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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5) : 양식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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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5) : 양식 (마 6:9-13)

: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여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와 그 뜻을 깊이 알기를 소원합니다. 
  
한 청년이 버스의 맨 뒤에 앉았는데, 한 쪽에는 뚱뚱한 아주머니가, 다른 한 쪽에는 예쁜 아가씨가 앉았습니다. 버스가 급히 좌회전을 하면서 아주머니가 “에구머니!” 하고 청년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 청년, 슬쩍 밀어내면서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조금 후 이번에는 버스가 급히 우회전을 하면서 중심을 잃은 처녀가 ‘어머나!’ 하고 청년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 청년, 살포시 처녀를 안아주면서 ‘주여,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뜻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일까요?

주님의 기도에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분의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을 위한 내용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와 그 뜻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분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 분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이어서 우리를 위한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위한 기도를 가르쳐주셨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현실성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주의하여 합니다. 물론 그 반대도 주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필요만 기도하는 것은 기복신앙입니다. 자기의 욕망만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주님의 기도를 깊이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써의 영광과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연약함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신비롭고 그래서 도전할 만한 삶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한 세 가지 기도 중에서 그 첫 번째 내용인 양식을 위한 기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IV. 양식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내용 가운데 첫 번째 내용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여기에서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한식이 아니고 양식이라는 말씀입니까? 여기에서 ‘양식[a[rto"/알토스]’은 빵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드는 길게 늘어지거나 둥글고 두꺼우며 큰 빵입니다. 그런데 빵이라고 하면 양식(洋食)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떡이라고 번역하게 되면 한식(韓食)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양식(糧食)은 우리가 먹는 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매일 먹을 수 있는 밥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빵’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성찬식에 사용하는 떡이라고 여겨 매일 성찬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오신 떡이라고 한 것(요 6:48)을 기억하여 매일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영원한 양식인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는(요 6:27) 오래된 전통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떡이신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너무 영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비유로 보고 영적으로 해석하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우리를 위한 기도를 관련하여 생각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첫 번째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위해서는 첫 번째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시는 분인데 반하여,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양식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 사람에게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양식은 단지 먹을거리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양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총체적인 조건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일용한 양식은) 우리의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다. 곧 음식과 의복과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돈, 재산, 올곧은 배우자와 아이들, 착한 식솔들, 강직하고 신실한 통치자들, 좋은 정부와 날씨와 평화와 건강과 품격과 명예, 좋은 친구, 신실한 이웃과 같은 것들 말이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많은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하거나 한편으로 치우쳐 읽습니다.

1) 양식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는 극단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먹을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아주 저급한 신앙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성경을 인용합니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신명기 8:3 후반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 8:3b)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여야 했습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보아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친히 베풀어주시는 식탁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에게 먹을 것이 필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먹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먹어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눅 12:29-30a)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믿음 없는 행동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을 것이 없어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습니까?

2) 먹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내용으로 그 첫 번째가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얼마동안은 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먹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도 금식하신 후 굶주리셨습니다.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지만 유혹을 받으셨던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손자들에게 늘 밥을 잘 먹어야 한다고 잔소리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손자가 초등학교에서 가훈을 써내라고 하니까 대뜸 이렇게 적어내었답니다.

가훈 - 먹어야 산다!

성경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칠병이어’의 기적도 있습니다. 일곱 개의 떡으로 사천 명으로 먹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을 먹이셨습니까? 마태복음 15:32입니다.

(마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기적을 베푸신 것은 만일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하시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아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떡만 보았지, 생명의 떡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은 먹을 것이 없으면 눈에 ‘뵈는’ 것이 없기도 하고, 배만 부르면 그 이상을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먹는 문제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먹을 것을 위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3) 먹을거리를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하고 그 필요한 먹을거리를 얻기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9 말씀입니다.

(출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이것은 십계명 중에서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는 말씀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엿새 동안 힘써 자신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자신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 하나님이 쉬신 것처럼 쉬는 것입니다. 쉬기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다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10입니다.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먹을 것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원리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수년 전, 중국 정부는 세계를 제패했던 여러 문명을 연구하고 분석한 ‘대국굴기’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단행했습니다. 로마,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등 한때 세계 역사를 주도했던 문명들의 흥망성쇠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국 연구팀을 당황하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한 제국을 만든 핵심 비결이 바로 근면하고 정직한 정신문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바로 기독교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그 후 기독교에 대해 아주 심도 깊은 연구를 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한홍, ‘중국의 고민’, 국민일보)

먹을 것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입니다. 이 복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자신의 먹을 것만을 위하여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11절 말씀입니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하나님을 위한 내용 세 가지에서 우리 말 표현법에 따라서 생략된 것은 ‘그의’라는 말이었습니다. 즉 ‘(그의) 이름’, ‘(그의) 나라’, ‘(그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한 기도에서는 역시 우리 말 표현법에 따라서 ‘우리’라는 말은 거의 모두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것처럼 깊은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우리’라는 말을 넣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그 분의 나라’인 것처럼, ‘우리의 양식’입니다. 


2. 우리의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말에서 ‘우리’라는 말은 자주 ‘나’를 의미합니다. ‘우리 집사람을 소개합니다.’라고 했다면 이것은 ‘내 아내(my wife)’를 소개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여러 사람인 ‘우리 아내(our wife)’라고 이해한다면 큰일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오해를 살수도 있습니다.

새로 부임한 신부에게 사제관의 여자 관리인이 보고합니다.

“신부님의 집은 지붕을 수리해야 합니다. 신부님의 집 수도는 수압이 너무 낮습니다. 신부님의 집 아궁이도 쓸 수가 없어요.”

그러자 신부가 말했습니다.

“이봐요 켈리부인, 당신은 5년 동안 여기 있었고, 나는 여기 온 지 며칠밖에 안 돼요. 그러니 ‘우리’ 지붕 그리고 ‘우리’ 아궁이라고 말하면 좋겠어요.”

그로부터 몇 주 뒤, 신부가 주교를 포함한 다른 여러 신부와 회의를 하고 있는데, 몹시 당황한 켈리부인이 느닷없이 들이닥쳐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 방에 쥐가 한 마리 들어와, 우리 침대 밑으로 들어갔어요. 우리 어떻게 하면 좋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우리’는 정말로 ‘우리’입니다. ‘너와 나를 함께 아우르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1)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별도로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늘은 간략하게 집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25 말씀입니다.

(고전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몸 안에 여러 지체가 있어서 서로 같이 돌보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 하나님위 나라를 이루며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식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너무 많이 먹는다면 누군가는 굶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굶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너무 많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누군가가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인간의 탐욕 때문에 공급과 수요 사이에 균형이 심각하게 깨어졌습니다. 한쪽에서는 비만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양식’을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2)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나’가 아니라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다른 사람의 먹을거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구의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3:16 말씀입니다.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예배는 예배당 안에서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먹을거리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먹을거리를 나누어 주는 일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다면 교회에서 반찬 나누는 일에라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음식물 쓰레기라고 줄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나의 먹을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먹고 있는지 못 먹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위험한 기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자녀로써 살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 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또 11절 말씀입니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지막으로 관심을 가지려는 말은 ‘일용할[ejpiouvsio"/에피우시오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즉 ‘필요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새/공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만큼이나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까? ‘오늘’입니다. 이전 번역에서 ‘오늘날’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은 ‘지금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 날을 가리키는 ‘오늘날’이라고 하는 것보다, 하루를 가리키는 ‘오늘’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 특별히 그 날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아주 소박한 기도입니다.


3.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양식이 필요한데 하필이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 데는 생각하여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 매일을 하루살이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1) 저축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은혜로 여기는 수도자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원리는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또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잠언 6:6입니다.

(잠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우리가 개미에게 가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7-8)는 것입니다. 예비하고 모으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준비하여 놓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아가서는 영원한 천국을 위하여 준비하여 놓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세상에 쌓아놓는 것이 문제입니다.

존 웨슬리는 돈에 관한 설교에서 첫째로 할 수 있는 한 많이 벌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할 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하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웨슬리가 저축하라고 한 것은 필요 없는 낭비를 막고, 더 많은 것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규모 있는 삶을 위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루의 양식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2) 매일을 하나님께 의지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통하여 매일 매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34 말씀입니다.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일이 없이 하루하루 사는 것보다 불안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거짓 희망을 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제는 이미 지나간 시간입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오늘 하루뿐입니다. 내일이 되면 그 날은 역시 오늘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가버린 시간을 후회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 시간에 맡겨주신 하여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양식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되 결과를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매일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3) 자족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빌 4:11)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경건을 위하여 이렇게 부탁합니다. 디모데전서 6:6입니다.

(딤전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여기에서 자족하다는 말은 ‘자기만족’을 가리킵니다. 더할 것이나 필요해서 보충할 것이 없는 완전한 삶의 상태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은혜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맡기기에 누리는 마음의 평온합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자신을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족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이것은 바로 떡 한 조각을 놓고도 감사하는 것입니다(잠 17: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십시오. 혼자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만 더 많은 것을 구하십시오. 정말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지금 행복한 삶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웃과 먹을 것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욕심을 버리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나누는 삶이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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