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권위자가 되십시오 (행 4:36-37)

첨부 1


권위자가 되십시오 (행 4:36-37)

둘째 아이가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아내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나를 닮았나?’ 속상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이를 불러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아빠, 그게 아니에요. 친구가 자꾸 뒤에서 장난을 쳐서 하지 말라고 말한 것 뿐인데 선생님은 저만 야단쳐요”

“그래서 뭐라고 말씀 드렸니”

“제가 그런 게 아니라 애들이 뒤에서 장난친 거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든?”
“친구들이 한 일 고자질 하지 말고 수업이나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은 괜히 저만 미워하세요.”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 아직 안 풀린 듯 대답을 하는 아이의 음성이 떨렸습니다. 학창시절,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 한번쯤 안 해 보신 분들이 별로 없으실 것입니다. 선생님, 아버지, 목사와 같은 리더들이 올바른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면 참 좋을텐데 오히려 권위를 남용함으로 부당한 일들을 행하는 것들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권위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되기 마련이죠. 그래서 그런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권위'(남을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렸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졌습니다. 학교에서는 스승의 권위가 사라졌고, 교회에서도 목사를 예전처럼 권위자로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권위는 그렇게 좋은 느낌의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의 권위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그는 권위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바나바입니다. 본문 36절을 개역한글판으로 읽어볼까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뭐라고 바나바를 번역하고 있습니까? ‘권위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잘 안가시지요? 우리는 바나바 하면 누구보다도 따뜻한 사람, 권위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요셉이 본래 이름이고 별명이 바나바, 즉 권위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올바른 권위가 아닌 잘못된 권위를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권위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권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을 보세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여기서 ‘권세’는 영어로 ‘authority’, 즉 권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권위를 배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바나바처럼 삶의 터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Ⅰ.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권위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권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본문과 오늘 본문을 이어서 읽어보세요.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습니까? 지난 주 본문 34~35절을 읽어보세요.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본문 36~37절 읽어 보세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두 본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사람들의 두 번째 특징이에요.

그런데 차이가 있어요? 34~35절에는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람들이 익명으로 처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쉬운 일입니까? 만약 자신의 전 재산을 헌금한 성도님이 있다면 마땅히 그 이름을 알리고 칭송을 받게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 본문에는 그 누구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거든요. 아니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상하게도 바나바라는 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누구보다도 많은 헌금을 했기 때문일까요? 네, 물론 그런 상상도 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가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근거로 학자들은 구브로 섬은 구리 광산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그들의 조상이 일찍이 외세의 침공을 피하여 구브로로 갔기에 많은 부를 축적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헌금액이 많아 그의 이름을 기록했다면 성경은 그가 헌금한 액수를 공개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나바의 이름을 공개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 본이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34절부터 본문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의 대표성을 띠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읽어 보세요.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밭과 집이 있는 자들이 그것을 팔아 판 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 그 중에 구브로에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 중에’라는 접속사를 넣어 읽으니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에요? 큰 은혜를 받고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의 대표성을 띠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모본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본이  되는 그를 따라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한 것입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권위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0장 44절에서 서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는 제자들, 다시 말해서 서로 권위를 가지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삶은 섬김, 그 자체였습니다. 본문 3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바나바라는 별칭은 사도들이 붙여준 별칭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인 사도들이 보니까 바나바라는 성도가 늘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의 뜻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라는 단어인데, ‘휘오스’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파라클레세오’라는 단어는 ‘위로의’, 또는 ‘권면의’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한글판에서는 ‘권위자’로, 개역개정판에서는 ‘위로의 아들’로 번역한 거에요. 무슨 말인가 하면 참된 권위는 사람을 돌보며 섬기며 위로할 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37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자신들의 발 앞에 밭을 판 전 재산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 요셉, 그것을 보는 순간 사도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늘 성도들을 돌보고 섬기고 위로했던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마지막 남은 자신의 전 재산을 드리는 거에요. 사도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붙여주었죠. ‘바나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권위를 오해합니다. 자리가 권위를 주는 줄 알아요. 하지만 권위는 섬김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목사임네, 장로임네, 권사임네, 집사임네 하는데 섬기지 않습니다. 직분을 주는 것은 호칭이 아니라 사역을 하라고 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요셉이 바나바라고 불려진 것은 직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불려지는 직분에 맞는 섬김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Ⅲ.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권위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사람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저는 바나바의 삶을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섬김’이고 또 하나는 ‘세움’이라는 단어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 어려운 성도들을 섬기는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에게 더 중요한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7절 보세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바나바가 누구를 사도들에게 데리고 갔다고요? 바로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아라비아 광야에서 경건훈련을 받고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위해 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제일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도 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바나바가 믿어주었습니다. 그를 신뢰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 보세요.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무슨 말입니까?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인들의 위협을 느끼고 고향으로 낙향해 무려 13년간 칩거한 인생.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사울을 안디옥교회의 동역자로 부른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도행전 13장부터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선교의 첫발을 내디딜 때 팀장이었던 바나바가 후에는 바울이라 불리게 된 사울을 팀장으로 세우며 선교의 일을 돕는 2인자로 내려앉은 것입니다. 그에게 팀장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져 그들로 하여금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 그것이 그의 인생의 소명이었고 그의 비전이었습니다. 이런 바나바에 대해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교회는 그를 예루살렘 회의에 바울과 함께 보내기를 결정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행15:25)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섬기며 돌보며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적당히 믿지, 아니 자신의 전 재산을 이웃을 위해 나눈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사람을 신뢰하고 세울 수 있지만 자신이 내려 앉으면서 까지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는 어떻게 예수를 위해 생명을 걸고,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눌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한량없는 은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생각하니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사도행전은 13장에서부터 스포트라이트가 바울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바나바가 없는 바울을 어찌 상상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목받지 못한다고 해서 어찌 그의 인생이 빛나는 인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나바처럼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 받아 그런 격려자, 그런 위로자, 그런 권위자로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빛나고 값진 인생이었다고, 우리 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존 맥스웰이 쓴 책 중에 “함께 승리하는 신뢰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트레이시라는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트레이시는 아버지에게 친구 집에서 놀고와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허락하는 조건으로 저녁식사 시간인 오후 6시 전에는 꼭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약속했던 6시가 다 되었는데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25분이 지난 후에야 트레이시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억누르며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아빠, 늦어서 미안해. 하지만 내가 막 집에 가려고 할 때 친구 인형이 부서졌어.”

“오, 그래? 그걸 같이 고치느라 늦었구나?” 그러자 트레이시라는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같이 우느라 늦었어.”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격려자로, 이런 권위자로 우리 함께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김인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