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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벼랑 끝에서 베풀어주시는 축복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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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서 베풀어주시는 축복 (왕상 17:8-16)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나름대로 ‘나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구나!’ 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 즉 고통의 상황,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가정의 문제가 되었든, 경제적인 문제가 되었든, 건강의 문제, 생업의 문제, 아니면 영적인 문제가 되었든, 어떤 문제가 되었든 간에 벼랑 끝에 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벼랑 끝에 섰던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좌우는 절벽이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뒤쫓아오는 애굽의 군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거나, 홍해바다에 뛰어 들어서 물에 빠져서 죽든지... 아주 긴박한 상황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도 벼랑 끝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다니엘에게 어느 날 갑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사자굴 속에 던져 넣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야 말로 천 길 낭떠러지 끝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벼랑 끝에 섰던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풀무물 속에 집어넣겠다고 하니..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우상에게 절할 수도 없고.. 이럴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요셉도 여러 번 벼랑 끝에 몰렸던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에 의해서 죽을 뻔 했고, 부모도 모르게 애굽 땅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을 때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는데 요셉이 그랬다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자녀들이 다 죽었습니다. 집과 재산을 다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이런 욥을 저주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욥은 그야 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딸인 이민아 목사님도 얼마나 힘든 벼랑 끝에 서 있었는가를 그분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죽도록 사랑했던 남자와 헤어졌습니다. 다섯 살된 어린 아이는 특수 자폐아 판정을 받았습니다. 실명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했던 맏아들이 스물 다섯 살 나이에 돌연사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큰 고통의 벼랑 끝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견디기 힘든 벼랑 끝에 설 때가 살아오면서 한 두 번 쯤은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벼랑 끝에 섰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거기에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보면 벼랑 끝에 서 있는 한 가여운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외아들을 둔 과부입니다. 너무 너무 가난했습니다. 거기에다 극심한 흉년 때문에 그녀와 아들은 마지막 먹을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이제 죽으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내용을 보면 정말로 불쌍한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하는 참으로 기가 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는 참으로 불쌍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그 과부의 집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8-9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여기에 보면 극심한 가뭄 속에서 엘리야가 굶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주신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과부와 아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그 과부의 집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죽기로 결심했던 두 모녀는 다행히 죽지 않았습니다. 죽기는 커녕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배불리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벼랑 끝에서 겨우 겨우 벗어난 게 아닙니다.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우리가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껴질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절대로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느낄 때... 내가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낄 때에, 가장 먼저 찾아오는 불청객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홍수처럼 밀려옵니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이제 나는 끝이구나.’ 이런 불안과 두려움이 나에게 불청객처럼 찾아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을 쫓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된 엘리야 선지자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과부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합니다. 극심한 가뭄인데 물도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그 가난한 과부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다. 또 물을 가지러 가는 과부에게 배도 고프니까 떡 한 조각도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르밧 여인은 아합 왕 시대의 사람입니다. 당시에 아합 왕은 북쪽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로 인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백성들에게 섬기도록 했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3년 6개월 동안 극심한 가뭄을 겪게 됩니다. 세상이 온통 가뭄 때문에 먹고 살기가 힘든 상황에서 손님을 대접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이지 큰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은 가난한데다 기근으로 인해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서 엘리야를 공궤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평이나 원망도 하지 않고 엘리야 선지자를 영접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환경이 좋아지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야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법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여인은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한다. 라고 솔직하게 말을 합니다. 그 때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 는 것이었습니다. 13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랬고, 홍해를 앞두고 있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도 그랬고, 요단강을 눈앞에 두고서 두려워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일 4:18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하는 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국에는 두려움을 좇아낸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셔서 나를 보내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지금의 상황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벼랑 끝에 서 있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닙니다. 벼랑 끝에 서 있다고 그것이 나를 망하게 하고 내 인생을 끝장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벼랑 끝은 우리에게 회복을 가져다주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우리에게 축복을 누리게 해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책을 썼는데 그 책 제목이 무엇입니까? ‘벼랑 끝에서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책입니다. 강준민 목사님이 쓰신 책입니다. 또 어떤 분은 ‘벼랑 끝에 서면 길이 보인다’라는 제목의 책도 썼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벼랑 끝에 나를 세우라’ 하는 제목의 책도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나 공포, 자포자기, 절망, 불평, 원망, 저주 이런 것들이 다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모습들입니다. 벼랑 끝에서의 본능은 우리로 하여금 나약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또 벼랑 끝에서 서 있을 때 우리는 정신적으로 찾아오는 반응도 의존하면 안됩니다. 그것도 역시 우리로 하여금 약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는 ‘견딜 수 있어’, ‘이길 수 있어’, ‘버틸 수 있어’ 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황이 되면 그런 결심들이 쉽게 꺽여지거나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는 항상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믿음의 반응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수많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위기의 상황을 무엇으로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십시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통과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는 믿음으로 마음이 항상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사르밧 과부가 벼랑 끝에 서서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서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한다는 과부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에게 먼저 물을 마시게 하고 떡도 만들어서 먼저 자기가 먹을 수 있게 해주라고 부탁을 합니다. 1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때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말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떡을 만들어서 먼저 엘 리가 먹도록 갖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르밧 과부는 자신도 굶어 죽게 된 상황인데도 떡을 만들어서 자신과 아들이... 아니 자기는 아니더라도 아들만이라도 먹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엘리야 선지자에게 그것을 먼저 갖다 주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이처럼 벼랑 끝에서 믿음으로 반응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이성과 지식과 형편을 다 초월하는 반응입니다.

당시에 엘리야 선지자는 현상금이 걸려 있는 사람입니다. 아합 왕이 엘리야를 잡기 위해서 이스라엘 전 지역에 현상수배까지 내걸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를 자기 집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주의 종 엘리야를 기꺼이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믿음이야말로 일사각오의 믿음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순교자적인 신앙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형편이 어려워지고, 입장이 곤란해지면 남을 생각하기가 정말로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믿음을 쫓아서 살았던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여인에게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가루와 기름으로 “먼저 나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를 영접하는 것도 위험을 무릅쓴 믿음의 행동이었지만, 마지막 남은 식량으로 자식에게 먹여도 모자랄 판에 그것을 엘리야 선지자가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원망스러울 수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가여운 여인의 사정을 몰라주어도 이렇게 몰라줄 수가 있습니까? 자신은 못 먹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굶는다는 것은 부모로써 견디기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말은 다 들어줄 수 있지만 자식을 굶게 하는 것은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식을 제물로 바친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벼랑 끝에서도 항상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르밧 과부에게도 엘리야가 그런 비슷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그녀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벼랑 끝에 섰을 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처럼 믿음으로 반응해야 됨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와 주십니다. 특별히 말씀으로 다가와 주실 때가 아주 많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할 때 엘리야 선지자는 도망을 가다가 로뎀 나무 밑에서 차라리 죽기를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돕는 손길로 인해 다시 힘을 얻어서 호렙산까지 갑니다. 

호렙산 앞에 서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로 다가오지 않으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셔서 엘리야를 격려해주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다가와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벼랑 끝에 섰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여인이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듣고 과부는 가서 엘리야 선지자의 말에 그대로 순종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는 기도하는 것마저도 힘들고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 성경을 보십시오.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나에게 뭐라고 약속하고 계시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가뭄이 들어서 살기가 어려워지면 사람들의 인심도 각박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 때에 엘리야가 여인에게 자기 아들과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고 한 떡을 자신에게로 가져오라고 했으니 그것을 누가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을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엘리야 선지자 말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왜 하나님의 응답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먼저 먹고 쓰고 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르밧 과부도 지금 조금 남아 있는 양식이 “먼저” 하나님께 드려지면 오히려 넘치도록 풍성해진다고 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오히려 큰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행하셨던 놀라운 기적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함께 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녀가 엘리야에게 행한 대접은 하나님께 드리는 그녀의 순수한 믿음이었습니다. 마음이었습니다. 헌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관습적으로도 하지 않고, 마지못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순수한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손에 들고 축사하심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게 된 것도 한 어린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들과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고 남겨둔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실 엘리야가 사르밧에 살고 있는 과부를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사르밧 과부 말고도 과부들이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 선지자가 보냄을 받았을까요? 비록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고, 오로지 죽을 일만 남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특별한 믿음은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없는 것에 불평하지 않고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인색하지 않고 아낌없이 드리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최악의 상태였지만 최선의 상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결국 벼랑 끝에 서 있던 사르밧 과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도 죽지 않았습니다. 가뭄이 끝날 때까지 가루와 기름이 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뒤로 얼마나 배부르게 잘 먹었겠습니까?

이처럼 벼랑 끝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손길이 강하게 역사하는 기회입니다. 벼랑 끝은 전화위복의 전환점이 되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벼랑 끝에 서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반드시 웃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주의 종을 선대했습니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녀는 일사각오의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중에서도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주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내 생명이라도 내어 드리겠습니다.’라는 믿음을 저와 여러분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이런 순종이 함께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항상 함께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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