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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임하시기 위하여 (행 10: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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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기 위하여 (행 10:24-46)

이사아 7장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으로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임하시기를 원하시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인생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이 살리시는 은혜보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생활을 점검해 보면 성령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데도 성령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무시하고 성령의 지시를 거역하고 육신이 원하는 세상조건과 허욕을 위하여 불의와 타협하고 죄악을 일삼고 잘못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근심을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받은 사람은 복되고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가이사랴라고 하는 곳에 고넬료라고 하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지역이 로마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백부장인 고넬료가 그곳에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로마 사람입니다. 그런데 점령 지역은 이스라엘과 가장 인접한 가이사랴 지방입니다. 가이사랴 지역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이 고넬료는 점령군 파견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비록 망한 나라였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상당히 흠모하고 연모하고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생각, 말, 행동으로 길들여져야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거라는 간절한 신앙적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해서 되는 일도 없고 상당히 먹고 살기가 힘든 형편이었는데, 로마 군대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서 보내주는 고급스럽고 넉넉한 식량과 옷가지로 헐벗고 굶주리는 유대인들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경건하게 하나님 마음에 들어보려고 애쓰고 또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이 헐벗고 굶주릴 때에 옷가지와 좋은 음식으로 나누어 먹이는 등 사랑의 보살핌을 다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정해 놓은 기도시간인 제 구시(지금의 오후3시)에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아주 빛난 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나서 자기에게 일러주는 말이 “네가 하나님의 백성을 보살피고 구제하며 경건한 생활을 힘쓰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것을 들어주셨으니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초청하라 그가 내 말을 네게 전해 줄 것이다. 그는 피장(가죽을 가지고 생활 도구를 만드는 사람)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느니라”고 합니다. 욥바는 지금의 이스라엘 수도인 지중해 서해안에 있는 텔아비브라고 하는 도시입니다.

그는 즉시 자기 수하 중에 경건한 사람 둘을 보내어 시몬을 모셔오게 합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는데, 마침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제 육 시에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데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운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합니다. 이것을 ‘엑스타시스(Ekstasis)’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관적 계시, 즉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까 고넬료에게 보여주신 장면은 헬라어로 ‘호라마’라고 합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 광경, 출현, 환상'을 의미합니다. 큰 보자기의 네 귀퉁이를 매었다는 것은 동서남북 세상 전체를 내포하는 의미가 있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행10:4)합니다. 하나님이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있은 후에 이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드로가 의식개혁을 할 수 있도록 ‘엑스타시스’라는 방법으로 깨우쳐 주시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정통 유대인의 혈통으로, 유대인의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한 상에서 밥을 먹어도 안되고 결혼을 해도 안되며 서로 어울릴 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오로지 자기 백성만을 선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셨다는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의 의식을 깨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전개되는 시발점에 선 일꾼으로서, 하나님이 구원시키실 대상이 유대인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행10:19-20)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두 사람인데, 이들에게 베드로를 찾아가서 만나게 하신 것은 고넬료와 함께 있는 택하신 사람들도 성령을 받게 하시어서 그들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섭리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내려가서 그 두 사람을 만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를 묻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에게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고 답합니다. 이들은 로마 군대의 군인들이며 그들이 보기에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나이도 들어 볼품없어 보여 하대하며 말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영적인 가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베드로는 그날의 환상을 본 이후로 선민사상이 허물어져 이 두 사람을 청하여 잠을 자고는 이튿날 아침 욥바에서 은혜 받은 여섯 명과 함께(행11:12)가이사랴로 떠납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갔을 때 고넬료는 자기가족과 그와 가까운 사람들, 자기의 부하들을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치 하나님을 맞이하는 자세로 벌떡 일어나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하는 말이 나도 사람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말라하시기로 당신의 초청을 사양하지 않고 내가 여기에 왔다”고 하며 자신을 무슨 일로 여기로 불렀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고넬료는 자신이 본 환상과 하나님의 지시하심대로 했음을 말하며 환영의 말을 전합니다.
 
또한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은 베드로를 통하여 전달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갈망하는 마음으로 모두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34절 이하의 내용을 그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는 ‘엑시타시스’를 통하여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고 합니다.
 
36절에 구원의 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화평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담을 하나님께서 허물어뜨리셨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37~38절에서는 두 가지만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만남의 섭리는 영적 구원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목자와 죄인들을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3~26)

여기에는 음부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영혼이 음부보다도 더한 지옥에 가지 않게 하시려고 성령을 주시고, 구원시켜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교회마다 목자를 세우시고 그 목자를 통하여 고넬료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잘 들어야 합니다. 그 때 성령이 깨닫게 하심이 있는 사람은 그 즉시 회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맞아들입니다. 그 사람은 육체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영혼을 위해 하늘소망을 목적으로 살아야겠다고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영생복락이라는 영원하고 신령한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6절 이하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에 문도 열지 않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시고는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십니다. 그 모든 무리가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먹을 것을 찾으십니다.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은 그 생선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십니다. 이 장면을 두고 베드로는 본문 39~41절의 말씀을 한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것은 죄값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달아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철저히 자기 죄를 애통하고 자복하며 회개해서 예수님 이름으로 용서받을 때 비로소 죄값인 지옥형벌에서 구원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의 죄를 영원히 용서받게 해 주시기 위한 대속의 희생양으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베드로가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다고 44절에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불가항력적 은혜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되시고 자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얻게 되기를 소원했기 때문에 큰 은혜가 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의 신앙은 세상 허욕과 물질적인 것에 뜻을 두기 때문에 그 속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메마르니 심령이 메말라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형편이 풀리지 없습니다.

45~46절에 보면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고, 방언도 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말하는 것도 들으면서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는 말씀이 고넬료를 통하여 이루어진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는 듯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만족하게 하실 것이며 굶주린 심령에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게 되어 있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장재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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