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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탄사가 있는 삶 (시 13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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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사가 있는 삶 (시 139:11-18)

“참으로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감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 Thoreau, 1817-1862)라는 미국 작가가 쓴 『월든(Walden)』이라는 에세이집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 소로우가 1845년부터 47년까지 2년 동안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숲에 있는 ‘웰든’이라는 작은 호수가에서 오두막 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며 살았던 자신의 삶을 에세이로 기술한 것입니다. 그 책에서 소로우는 행복의 조건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첫 번째는 나누어주는 삶입니다. 물질을 나누든 마음을 나누든 무엇이든지 나누어 줄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모자라기 때문에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누어 줄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줄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누어 줄 마음만 있으면 콩 한 알로도 열 사람이 나눠먹고, 남은 것을 우물에 던져도 풍덩하는 소리가 난다’고요.
  
두 번째 행복의 조건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일을 통해서 아무리 많은 돈을 번다 하여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열정과 성실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행복의 조건은 작은 일에도 기쁨을 느끼고 감탄하며 사는 삶입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 속에서 기쁨을 찾고, 나에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요,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이고 작은 일들을 바라보면서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일 때 가능합니다. 
  
길을 가다가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작은 꽃 한 송이를 보면서 ‘참 예쁘다!’고 감탄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 가운데 행복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쁨을 잊어버린 채 습관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하고 기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감탄사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을 따지고 냉철하게 사고하는 사람에게는 감탄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감탄할 일이 많고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쉽게 말하면 감동을 잘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감동을 잘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잘 알려진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Roger de Saint-Exupery, 1900~1944)가 쓴 『어린 왕자』에 보면 감동을 잃어버린 어른들을 향하여 “어른들을 숫자를 좋아한다.”라는 말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면 어른들은 주로 이런 것을 물어 봅니다. ‘나이가 몇 살이야?’ ‘어디에 살아?(본래의 의도 - 아파트야? 단독주택이야? 아파트 몇 평에 살아?)’ ‘그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야?(본래의 의도 -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야? 돈을 잘 버는 사람이야? 부자야?)’ 

그런데 아이들은 그런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그 친구집에 놀러 갔다 와서는 ‘그 집 참 좋아. 창가에 예쁜 꽃이 피어있고, 커튼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그러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쉽게 상상하지 못합니다. 어른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됩니다. ‘2억짜리 집이래.’ 어른들은 숫자로 환산을 하면 쉽게 이해합니다. 그것은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현대인의 불행은 감탄사를 잃어버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좋은 일을 보고도 ‘좋다!’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놀라운 경험을 했으면서도 ‘야 신기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감정을 상실해버렸습니다. 고마운 일을 겪었으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미안한 언행을 했으면서도 ‘미안하다’고 말하면 안 되는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그게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고속도로 화장실과 같은 공중화장실에 가면 남자들 소변기 앞에 이런 글씨가 써 있습니다. “남자들이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의 의도를 잘 알지요. 그러나 우리는 어려서부터 감정을 감추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세뇌 받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남자는 절대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슬퍼도 슬픈 표를 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기뻐도 기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천박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엄청난 장애물입니다. 기쁘면 기쁜 감정을 느껴야 하고, 또한 기쁜 얼굴을 해야 하고, 기쁘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반대로 슬프면 슬픈 감정을 느껴야 하고, 슬프다는 것을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거나 실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감정 표현이 분명한 사람이었고, 그런 감정적인 풍요로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감탄을 아주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감탄했던 모습을 두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바라보면서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8: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감탄하며 노래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목동이었습니다. 양을 데리고 산과 들과 사막을 헤매다가 저녁이 되면 양을 우리에 가두어 놓고 광활한 대지 위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밝게 비취는 달빛을 볼 때마다, 또 하늘의 무수히 박혀 있는 수많은 별들을 볼 때마다 그는 자연의 신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감사 감격했고, 이런 아름다운 세상에 살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8:3절에서 이어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만드신 것 같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온 땅에 가득한 것을 가슴 가득히 감동으로 느낀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많은 시들이 바로 그런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세계를 바라보면서 다윗과 같은 감동을 느껴보셨습니까? 제가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언제 느껴보셨습니까?’라고 다시 물으면 ‘어렸을 적에요. 옛날 시골에서요.’라고 대답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들이 잃어버렸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을 잃어버린 채 바쁘게 살다보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할 때만 ‘아! 정말 멋있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딘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에 가야만 ‘이렇게 멋있는 곳도 있었구나!’라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주변에도 아름답고 멋있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 속에 살면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낄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 마음 속에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아름다움이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멋있는 곳이 있으면 잠시 쉬었다가 그 멋있는 경치를 구경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가끔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을 보면서 아름다운 상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커다란 보름달만이 아니라 매일 변해가는 달을 보면서 신비로움에 감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등산할 때 산에 오르는 것만을 목표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지 말고, 가끔씩 쉬면서 시원한 바람에도 감사해 보고, 평소 무심결에 지났던 등산로 옆에 자라고 있는 작은 꽃 하나를 보면서 ‘멋있다’고 외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돈이나 명예, 또는 성공이나 출세가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성공한 사람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그들의 성공에 찬사를 보냅니다.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너무 그런 세상적인 것들에 매료되어버렸기에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자주자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면서 우리 마음에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까? 그 별들 속에서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손가락의 오묘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북극성을 아시지요? 현대과학에 의하면 북극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로부터 약 1000광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1광년은 빛의 속도로 달려갔을 때 1년 걸리는 거리를 말합니다. 북극성에서 나온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까지 1000년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 북극성을 한 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바라본 그 북극성의 빛은 1000년 전에 그 별에서 반짝 한 것입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반짝 한 빛을 오늘 저녁에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북극성에서 반짝 한 빛은 지금으로부터 1000년 후인 3009년 쯤에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참 신비롭지 않습니까? 오늘 저녁에 우리가 본 북극성의 빛이 1000년 전에 것이라니 말입니다. 그런데 북극성은 그리 먼 거리도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별은 지구로부터 150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별 가운데 가장 먼 별은 40억 광년이라고 합니다. 40억년 전에 반짝 한 빛을 오늘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크고 어마어마한 것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 하나하나까지 하나님의 손이 만드셨습니다. 그것들을 바라볼 때, 또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을 감탄하게 만들었던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것을 오늘 본문 14절에서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묘막측하심이라.” ‘신묘막측하다’는 말은 너무너무 놀라서 두려워 떨릴 지경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이 말씀은 앞에 말씀드린 다윗이 양을 칠 때와 연관되어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넓은 사막이나 들판에서 양을 우리에 넣어두고 우리 옆에 누워 하늘을 쳐다봅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들만 초롱초롱 떠 있습니다. 그런데 먼 데서 사나운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저 사나운 들짐승이 이곳으로 달려와서 내 양들을 다 죽이지는 않을까? 그 사나운 짐승들이 나를 해하지는 않을까?’ 그런 두려움이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그 순간 그는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저렇게 맑고 아름다운 달과 별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납게 울부짖는 들짐승에 비할 수 없이 크신 분입니다. 그 들짐승들조차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미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이신지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들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우주 가운데 나를 만드시고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게 신비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캄캄한 밤하늘 아래서 다윗은 자신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이 어머니 배속에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자연히 만들어져 이 땅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를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만드시고 오늘 여기에 이르도록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할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고 조직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조직하셨다는 말은 조립하셨다는 뜻입니다. 컴퓨터 기사가 컴퓨터를 조립하듯이, 컴퓨터보다 더 정밀한 나를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조립하셨습니다. 
  
광활한 사막 아래 누워있는 자신은 정말 초라하고 작은 존재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하나하나 조립하시듯 나도 그렇게 조립하셨다고 생각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이렇게 신기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내 삶도 하나님께서 조립하셨습니다. 내가 양떼를 몰고 이곳저곳을 헤맬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셨고, 지켜주셨습니다. 

때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때론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은 언제나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내 삶에 역사하셨습니다.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 같아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셔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17-18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내가 내 길을 계획하고 준비할지라도 그 모든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분명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무리 내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역사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말입니다. 
  
그걸 생각하니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내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시고 조립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조립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순간 우리의 삶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우리의 삶에 베풀어 주십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택정하시고 부르시고 자녀를 삼아 주신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 하나도 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중해를 오가는 한 상선의 선장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죽고 11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선원이 된 이후에 모든 삶이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도 잃어버렸고, 성격도 난폭하고 거칠어져만 갔습니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오는 노예선에서 일하면서 나쁜 짓만 골라하는 잔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군대에 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하다가 잡혀서 15개월 동안 노예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간신히 노예에서 풀려난 그는 노예매매선에 탑승하게 됩디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노예로 잡아 미국에 파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예들을 미국에 내려놓고 고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품에서 기도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나를 살려 주시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살겠노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풍랑에서 그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한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 가득히 밀려왔습니다. 나 같은 죄인, 정말 죽어 마땅한 나 같은 죄인까지 사랑하시고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너무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 찬송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405장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가 바로 존 뉴튼(John Newton, 1725~1807) 목사님입니다. 
  
그는 나이 많이 기억력이 점차 쇠퇴할 때에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다른 것을 다 잊어버릴지라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과거에 아주 몹쓸 짓을 한 죄인이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감동을 평생 안고 사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도 늘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탄사를 잃어버린 신앙인은 더 이상 신앙인이 아닙니다.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신앙은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삶에 언제나 함께하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죽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입술에는 감탄사가 끊치지 않습니다. 지금도 내 삶에 함께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매일 매순간은 아닐지라도, 자주자주 우리의 삶 속에서 감탄하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언어 속에 감탄사가 많아져야 합니다. “야! 멋있다.” “와! 아름답다.” “아! 신비롭다.”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짱.” 
  
감탄사가 없는 삶은 지루합니다. 따분합니다. 아무 의미 없이 반복되는 삶처럼 허무할 뿐입니다. 남들처럼 부자는 아닐지라도, 남들처럼 건강하지 못해도, 남들처럼 출세하지 못했어도, 남들처럼 얼굴이 잘 생기진 못했어도, 오늘의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늘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늘 감탄사를 외치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심장이 오늘도 뛰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복된 자리에 불러주셨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주셨다는 것 때문에,
내 마음을 열어놓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때문에, 
부족한 내 입술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 때문에,
내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감탄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감탄하는 만큼 우리의 삶은 행복해집니다. 감탄하는 만큼 우리의 신앙은 역동적이 됩니다. 감탄하는 만큼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감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러분, 신앙은 감탄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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