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로 승리하게 하는 복음! (고전 15:1-4)

첨부 1


우리로 승리하게 하는 복음! (고전 15:1-4)


우리가 오른 손가락을 세워서 햇볕이 비치는 손가락을 보면 결국 반대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과거는 그림자입니다.  그것은 다 지나간 허상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림자가 아니라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붙들고 속상해 하지 말고 잊어버리십시오.  사도 바울도 과거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목적지까지 달려서 상을 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여생을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투자하면서 사십시오.  미래에다 헌신하십시오.  미래에다 생명을 거십시오.  그리고 미래를 그리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앞으로 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라!  번영하라!  땅에 충만 하라!  다스리라!"  한 마디로 말해서 과거에 머물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로 현재 내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 때문에 과거의 은혜는 물론이거니와 미래의 약속까지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의 고난 앞에서 지난날 내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립니다.  지금의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래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마치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들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온전히 헌신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세대였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쏟아지며 애굽의 사람들이 덜덜 떨고 있을 때, 문설주에 피를 바름으로써 죽음이 넘어가는 것을 보았던 세대입니다.  

애굽의 장자들과 짐승들까지 죽어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앞에는 바다요, 뒤에는 애굽이 쳐들어 올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다시 합쳐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았던 기적의 세대입니다.  무너지고 죽어 가는 애굽을 바라보면서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라고 춤을 추며 찬양했던 세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나안의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자신은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한탄했습니다.  현재의 고난 때문에 불평이나 할 줄 알았던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현재의 어려움 앞에 약속의 새 땅이 주는 소중함을 외면했습니다.  저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과거에 묶여서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사명을 붙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로운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가려고 하지만 저들 백성들은 여전히 애굽 속에 갇혀 있습니다.  모세는 미래를 향해 박차고 나아가고 있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과거의 노예 상태에 묶여 있습니다.  저들은 홍해를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성에는 여전히 애굽의 속성을 벗어버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애굽 타령을 했습니다.  결국에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역사적인 결단의 순간에 모두가 메뚜기 타령을 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오늘 우리도 애굽 타령과 메뚜기 타령이나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낫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을까요?  아니 솔직히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작은 고난 앞에서 애굽 타령이나 하고 메뚜기 타령을 하면서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약속의 새 땅을 차지할 자격이 없는 나약한 노예 세대로 남아서는 안됩니다.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은 자손 만대에 할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과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람들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은 위대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의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성경에 보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시고자 마음만 먹으면 그것은 바로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나는 약할지라도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하십니다.  그러므로 일을 행하시고 그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이 나를 통해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십시오.

간혹 보면 우리들 가운데는 "신혼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분명히 지금의 부부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보다 지금이 좋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믿을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과거에는 이렇게 헌신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지금 현재 제대로 헌신하는 사람을 저는 지금까지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 헌신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변명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좋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옛날의 신앙이 더 좋았다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현재의 신앙이 더 좋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과거에 정지된 그 어떤 허상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워지는 실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 감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이 세상 사람들 속에 날마다 새롭게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더욱 큰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을 살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욱 큰 은혜를 덧입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의미도 보다 분명해 질 것입니다.

같은 물체도 고체에 불을 가하면 녹아 없어지지만 액체는 딱딱한 고체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겸손히 도우심을 구하는 자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나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내 자녀를 바로 세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내 가정과 이 땅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결코 인간을 바꾸거나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교육을 잘 시켜서 인간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현대의 고등교육 시대에 인간이 더 사악해지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죄악으로 가득한 인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만이 능력입니다.  복음만이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고린도는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과 서를 연결하는 지역에 있으면서 상업과 무역이 매우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치품들이 이 도시를 관통했습니다.  세상의 허영심에 빠져있는 모든 상인들이 이 도시로 모여들었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올림픽에 버금가는 스포츠가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당시 세상의 거대한 부가 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고, 인구는 날로 급증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죄와 부도덕이 넘쳐나고 있었던 방탕하기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술, 도박, 포르노, 동성애, 마약이 넘쳐나고 있었고, 이 도시의 높은 언덕에 있었던 아프로디테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에서는 공개적인 성매매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를 향해 세상 사람들은 지상의 낙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번창하는 이 도시의 불편한 진실은 사람들의 마음에 죄책감이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육체적인 죽음 앞에서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의 생활을 주목하고 있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고린도인처럼 행동한다"는 뜻을 가진 코린티아조마이(Corinthiazomai)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말은 "부도덕을 행한다"는 뜻의 관용구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의 소녀'는 당시 창녀의 동의어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도시에 어느 날 키가 작은 한 사람이 조용히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타락한 방탕한 도시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에서 에베소 다음으로 긴 시간인 1년 반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이 타락한 도시, 그래서 죄악 가운데 빠져 살면서도 그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죄책감과 그로 인한 육체적인 죽음 앞에서의 불안감에 빠져있던 그들에게 전해졌던 복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가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살았던 1세기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나 사람들은 죄를 나쁜 것으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죄가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그 죄에 빠지는 원인은 딱 한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죄가 가져다주는 쾌락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2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공동번역에서는 이 사실에 있어서 "죄의 일시적인 쾌락을 즐긴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죄가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죄악의 낙' 앞에 있는 한 단어를 우리는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잠시,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잠시의 죄가 주는 쾌락이 지나가면 그것은 곧 이어서 길고 어두운 죄책감이라는 동굴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런 죄악과 죄책감, 그리고 그 죄책감이 가져다주는 형벌의 불안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에서 건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책감에서 자유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악의 형벌에서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에 전한 복음의 본질이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철저하게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간 실존에서 가장 중요한 근본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결코 구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처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처방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3절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이 바로 복음입니다.

당시 고린도와 고린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두 가지 중요한 철학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피큐리안이라고 불리는 철학으로 이것은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철학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쾌락주의에 빠졌습니다.  이들에 반대해서 소수의 철학 사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금욕주의로 일컬어지는 스토익 철학이었습니다.  에피큐리안 철학자들은 죄를 생각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라고 가르쳤습니다.  인생의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현재를 즐기라고 가르쳤습니다.  살았을 때 죽음은 오지 않았고, 죽었을 때 죽음은 이미 우리를 떠났다고 가르치면서 즐기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죄 이후에 동반하는 죄책감으로 인해 죄악의 쾌락은 쓰디쓴 고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쾌락이 인생의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스토익 철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되도록 죄를 짓지 말고 근신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근신이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범해 버린 죄가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 즉 결코 사함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속죄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내용을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도 동일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앞의 화면에 있는 에베소서 1장 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에 전해진 복음입니다.  이것이 한국에도 전해진 복음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들어야 할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듣기를 원했고 오늘 우리들이 듣기를 원하는 복음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복음은 죽음 저 건너편에서의 부활의 소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죄의 쾌락에 빠져 있었던 고린도인들도 명확하게 부정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쾌락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한 어린이가 번쩍 손을 들고 대답을 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물론 이 선생님이 기대했던 대답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의 말도 정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들에게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쟈니 칼슨은 우리 인생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세금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인터넷 언론 뉴스인 뉴스타파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인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서 세금을 회피하려고 했던 사회 유명 인사들을 폭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갖은 교묘한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금은 피해갈 수 있어도, 죽음만은 결코 피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내세라고 한다면 그 내세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당시의 그리스 사람들은 영혼불멸 사상을 믿었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피할 수 없기에 육체의 죽음 이후의 영혼만의 불멸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을 향해 말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부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 이후에 몸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이 부활의 몸으로 영생한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확실한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증언합니다.  그가 사셨기에 우리도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부활이 정말로 확실하다면, 그래서 죽어도 다시 산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진정한 처방은 부활일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몸이 부활한다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 저 건너편에 부활의 몸으로 영생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부활의 확실한 보증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오셨고, 그가 부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소위 부활장이라고 일컫는 오늘 우리가 봉독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인 베드로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에게와 오백명의 사람들이 동시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백명의 증인으로도 부족하십니까?  그렇다면 바울은 계속해서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지 않습니까?  사랑하신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미국 뉴욕 전도대회를 열었을 때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어떤 증거라도 있습니까?"

그 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30분을 그와 더불어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오셨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 찾아오셨습니까?  정말 찾아오셨습니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부활의 놀라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1년에 한 번 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봄이 되면 죽어 있던 모든 것들이 살아납니다.  겨울에 잠자던 생명들이 두꺼운 대지를 뚫고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저 돋아나는 잎사귀마다, 저 파란 잎사귀마다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새겨놓으셨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복음은 죽음 건너편에 약속된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에 전해진 이 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복음은 죽음 건너편의 부활을 약속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로, 복음은 오늘 여기에서의 삶의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결코 미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가 미래에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오늘 우리의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미래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오늘도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의 삶은 오늘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내세의 부활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에서 우리가 좀더 초연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기 저 영원한 곳에서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누리는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이 땅의 삶 속에 움츠려 들 필요가 없습니다.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믿는다면 다가오는 삶의 파도와 위협과 모든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좀더 당당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소망하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은 결코 일확천금을 꿈꾸는 로또 천국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 천국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천국은 이 땅에서의 삶의 연장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았던 그 삶의 모습으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곳에는 죄나 질병이나 고통이나 슬픔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았던 그 삶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학교에 함께 근무하던 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한 분은 빌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선생님이었고, 또 한 분은 글로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선생님이었습니다.  한 학교에 근무를 하면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한 선생님은 음악 선생님으로 작곡을 했습니다.  또 한 선생님은 영어를 전공했습니다.  시를 좋아했고, 글을 잘 썼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한 다음에 그들은 그들의 은사를 살려서 찬양 사역에 헌신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가스펠 가수가 되어서 순회 전도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도 찬양 축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환상의 커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 부부에게 중대한 시련이 찾아옵니다.  남편 빌이 어느 날 고약한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무력감에 빠져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손을 놓은 채 몇 달을 집안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때 아내 글로리아가 마침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가정의 경제도 어렵고, 그들을 둘러싼 이상한 소문들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삶이 회색빛처럼 어두워가던 그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새해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새해에도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접어야 하나?  절망 속에 빠져있던 어느 날 글로리아가 자신의 거실에서 오랜만에 성경책을 펴서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을 붙들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옆에 누군가 계신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아, 주님이 살아 계시구나."  홀연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놀라운 생각, "주님이 살아 계시구나, 여기에 계시구나.  주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한 순간 그의 마음 속에 고통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염려가 사라집니다.  그의 마음에는 놀라운 평안이 임합니다.  방안이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연필을 들었습니다.  떠오르는 시상을 통해서 노랫말을 지어갑니다.  그 시가 완성된 다음에 그녀는 남편을 불렀습니다.  "여보, 빌!  하나님이 노래를 주셨어.  당신이 작곡해 봐."  그리고 빌 글로리아 게이더 부부를 통해 그 유명한 가스펠송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 노래가 바로 '살아 계신 주'입니다.
이 노래의 후렴은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러나 이 노래는 원문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게 노래할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는 미래를 직면할 수 있네.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분이 미래를 붙들고 계심을 내가 알기에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절망을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 안에서 다시 희망을 붙잡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소위 부활의 장이라고 말하는 고린전서 15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57절에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5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한 장래의 승리는 확실합니다.  우리는 주와 함께 부활할 것이며, 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일에 항상 힘쓰십시오.  우리의 부활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일하는 모든 것들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충성된 자에게 약속된 영광의 상급을 바라보십시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올인하십시오.  복음에 생명을 거십시오.  잡다한 시험이 많은 사람은 복음에 올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올인하면 시험이 없습니다.  허구한날 은혜를 받고 쉽게 그 은혜를 쏟아버린다는 것은 복음에 올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결론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신앙이 더 좋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신앙이 더 좋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에 올인하십시오.  복음을 붙잡으십시오.  복음만이 능력입니다.  복음만이 생명입니다.  이 복음으로 저 천국에서 영광의 승리자로 주 앞에 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