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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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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우리는 두 주일 전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라”는 주제를 상고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자비하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이 따로 계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 따로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대하여 여러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신적 품성 중 하나인 ‘전능하심’에 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근거는 그 분의 전능하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전능하지 않으시다면 그의 거룩하심이 대적들에 의해서 훼방을 받더라도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함을 지킬 힘이 없다면 하나님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근거는 그의 전능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함이란 ‘어떤 일이든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으며,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해와 달과 별들이 생겨났습니다. 또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고 명하시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되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십니다(롬 4:17). 

이에 대하여 시편 33편 6절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고 하였고, 이사야 40장 26절에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5장 12절에는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눈에 보이는 장엄한 우주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세균이나 유전자와 같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세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천체 과학자들이 만원경을 들여다보면서 우주의 신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듯이, 미생물학자들은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무한한 미생물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놀랍니다. 이로 인해 경건한 사람들은 과학적인 지식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겸손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심은 하나님과 우상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고대인들은 태양이나 달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태양을 “아톤” 또는 “라”라고 불렀으며, 그리스인들은 태양을 신들의 왕인 제우스로 생각했습니다. 고대 한국인들도 태양을 숭배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인들은 태양을 보면서 그 위대함에 탄복했습니다. 태양의 빛과 열을 받아서 초목이 자라고 곡식과 실과가 영글며,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태양을 신으로 믿었습니다.

또한 고대인들은 달도 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갔다가 월신 아데미 곧 다이아나의 전각을 만들어 파는 자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내용이 나옵니다. 달이 차고 기우는데 따라서 절기가 변하고 조수 간만의 차가 생기는 것을 보면서 고대인들은 달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 죄와 허물로 영이 죽은 인간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이나 달이 갖고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셔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중에는 낮이 밤처럼 캄캄하게 되는 재앙도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집트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태양을 치신 것을 의미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태양은 아무 것도 아님이 증명된 것입니다.

또 인간들은 나무나 돌, 철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깁니다. 한 그루의 나무를 베어서 일부는 가구를 만들고, 일부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형상을 조각해서 신으로 섬기는 것이니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같다 하겠느냐”(사 46:5)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감히 피조물들과 손으로 만든 우상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심은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자기들을 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황제의 신전을 짓고 상(像)을 만들어 세우고 그 앞에 제물을 바치고 분향케 했습니다. 그러나 무소불위(無所不爲)한 것처럼 굴던 그들은 하나같이 죽어 한 줌 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웃나라인 일본 역시 천황을 신으로 추앙하는 허황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일본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로서 세계를 지배해야 할 권리가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다른 나라들을 침략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1946년 1월 1일에는 라디오로 방송한 신년 담화를 통해서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천황은 신(神)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공적인 개념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천황이 이 선언을 소위 “인간선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나는 인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가소로운 면이 있지만 당시 일본인들이 천황을 신으로 숭상한 것을 감안하면 반드시 필요한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현대사를 보면 여러 나라의 독재자들이 자기들을 신격화해서 백성들에게 숭배를 강요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 가운데 죽음을 이긴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죽음에게 정복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신(神)이 될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과학 기술의 힘을 믿고 교만하게 굴지만, 이사야 2장 22절에 보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한 삼분만 숨을 쉬지 못하면 죽습니다. 파스칼의 말과 같이, 한 방울의 물로도 죽일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또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균에게 잡혀 먹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수를 깨달아 겸손해야 합니다.

한 가지, 언제부턴가 한국 사람들은 ‘신’이라는 말을 너무나 남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드라마의 제목으로 해신(海神) 장보고, 직장의 신(神) 등이 있고, 미모의 여배우들에게 여신이라는 칭호를 남발하는가 하면, 조용필 씨와 같은 가수에게 ‘노래의 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부 잘하는 사람을 일컬어 ‘공부의 신’이라고 합니다. 게임을 잘하는 사람은 ‘게임의 신’이고, 홈런을 잘 치는 선수는 ‘야구의 신’이고, 최고의 요리사를 ‘요리의 신’이라고 칭합니다. 어느 분야의 일인자를 일컬어 ‘천재’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만,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神)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아무데나 신(神) 자(字)를 붙이는 것을 본 따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는, 그런 식의 표현은 경망스럽고 불경스러운 것이므로 시정해야 마땅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 이르기를 “4)…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5)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신(神)이라는 호칭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에게는 합당하지 않으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참된 신앙인이 되는데 필수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니,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길 바란다”(창 28:3)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1)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되던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도 못한 채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거든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더니 백세에 독자 이삭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18절로 22절에는 이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삭이 청년이 되었는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얻은 아들입니까? 백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더구나 약속의 아들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이 있고서야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언반구 없이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제 삼일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산에 이르자 하인들을 산 아래에 기다리게 하고 이삭에게 나뭇단을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산에 올라 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놓고 손에 칼을 쥐고 이삭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고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재 가운데서 이삭을 살려내셔서 그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을 의심없이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19절에는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떠한 무서운 시험과 어려움이 다가와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망했구나 절규하는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케 해 주실 것을 믿고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신 약속을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시는데 무엇을 걱정하며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같이 만나만 먹다보니 싫증이 난 백성이 울면서 말하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한 모세가 하나님께 엎드려서 항변하였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깜짝 놀라서 여쭙기를 (하나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 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 개월 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보내셔서 메추라기 떼를 몰아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중에 떨어지게 하시니 백성은 싫증이 나도록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제 힘만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강함은 상대적이지 절대적이 아닙니다. 항우는 힘이 어찌나 세던지 산이라도 빼어 던질 만하고 세상을 덮을 정도로 기력이 웅대했습니다. 싸움터에 나가면 백만 대군을 앞에 두고서도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대적했습니다. 그러한 항우였건만 지략이 부족하여 한신과의 최후의 결전에서 참패하자 낙담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하면 항우를 패배시킨 한신 역시 여후의 계략에 넘어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아무리 강한 자도 사자처럼 강할 수는 없고, 아무리 달음질을 잘하는 사람도 말처럼 잘 달릴 수는 없으며,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속아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학 기술을 믿고 교만하게 굴지만, 지금 인류에게는 첨단 과학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얼마나 산적해 있습니까?

그러기에 시편 146편 3절로 5절에는 “3)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5)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능력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살되 마음에 여유가 없이 각박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신호를 지키지 않고 수시로 차선을 바꾸면서 질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마음에 여유가 없어 저러는 것이구나’ 생각합니다. 법규와 질서를 지키면 경쟁에서 뒤질 것처럼 생각이 들어 불안하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법규와 질서와 양심을 지키면서 너그럽게 남을 도와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현대는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되어서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돈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득차 있습니다. 물신(物神)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사람을 죽는 데서 구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황금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돈 때문에 불행해지고 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배경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언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하신 말씀대로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할 때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성도님들의 삶을 지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당장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잘되고 득세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좀 더 멀리 보면 악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실력이 있으나 불의한 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권세를 가지고 부정한 재물을 쌓고 약한 자들을 착복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무한하신 능력을 가지고 공의를 세우는 데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지 상관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우리가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 뿐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위한 근거가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전능하지 않으시다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은 확실성이 없는 막연한 기대가 되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복 된 약속들도 부도 수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만민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무덤에서 잠자는 성도들을 일으키셔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스바냐서 3장 17절에 보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항상 성도들과 함께 계시면서 위대한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슨 난관을 만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했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성도님들의 삶에 위대한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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