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히 12:1-3)

첨부 1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히 12:1-3)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친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의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그는 유대인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아내는 수용소에서 죽거나 가스실에 보내졌습니다. 프랭클 자신도 언제 가스실로 보내질 지, 혹은 죽은 사람들의 시체와 재를 치우는 사람 중에 끼일 지 전혀 모른 채 고문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인간이 가진 최후의 자유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치는 환경을 통제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육체를 다루었으나 이미 자유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프랭클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역경이 닥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낙심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며 수용된 유대인 가운데 외과의사 닥터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루는 닥터가 밝은 얼굴로 프랭클을 찾아와 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에 연합군이 진격해와 석방되는 꿈이었다”라며 기쁨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도 추수감사절이 되었음에도 연합군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닥터는 프랭클을 찾아와 크게 낙심을 하며 “다 틀렸어. 다 틀린 거야! 헛된 꿈이었어”라고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심하게 열이 오르더니 수 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자유를 향한 애타는 희망은 그로 하여금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활기찬 삶을 살게 해 주었지만 기대가 절망과 낙심으로 바뀌자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주어진 환경보다 낙심이야말로 인간을 병들거나 죽게 만드는 요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낙심의 의미는 “바라던 일이 이루 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진다” 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솨하흐’ 라는 단어입니다. “풀이 죽게 하다. 구부리다. 누이다”라는 뜻으로 병에 걸려 풀이 죽고 누워 꼼짝하지 못하는 것처럼 낙심에 감염되면 희망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해지며 피곤해집니다. 따라서 모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는다는 사실로 엄청난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친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엄청난 불이익을 당해야 했습니다. 붙잡혀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배교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낙심하는 성도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때 히브리기자는 낙심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격려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본문 2절을 통해 강조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로 말미암아 낙심치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믿음의 근거와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삶이 피곤하십니까? 여러 가지로 낙심하십니까? 그렇다면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예수를 좇아가라

하비콕스(Harvey Cox)의 저서 ‘예수 하버드에 오다(When Jesus Came to Havard)’ 의 내용입니다. 하버드는 본래 목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대학이었으나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 색채를 벗어버렸습니다. 풍부한 재정과 함께 세계적 명문대학의 자리를 굳혔지만 하버드 대학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커리큘럼이나 카탈로그에서 예수 이름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의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신학을 외면하였습니다. 더 이상 종교의 문제와 신학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으며 도리어 예수와 신학을 외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당시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이 온갖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0년대부터 하버드 대학에 윤리적 사유(Moral Reasoning)라는 과목을 신설하게 되었고 하비콕스가 강의하였습니다. 그때 강의 하였던 내용이 바로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예수 없는 하버드가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니 다시 예수를 좇아가야 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여기의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는 것은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라도 예수를 좇아가면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증인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달려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증인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끝까지 좇아가다가 거룩한 성에 들어간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킵니다. 경주를 마치고 상을 받기 위해 기다리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예수를 좇아가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며 예수를 좇아갔습니다. 핍박이 있고 죽음의 자리에 가야 했으나 참고 인내하며 예수를 좇았습니다. 낙심할 상황에도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고 예수를 끝까지 좇아간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으니 결코 낙심하지 말고 예수를 마지막까지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를 바라보라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에게 젊은 신학생이 찾아와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도 낙심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스펄전 목사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답변을 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심해 본 적이 없네. 나는 그 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네. 나는 하루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쳐 버린 일이 없다네. 그때 이래로 나는 낙심을 모르고 살아왔지.” 스펄전 목사가 유명한 설교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의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은 예수께 눈을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나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 아니라 시선을 집중하여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눈앞에 직면한 고통스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을 바라보신 분이 바로 예수이십니다.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기자는 지금 그 예수를 바라보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는 모습을 마치 경주자가 목표에 시선을 고정하고 전력을 다하여 달리는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지쳐 피곤하면 누구나 쉽게 불평하며 낙심합니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다 실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더 이상 낙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일생동안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며 살았기에 어떤 일에도 낙심치 아니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를 생각하라

로마의 황제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가 지독하게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호테미아라는 예수 믿는 소녀가 끌려와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집행관은 순진한 소녀를 보고 마음이 아파 친절히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화형대에 선 소녀가 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기뻐하세요. 주님께 가면 당신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게요. 아저씨는 구원 받을 거예요. 기뻐하세요. 제게 잘해 주신 것 고마워요.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소녀는 화형을 당했습니다. 집행관은 그 날 이후 3일간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소녀 호테미아가 자신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는 꿈이었습니다. 그 후 집행관은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화형을 당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천국에 계신 예수만을 생각하였던 소녀의 담대한 모습으로 인한 결과이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비교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고통을 당하거나 피곤하여 지쳐 쓰러질 때 예수와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과 낙심을 경험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를 생각하므로 낙심을 극복하고 마음에 위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수치와 고통을 인내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장차 세상을 심판하여 인류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으시고 원한을 풀어주실 예수를 생각할 때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삶의 여정이 피곤할 때마다 주저하지 말고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와 함께 할 영광의 날을 생각하며 낙심치 아니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함께 영국 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ld)가 낙심하고 좌절할 때마다 헌팅턴(Huntington) 백작 부인이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한번은 휫필드가 절망적인 어조로 “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라고 말할 때 헌팅턴여사는 “잃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런 것에 감사해야 합니까?” 그러자 헌팅턴 여사는 “예수께서 잃은 자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잃은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잃은 것을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낙심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도 모델이 되지만 십자가를 참음으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표입니다. 힘들고 넘어질 때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재물이나 인간의 능력을 더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세상 쾌락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위기를 만날 수밖에 없고, 시험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영적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낙심할 일이 생겼습니까? 그러나 낙심할 일이 있어도 결코 사람을 좇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세상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육신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