을 부르는 중에도 오로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며 '풍랑 속에 던져진 자도 물고기를 예비하여 건져 주시는 구원주'만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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