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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라. (2. 자비하신 하나님) (시 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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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라. (2. 자비하신 하나님) (시 116:5)


지난 주일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하여 상고했습니다. 온 우주만물은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서 ”왜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하느냐?“고 항변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인간들의 탐구를 통해서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늘과 땅에 많은 신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들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우상에 불과하며, 참 신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 신앙은 창조주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은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마야인들은 태양신을 비롯해서 많은 신들을 숭배했는데, 매년 신들을 위한 축제를 열고 인신제물을 바쳤습니다. 특히, 사람의 심장을 끄집어내어 제물로 바쳤습니다. 인신제물을 요구하는 신들은 그 성품이 선하다거나 자비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신들은 악하고 무자비한 성품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야인들은 자기들의 신들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한없이 선하신 신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시편 116편 5절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그 성품이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자비하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섬기게 된 것은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올바르고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로 알고 섬겼을 때에는 번영했으나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에는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게 패했습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호세아 선지자는 탄식하기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하였는가하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고 외쳤던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이같이 증언합니다. “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신 다음에 맨 나중에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이는 사람의 생존을 위한 모든 환경을 조성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얼마나 자비로우신 배려입니까?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위해 마련하신 에덴에 관하여 창세기 2장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에덴동산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얼마나 자비로운가를 말해 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이 지구상에 수많은 생명체가 있지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 밖에 없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영원을 사모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사람말고 그 어떤 생명체가 영원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습니까? 오직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을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정의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사람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므로 지정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오직 본능에 의해서만 살아갈 뿐입니다. 이와 같은 증거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얼마나 자비롭게 대우하셨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이 같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4)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신 것을 보아서 그 자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상천하지에 복과 화를 내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신데,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축복 곧 복을 빌어줄 수는 있지만 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복을 빈다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축복을 들으시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셔야 합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해돋이를 하면서 복을 빌지만, 그들의 기원은 다 헛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해가 인간들에게 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해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은 무지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실 뿐 아니라 전능하시므로 얼마든지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성도들이 어디서나 법과 양심을 잘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복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살면 망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성도들은 계명대로 양심적으로 살지라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라.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벧전 3:9). 

넷째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신 것을 보아서 그 자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시기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고대 이방 민족들을 보면 하나 같이 자연계의 위력 앞에 굴복하고 자연물을 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그것은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했던 히브리 민족은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지 않고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자연물을 신으로 숭배하는 민족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발전시킬 수 없었으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민족들은 자연물을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과 관리의 대상인 것을 알았으므로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은 지구상의 생물 자원을 보호하라는 명령이지, 무분별하게 남획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간들의 탐욕으로 인해, 지구 온난화와 무차별 개발로 인해, 수많은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정복하라” 하신 말씀을 오해해서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지혜와 재능을 이용해서 지구상의 모든 자원을 잘 선용하라는 뜻이지, 부하게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연계를 무차별하게 파헤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인류가 자행하는 자연파괴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근절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생태계를 살리고 조화롭게 발전시키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온 세계 만물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그 자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 인간들에게 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에게도 두루 미치고 있으며, 심지어는 산과 바다와 들판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전쟁을 하면서 무수한 폭탄을 퍼부어서 온 산하가 파괴되고, 이윤을 위해 자연을 무분별하게 개발한 결과 토양이 심각하게 오염됩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곳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버리고 다른 데로 이주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파괴되고 오염된 채 버려진 땅이라도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정화되고 치유되는 것을 봅니다.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치유를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식물을 보살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47편에 보니 “8)저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9)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하였고, 시편 104편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0)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11)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 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13)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14)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15)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예수님께서는 의식주를 위해 걱정하는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수고해서 먹고 산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17)…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 8:)고 했습니다. 

두뇌가 우수한 사람은 자기의 탁월함을 자랑하지 말고 그 같은 두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무슨 유익한 재능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그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은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지 말고 그 미모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합당한 재능을 다 주셨으므로 우리는 자기가 받은 재능이 무엇인지 발견해서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 재능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비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자비하심이 얼마나 풍성한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고 하셨고(마 5:45), 심지어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 6:35)고 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들도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 자비하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비하심을 인류의 구원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보기 좋고 맛있는 실과를 맺는 온갖 나무가 있었으므로 아담이 원하는 대로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과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는 말씀은 아담 뿐 아니라 하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한 동안 두 사람은 하나님의 금령을 잘 준행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간교한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나서 하와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습니다. 이에 하와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 하와가 뱀의 말에 넘어간 것은 먹을 과실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분수에 넘는 교만한 생각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무어 그리 죽을 죄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고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주신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고 도리어 피조물에 불과한 뱀의 말을 더 신용한 것이 어찌 가벼운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생각을 품다니 죽어 마땅한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와를 꾄 뱀의 정체에 대하여 마귀, 사단이라고 했습니다. 뱀은 마귀의 화신이 되어 하와를 꾄 것입니다. 

한편, 뱀의 말을 곧이듣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정말로 두 사람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뱀의 말처럼 그들이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니, 아담이 대답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으려고 합니다. 창세기 3장을 읽어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해 얼마나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아담은 땅의 소산을 얻기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수고하게 되었고, 하와는 잉태하고 해산하는 고통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결정적인 형벌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대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은 세 가지의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로 하나님과 단절됨으로써 영이 죽은 것과, 둘째로 육신이 죽게 된 것과, 셋째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죄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죄의 형벌을 달게 받을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범죄한 인간들의 비참한 운명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범죄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이 바로 그 약속인데,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나 실은 인간들에게 주신 구원의 첫 약속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 나오는 뱀은 마귀를 가리키고,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 약속은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범죄하여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인생들에게 죄를 용서 받고 죽을 운명을 벗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파격적인 자비하심을 베풀어 주신 결과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세주를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의 은총을 주시고 영혼의 구원을 허락해 주십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혹 우리가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도 변함없이 자비하심을 거두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이처럼 크시므로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기댈 곳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밖에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들에게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에 대하여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보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무섭고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께 나아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다시금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용납해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시편 103편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8)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영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라”(사 41:10)고 하셨습니다. 

내일 일로 인해 걱정하거나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시편 94편 14절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였고, 신명기 31장 8절에 보니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질병으로 인해서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앙망하여 치유 받으십시오. 시편 103편에 이르기를 “3)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 세상 끝 날까지 뿐 아니라 영원토록 다함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같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언제나 은혜롭고 활기찬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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