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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기도는 역사를 바꾼다! (느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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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도는 역사를 바꾼다! (느 1:1-5)


유명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톤 처칠경이 남긴 기록 가운데 "전쟁 회고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가운데서 그는 회고하기를 1940년 9월 15일을 가리켜 자기 조국인 영국이 당시의 나치 독일과의 공중전에서 특별한 승리를 거둔 '절정의 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독일 공군기와 폭격기가 영국 땅에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그런 상황에서 영국측으로서는 뾰족한 방어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갑자기 10분 동안 모든 독일 비행기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훗날 영국의 공군 전투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공군대장 다우딩경은 전쟁이 끝나자 그 날의 그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설명을 할 방법이 없다.  이 사건이야말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노만 그럽이 쓴 "탁월한 중보기도의 사람 리즈 하월즈"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당시 웨일즈 성경대학의 학장이었던 리즈 하월즈의 영향으로 처칠 수상이 전쟁 가운데 두 번에 걸쳐 전국적인 기도의 날을 선포하면서 전 국민들에게 기도를 호소하게 됩니다.  리즈 하월즈 자신은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자 학교 강당에서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매일 아침 1시간, 점심 후에 1시간, 그리고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기도에 힘썼고 공습이 절정에 달할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 공군이 이유 없는 후퇴를 하던 9월 15일 바로 직전에 학교 강단에서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잦은 공습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지옥에서 구원받은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공습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왜 믿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만일 이와 같은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저 나치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체제가 결코 오래 가지 못해 종말을 고할 것이며, 이 땅의 고귀한 생명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시는 일을 반드시 행하실 것입니다."

그의 말은 예언이 되었고, 그의 그 말은 몇일 내에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드려졌던 리즈 하월즈와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가리켜 후에 "역사를 바꾸는 기도"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사를 바꾼 또 하나의 기도의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때는 주전 445년경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세계 신흥제국이었던 페르시아 정부에서 유대인 출신으로 아다사스다왕 1세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있었던 사람이 느헤미야였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술을 맡은 관원이었다고 해서 술만 따라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왕의 상에 음식이나 술을 올리는 사람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술이나 음식에 독을 넣으면 왕의 생명은 끝이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그 자리를 맡깁니다.  그러면 그는 왕에게 술을 갖다 바칠 뿐만 아니라 왕의 옆자리에서 왕과 함께 중요한 국사를 의논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당시 느헤미야의 조국인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이었던 고레스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되어서 이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조국의 건설에 헌신합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건립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건립되었지만 고국 땅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적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폭동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 폭동의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약탈과 무질서에 노출된 채 깊은 절망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조국에 대한 이러한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고 조국에 돌아가 조국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쌓아주기로 결단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벽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벽은 그들의 삶의 울타리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삶이 안전을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번영을 보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문제는 그 성벽이 무너져서 백성들의 삶이 위협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고국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그 일에 헌신했고, 그 일을 완수하게 됩니다.  그 일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느헤미야의 일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골방에서 드렸던 기도에 있었습니다.  고국으로부터 이 비참한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민족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느헤미야로 하여금 위대한 성취를 가능하게 만드는 출발이었습니다.  그는 골방에서의 기도로 역사를 바꾸는 일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오늘이라는 역사의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는 마음의 고단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이대로는 살 수가 없다, 이제는 무엇인가 좀 변화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갖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주 앞에 나와 기도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골방에서 나와 내 자녀와 가정과 우리의 사회와 민족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열방을 향해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드리는 믿음의 기도는 역사를 바꿉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시작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열려진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참된 의미에서의 진정한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의 이미지가 생각이 나십니까?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이 세상에서의 마음을 닫아버리고 거룩한 목소리로 깊은 산 속 높은 곳에서 주여 삼창을 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는 않습니까?
저는 그것이 정말로 참된 기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역사를 보는 눈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소리를 듣고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역사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안고 하나님 앞에서 이 잘못된 역사를 바꾸어달라고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이 닫힌 사람은 결코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기도를 해도 결코 자신과 가정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이 아닌 이웃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역사를 바꾸었던 느헤미야의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여기에 보면 2절의 마지막에 물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장관을 하고 있던 느헤미야가 어느 날 고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자기 조국의 형편이 어떤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외국 땅에 와서 출세를 해서 잘 살고 있었지만 조국에 대한 관심을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내용이 바로 3절입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는 지금 이와 같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조국의 비참한 현실이 눈에 그려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었던 느헤미야의 반응이 이어지는 4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조국에 관한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앉아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이 아니라 여러 날 동안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퍼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슬픔 속에서 결단을 합니다.  그것은 그가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역사를 바꾸는 믿음의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역사 의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식을 바로 갖는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엎드려 그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느헤미야, 그에게는 역사를 바로 보는 눈과 귀가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끌어안고 기도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열린 눈으로 여러분의 현실을 한 번 보십시오.  내 삶의 마당에서 이웃들에게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느껴보십시오.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먼저 여러분의 가정을 천천히 열린 눈으로 한 번 돌아보십시오.  안타까운 일들이 없습니까?  그래서 내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또 내 가까이에서 돌아보아야 할 내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찢어진 가슴으로 아파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보십시오.  저들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느껴보십시오.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아니 우리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우리 민족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우리 민족의 현실을 아픈 가슴으로 바라보십시오.  저 북한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불바다를 만들어버리겠다고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외국의 바이어들이 불안해서 거래처를 바꾸겠다고 합니다.  9천억이 넘게 투자를 해서 만들어진 개성공단이 무일푼으로 끝나게 생겼습니다.  123개의 기업들과 그와 관련된 5000여개의 하청업체들이 당장 부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떠나서 내가 살고 있는 울산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울산은 우리 나라 국민소득의 평균에 3배나 더 잘 먹고 잘 사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나 독일과 세계의 자동차 산업이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울산의 현대 자동차는 고비용 저생산으로 심대한 위기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두 주 전에 현대 자동차는 국내 생산을 줄이고 해외 생산량을 늘리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국내 자동차 소비도 줄었지만 세계 수출도 꽉 막혀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전국적으로 가장 타락한 소비의 대표적인 도시가 울산입니다.

이런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을 보신다면,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려진 의식, 열려진 귀로 소리를 들어보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을 똑 바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아픈 가슴으로 느껴보십시오.  이것이 역사의식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주님께서 먼저 역사를 보는 열린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열린 역사 의식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열린 역사의식 갖는 것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아픈 가슴으로 느끼고 있는 그 역사의 문제를 가지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엎드려 이 민족을 위해,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참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만이 역사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시작할 수가 있을까요?
두 번째로,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역사를 바꾸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그가 창조하신 만물과 역사를 다스리시는 섭리자이십니다.  영어로 역사라는 단어를 표기할 때 우리는 'histo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his와 story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가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을 가리켜서 흔히 섭리사관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분의 섭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역사를 섭리하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기도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을 부르면서 제일 먼저 붙인 수식어가 '크신' 하나님(Great God)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 민족이 직면한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러나 그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그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나와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기도를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저와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보이지 않거나 작게 보이고, 기도를 할 때 눈을 감았는데 계속해서 내 문제만 떠오릅니다.  그 문제가 너무 너무 크게 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결국 그 문제 아래에 짓눌려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망할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가다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간 이유의 핵심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선이 주님에게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보고 있었을 때 물위를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그의 시선이 주님에게로부터 떨어지고 파도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주변에서 널뛰고 있는 파도와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에는 파도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순간 그는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믿음 없는 사람처럼 두려움 속에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지금의 그 환경은 나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환경은 나로 하여금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큰 문제라고 할지라도 하나님만 더 크게 보이신다면 그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문제는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크게 보인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정말 문제는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는 못하는 그 사람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이 내 눈에 보인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좌절하거나 주저앉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고단한 역사의 현실이 바꾸어지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지금의 역사적 현실이 아무리 참담해도 그는 아직도 자기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의 '약'은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느낌은 이 구약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섭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나의 샘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할 때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게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때 동일한 일로 오늘의 우리들에게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을 통해 세계 모든 민족들의 열방을 향해 동일한 심정으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들을 위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이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기록된 쉐마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레마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우리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 2장 39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를 위한 약속인가를 선포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먼 데 있는 이방 사람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시는 모든 나라, 모든 족속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약속들을 읽을 때마다 나를 위한 약속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이 무척 고단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고단한 환경에만 시선을 두지 마시고 성경을 좀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읽으십시오.  그 성경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십시오.  거기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약속들이 나에게 부딪혀 올 때마다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꽉 붙드십시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그 약속을 주장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새 언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는 변함없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약속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약속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붙들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나에게 약속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약속은 나와 내 가정을 위한 약속이며, 이 약속대로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다면 그 약속을 믿는 믿음대로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나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역사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종종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사람에게도 관심이 있습니까?  나 같이 연약하고 왜소한 사람에게도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4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들에 대한 언급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버려진 고아입니다.  두 번째는 외롭게 홀로 살아가는 과부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외국에서 와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살고 있는 나그네들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 이상으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거의 편애에 가깝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긍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약자들이나 약점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시는 덕입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자기 민족의 안타까운 처지를 보면서 바로 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5절의 하반부를 보면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가 이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너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정말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가까스로 긍휼히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은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풍성하다는 말은 끝이 없고 바닥이 없는 넉넉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빈민선교를 하시는 목사님이 어느 날 빈민선교를 하다가 바다 구경을 한 번도 못한 가난한 빈민촌 청소년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바다를 구경시켜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자동차에 태워서 바닷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이 아이들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아이가 그 넓은 바다를 보더니 갑자기 울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왜 우느냐고 했더니 이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넉넉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이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하나님은 그런 끝이 없는 넉넉함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야."

그래서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백성들의 실수와 범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우리들에게 아직도 생명을 주시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여기에서 무궁하시다는 말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그 많은 실수와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살아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라는 역사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고 고통스러운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분 앞에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분의 끝이 없는 넉넉한 자비와 풍성하신 긍휼을 구해 보십시오.  아직은,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여러분의 희망,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여러분의 인생의 노래,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붙들고 그분 앞에 다시 부르짖어 기도해 보십시오.

5월 1일부터 시작되는 "기도울산 33일"을 통해서 골방에서 열방을 경영하며 역사를 바꾸는 기도의 주인공이 되어 보십시오.  매일 한 시간씩 시간을 정해 놓고 나누어드린 책을 중심으로 기도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 기간 동안 울산의 56개 교회 25000여 교인들이 매일 같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긍휼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를 할 때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세상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축복이 이 울산 도성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가정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무릎을 꿇고 믿음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새 역사는 오늘 시작될 것입니다.  고통의 역사는 바꾸어질 것입니다.  희망의 역사가 새롭게 지어질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역사를 바꾸는 기도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골방에서 열방을 경영하는 기도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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