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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느헤미야의 개혁(2) : 무너진 봉헌생활을 회복하라 (느 1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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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개혁(2) : 무너진 봉헌생활을 회복하라 (느 13:10-14)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예루살렘의 총독을 지내면서 성벽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부흥과 도덕적 회복, 그리고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바벨론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니 이전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언약을 잊어버렸습니다. 느헤미야 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세 가지 맹세를 했습니다. 첫째는 이방인들과 결혼을 안 시키겠으며, 두 번째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킬 것이고, 세 번째는 십일조를 잘 드리겠다고 맹세하며 서약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서 보니 이 세 가지 맹세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재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첫 번째로 개혁한 일은 백성들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척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에서 섞여 있는 이방인들을 분리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숨어 있는 도비야를 쫒아내고, 그 방을 원래 기능대로 회복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연해 있는 세속주의를 단호하게 척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느헤미야의 개혁운동의 두 번째 내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봉헌생활에 대한 개혁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무너진 봉헌생활을 회복하라”고 정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이 제목이 조금 어색해 보일 것입니다. “무너진 헌금 생활을 회복하라”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헌금’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예배 순서 가운데도 ‘헌금’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주보에는 ‘헌금 기도’라고 하지 않고 ‘봉헌 기도’라고 합니다. 

우리 교단 총회예배 모범에는 ‘헌금’이라는 용어 대신에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봉헌의 의미는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이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드리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헌금보다는 봉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봉헌생활의 중심은 십일조입니다.  

저는 설교 중에 헌금이나 십일조에 관한 설교는 많이 하지 않은 편입니다. 헌금은 개인의 신앙 정도에 따라 하는 것이고, 십일조를 강조하여 성도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과 축복을 받게 하는 것보다, 십일조 설교로 인해 “목회자가 돈 얘기를 한다.”는 오해받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십일조 생활의 의미와 축복이 너무 중요하고 성경적이기에, 지금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성숙과 축복된 삶을 위해서 봉헌 생활에 대해 교육하고 필요하다면 십일조를 강조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켄델 목사님은 “목회자가 성도들이 시험들 것이 두려워서 십일조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결국 교인을 가난하게 만드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느헤미야도 바로 이러한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진 봉헌생활, 즉 십일조에 대한 개혁을 단행한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힌 도비야를 쫒아내고, 성전 방의 기능을 원래대로 회복시킨 후에 또 살펴보니까 레위 사람들이 다 성전을 떠나 가버렸습니다. 그 원인을 알아보니 백성들이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계의 위협을 느끼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원래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은 전적으로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와 헌물로 생활하도록 하나님의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백성들이 봉헌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 사람들은 굶어 죽을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각각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에서 봉사해야 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떠나 버리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성전 봉사자들이 성전을 떠나게 되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전제사 곧 예배가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레위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은 성전제사의 중요성을 무시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백성들에게 영적침체가 오자 그들은 가장 먼저 예배의 절대적 필요성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게 영적침체가 임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예배의 중요성을 잊어버립니다. 예배에 와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기쁨도 감격도 없습니다. 바로 영적침체의 징조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킵니다. 성도들은 성직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고, 성직자들은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당시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죽기까지 인내해야지 고작 먹고사는 문제로 사명을 팽개칠 수 있느냐?”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일을 등한시했구나! 우리가 너무 무책임해서 이런 일이 생겼구나!” 누구의 생각이 바른 생각입니까? 당연히 후자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백성들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통합측 교단 헌법 정치, 제3장, 제15조에는 교인의 의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교인의 의무는 공동예배 출석과 봉헌과 교회 치리에 복종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교인이며 누구나 공동예배에 참석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동예배는 주일낮, 주일 오후찬양, 수요예배입니다. 그리고 봉헌의 의무, 즉 헌금의 의무가 있습니다. 봉헌의 기본은 십일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의무헌금입니다. 그리고 교회 치리에 복종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 레위인들이 성전을 떠났듯이,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놀라시겠습니까? 물론 대도시에는 아주 형편이 어려운 교회를 제외하면 성도들이 대부분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나 선교지나 낙도나 농어촌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이런 곳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싶지만, 결국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는 이유는 바로 생계가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도들 가운데는 아직도 목회자는 청빈해야 하고 물질에서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물질이 넉넉하면 목회에 전념하지 않고 딴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형편이 되는데도 목회자의 생활을 어렵게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청빈하고 물질을 초월한다는 것은 삶의 목적을 물질에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전념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필요한 현시대에서 굶고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들의 생활과 자녀 교육에 아무런 염려가 없이 오직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시면 느헤미야는 모든 민장들을 모으고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습니다.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라고 했습니다. 민장을 꾸짖었던 이유는 그들이 백성들을 독려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장들이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민장을 꾸짖고 다시 레위 사람들을 성전에 세우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의 호된 질책으로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고 봉헌물과 십일조를 강제로 징수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므로 성전 곳간을 채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신앙이 무르익고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후 9: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봉헌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두 가지 신앙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섭리에 반응한다는 하나님 주도적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고난이 있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믿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헌금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헌금합니다. 

반면에 인간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하나님은 그 인간의 행위에 보상한다는 인간 주도적 신앙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내가 복 받는 행동을 하니까 하나님이 보상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헌금할 때도 그 보상을 생각하면서 헌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봉헌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백성들이 낸 십일조로 성전 곳간이 채워지자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를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으로 버금을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느헤미야는 십일조로 인해 성전의 곳간에 재물이 많아지자, 십일조의 효율적 관리와 분배를 위해 충직한 사람을 창고지기로 세웠습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기쁘게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십일조를 잘 관리해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즘 성도 중에 상당히 많은 분들이 십일조를 교회에서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내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정말 십일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제대로 잘 사용한다면 기쁨으로 봉헌할 것입니다. 잘못 쓰니까 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한번쯤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일조는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본문 14절 말씀에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느헤미야가 “내가 이렇게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교만한 표현이 아닙니다. 자신의 노력을 기억해주셔서 성전이 잘 관리되고, 백성들에게 축복된 일이 생기게 해달라는 겸손한 간구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확인하는 사랑의 서약입니다. 십일조는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두를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그처럼 십일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 나오자마자 십일조를 하는 신앙좋은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십일조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힘든 것이지만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헌신을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십일조는 우리 개개인의 영적 부흥을 위해 주셨습니다. 대다수의 성도는 십일조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영적 생활이 분명해지고, 철저히 회개가 나왔으며, 성경말씀의 이해와 기도가 활기차게 나왔고,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보람과 교회 생활의 즐거움과 구원의 확신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구체적인 복을 누리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구약성경 말 3:10절은 십일조에 대한 축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잘 사는 민족은 유태인입니다. 그들은 세계의 금융뿐만 아니라 매스컴, 언론, 영화 등도 거의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돈줄을 쥘 수 있었을까요? 인색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머리가 좋기 때문이라고 말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십일조 생활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축복은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행동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받은 물질을 바르게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우리의 봉헌생활이 무너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선적으로 우리의 봉헌생활을 바르게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무너진 봉헌생활을 회복하며, 특히 십일조 생활을 잘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고,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삶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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