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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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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 6: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6:7)

영적 상태의 변화

본문은 팔복의 다섯 번째,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6:7)  
  
긍휼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먼저 팔복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심령 변화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팔복의 전반부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였습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영적 상태, 주로 구원받기 이전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이와는 달리 팔복의 후반부는 주로 구원받은 이후, 은혜 받은 이후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 긍휼히 여기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가지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청결도 내가 스스로 깨끗한 마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속죄로 깨끗해진 마음입니다. 화평케 하는 것 역시 내가 화평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속죄로 내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기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역할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도, 예수님 때문에 내가 의인으로 인정받았기에 이제는 그 의를 지키기 위해 박해를 감수하는 자세를 나타냅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주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관찰 합니다. 영적 빈곤의 자각, 죄에 대한 애통,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는 온유한 마음가짐, 내가 얼마나 의롭지 못한 자인지에 대한 철저한 각성 등.  
  
구원 받은 이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신을 보면서, 이제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삶으로 나아갑니다. 긍휼히 여깁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합니다. 화평을 이룹니다. 의를 위해 도전하고 고난을 감수 합니다.  
  
오늘 내 자신을 보세요. 정말 팔복을 체험하고 있나요? 심령의 빈곤을 느끼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았습니까? 죄를 애통하다가 용서의 위로를 받았습니까? 정말 어쩔 수 없는 인생임을 알고, 온유하게 따르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내게는 아무런 의로움도 없는 줄 깨닫고, 하나님이 의롭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만족함이 있습니까?  
  
거기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거기서 보다 적극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팔복의 후반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화평케 하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로 나아가세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첫 번째로 나타나는 마음의 변화는 긍휼입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긍휼이란 말은 헬라어로 “ejlehvmwn”(엘레에몬)입니다. 동정심과 자비심이 넘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1-2) 

사도 바울이 말씀한 대로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은 사랑입니다. 오래 참습니다. 관대합니다. 비판하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해하고 배려합니다.  
  
구약 성경 역시 긍휼의 개념은 폭이 넓습니다.  모세의 글이나, 이사야 선지자를 포함하여 구약 성경의 기록에 보면 긍휼이란 말이 단독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자주 다른 단어와 병행하여 사용됩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구약 성경에 아주 많이 사용된 단어들이 바로 이런 단어들입니다. 긍휼 “!j'r”(라함), 은혜 “@n"j”(하난), 인자 혹은 자비 “dseje”(헤세드) 등입니다. 이런 단어들은 대개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 함께 사용됩니다. 그것은 긍휼이나 자비가 매우 넓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긍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하나님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 면에서 긍휼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품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곧 하나님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신 역사입니다. 타락한 아담을 찾아주신 것이 긍휼입니다. 아담의 죄를 덮기 위해 가죽 옷을 입혀주신 것이 긍휼입니다.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신 것이 긍휼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 긍휼입니다. 그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이 긍휼입니다. 원망 불평 속에 사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끄신 것이 긍휼입니다. 맨손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 것이 긍휼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긍휼은 예수님을 내게 보내주신 긍휼입니다. 죄로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무 조건이나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거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이스라엘의 별명은 “로루하마”(hm;j;r aOl) 혹은 “로 암미”(yMi[' aOl)입니다.(호1:8) 히브리어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다”, 혹은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hm;j;r”(루하마)란 단어는 구약 성경에 아주 많이 사용된 단어, “!j'r”(라함)과 같은 단어입니다. 라함은 긍휼이란 뜻입니다. “!j'r”(라함)에 “aOl”(로)라는 부정사(否定辭)가 붙어서 된 말이 바로 “로루하마”(hm;j;r aOl), “긍휼을 입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부러 호세아를 타락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시대가 그만큼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타락했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갖 우상을 다 섬겼습니다. 이런 모습이 마치 한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들과 관계하는 창녀에 비유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런 극단적인 결혼을 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실물 교육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부정한 결혼 생활을 통해서 부정한 자식들, 즉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사생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우상의 자녀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이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로루하마”(hm;j;r aOl)가 “hm;j;r”(루하마)가 되었습니다. 즉, 긍휼을 입지 못한 자녀들이 긍휼을 입게 되었습니다. “로 암미”(yMi[' aOl)가 “암미”(yMi[')가 되었습니다. 즉,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내 백성이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 “천도천신...”하면서 주문을 외우시던 할아버지의 손자였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로루하마”(hm;j;r aOl)가 “hm;j;r”(루하마)가 되었습니다. “로 암미”(yMi[' aOl)가 “암미”(yMi[')가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세요. 간음하다 잡혀 온 수가성 여인,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나 삭개오, 예수님 십자가 오른 편에서 사형당한 살인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으러 다니던 사울, 모두가 하나님 자녀가 될 가망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매일매일 하나님께 이렇게 큰 긍휼을 입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가정을 해 봅니다. 만일 내가 매일 죄 짓는 것만큼 벌을 받는다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아마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겁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 행동으로 지은 죄, 말로 지은 죄, 공무수행 잘 못 한 것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주님 안에 살게 하시고,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모두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할렐루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

우리는 이제부터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것만 만족하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긍휼을 입은 자로서 당연히 남을 긍휼히 여겨야만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나아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줄까요?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될까요?”(마18:21)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 번 정도 용서해주고, 네 번째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일곱 번이라고 한 것은 통상의 용서를 두 배 하고도 한 번 더한 것입니다. 아주 많이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490 번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제한 없이 용서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은 한 가지 비유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많이 졌는데 그 액수가 무려 일만 달란트나 됩니다. 이 사람은 직책상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왕에게 바치는 관리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연히 바쳐야 될 액수에서 일만 달란트나 모자랍니다. 불가항력적인 이유든지, 혹은 고의로 탕진한 결과이든지, 절대적인 권세를 가진 왕 앞에서 돈을 갚지 못하면 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이 명령합니다. 네 소유는 물론 네 몸과 네 처와 네 자식들까지 다 팔아서 갚아라! 일만 달란트란 돈은 엄청난 액수입니다. 가족들을 다 판다고 해도 푼돈에 불과합니다.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값은 은 30냥에 불과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엄청난 돈입니다. 그 돈을 어떻게 갚습니까? 이 사람은 왕 앞에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왕이시여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다 갚겠습니다. 왕이 볼 때에 갚을 가망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다려주면 다 갚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한심합니까? 이 사람에게 왕은 어떤 조치를 내렸을까요? 그래, 기다릴 테니 다 갚아라! 그렇게 했나요? 아닙니다. 전혀 뜻밖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빚을 완전히 탕감해 줬습니다. 갚을 능력도 없는 사람이 다 갚겠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이 한심 합니다. 왕은 차라리 모든 부채를 면제하고 방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일만 달란트나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 진 동료를 붙잡아 가뒀습니다. 함께 있는 동료들이 볼 때에 너무나 민망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이 얘기를 듣고 진노했습니다. 네가 내게 빌기에 빚을 탕감해 줬는데,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은 그 사람이 빚을 다 갚기까지 감옥에 넣었습니다. 빚을 갚을 가망성이 전혀 없으니 결국 종신형을 당한 겁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에 주님은 설명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우리들입니다. 내게 빚진 동료는 바로 나와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는 일만 달란트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진 빚은 겨우 일백 데나리온입니다.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을 비교해 보세요. 일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60,000,000, 데나리온입니다. 비율로 보면 60만 분의 1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의 60만 분의 1도 용서 못 합니다. 관용하지 못합니다. 누가 내게 잘못한 것은 수첩에 적어놓고 벼릅니다. 두고 보자! 나는 결코 잊지 않으리, 네게 다 갚아줄 때까지! 반대로 내가 입은 긍휼과 은혜는 말짱하게 까먹습니다. 내가 언제 남에게 신세 진 적 있나?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매일의 출입을 통해서, 일과를 통해서 긍휼을 실천하세요. 동대문의 원래 이름은 興仁之門입니다. 서울의 사대문을 만들면서 맹자의 四端론에서 비롯된 가르침을 문 이름에 새겼습니다. 
四端이란 仁義禮智를 가리킵니다. 
惻隱之心仁之端, 羞惡之心義之端, 辭讓之心禮之端, 是非之心智之端. 

동대문은 흥인지문입니다. 인을 흥하게 하자는 뜻입니다. 
남대문은 숭례문입니다. 禮를 높이자는 뜻입니다. 
서대문은 돈의문입니다. 義를 돈독히 하자는 뜻입니다. 
북대문은 홍지문입니다. 지혜와 지식을 크게 하자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매일 드나드는 문에 실천사항을 적어 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매일의 출입을 통해서 긍휼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내게 명하십니다. 용서하라! 관용하라! 탕감해 줘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내게 빚진 것을 도로 찾겠다! 네가 다 갚을 때까지 종신형에 처하리라!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주신 복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입니다. 성도들이 받는 최고의 복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입니다.  
  
저는 긍휼의 복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나를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좋게 봐줍니다. 잘하든 못하든 대개는 잘한 쪽으로 인정해 줍니다.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한 것 이상으로 평가해줍니다. 항상 누군가 도와주고, 누군가 함께 해줍니다. 잘못해도 봐주고, 실수를 해도 덮어줍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 목회자들을 보면 아주 치열합니다. 무슨 야전 사령관 같습니다. 一絲不亂한 조직, 치밀한 계획, 탱크 같은 추진력 등등. 그러나 중세 교회나 유럽 교회들이 이렇게 일사불란하지 않고, 이렇게 치밀한 계획이 없고, 탱크 같은 추진력이 없어서 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 긍휼을 입지 못한 결과입니다. 긍휼을 입는 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긍휼을 입는 것은 인간적인 치열함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야곱보다는 에서가 더 적극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이삭보다는 이스마엘이 더 액티브 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역사는 에서보다는 야곱을 통해서, 이스마엘보다는 이삭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오직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과 그렇지 못한 차이일 뿐입니다.  
  
세상에 보세요. 성공하려고 애쓴 사람이 성공하지는 않습니다. 부자 되려고 애쓴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높아지려고 애쓴 사람이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유명해지려고 애쓴 사람이 유명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저항에 부딪칩니다. 일을 잘 했는데도 욕먹습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 비난당합니다. 별로 남을 해친 일이 없는데 배척당하고 공격당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게 우연이란 말입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람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까?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굳이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결코 패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잊지 마세요.  
  
긍휼을 입은 사람들의 스토리가 바로 성경입니다. 노아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요셉이 어떻게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습니까? 에스더가 어떻게 파사의 왕비가 되었습니까? 다니엘이 어떻게 이방 나라에서 성공했습니까? 결론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9)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단 9:23)

어떻게 베드로가 수제자가 되었습니까? 어떻게 세리 마태와 삭개오가 사도가 되었습니까?  어떻게 수가성 여인이 구원 받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생명을 구했습니까?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긍휼을 입고, 긍휼을 베푸는 삶이야말로 우리 삶의 전폭적인 축복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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