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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구제할 때에 (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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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구제할 때에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1. 오베르랑 목사님은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눈 덮인 알자스 산에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디어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래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점차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집 방안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지나가던 어떤 농부가 자기 오막살이로 데려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상처는 싸매져 있었고 추위를 잊을 수 있도록 방안은?따뜻하게 불이 지펴 있었고 옷은 갈아 입혀져 있었습니다. 

주인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오베르랑 목사님은 눈 덮인 계곡에서 떨어졌으나 얼어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그는 자기를 살려준 그 집 주인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목숨을 살려주신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곳의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 때 농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저의 이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저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과 그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남에게 베푸는 적은 일에 칭찬을 받으려 하며 베푼 은혜에 보답을 받으려 할 때가 많습니다. 보답하지 않으면 배은망덕하다고 분을 삭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마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다시 말해 사람에게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목적으로 구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주의하라.’는 것은 만약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게 되면 위선(僞善)이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意識)하고 구제해야 위선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선생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많은 율법 지식을 가르치고자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자 한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마침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서 두 사람이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음식이 다 차려지자 율법 선생은 제자에게, “자, 이제 식사 기도문을 외우고 음식을 들자.”라고 말하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절반 정도 외웠을 때 제자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율법 선생은 눈을 뜨고 그를 보며 말했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나? 무슨 일이지?” 

그러나 제자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율법 선생은 제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물었습니다. 
“왜 대답이 없는가?” 
“저, 실은 기도문을 끝까지 외우지 못했습니다.” 

제자는 머리를 푹 숙이고서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한 율법 선생은 그가 이때껏 가르친 율법들을 하나 둘씩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자는 시종일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자네는 이제까지 무얼 배웠는가! 집에 가서 책도 읽지 않고 무얼 했단 말인가!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율법 선생은 소리를 쳤고, 제자는 얼굴이 땅에 붙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문을 나서고 말았습니다. 즐거워야 할 식사시간이 기도문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 율법 선생은 회당으로 가는 길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상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장사는 잘 되나요?” 
“예,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요즘 우리 마을에 떠도는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아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주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누가 무슨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글쎄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품이 아주 고운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아! 글쎄 지난번 혼자 살고 있는 대장장이가 팔이 부러져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저녁때마다 그 집에 가서 밥도 지어주고 병간호도 해주었다지 뭡니까! 그 뿐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아랫마을에 홀로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사는 부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부인이 아이들 돌보랴, 돈 벌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머니 대신 일을 해서 돈을 갖다 주었답니다.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지요.” 

상인은 침이 마르도록 율법 선생의 제자를 칭찬했고, 율법 선생은 어리벙벙한 상태로 그와 헤어져 회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문 앞에서 제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율법 선생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선행을 행한 제자가 누구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름 아닌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던 바로 그 제자였습니다. 순간 율법 선생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른 바 율법 선생들의 7가지 위선을 두고 ‘화 있을진저’ 즉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마23장) 이들에게 화를 선포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외식(外飾)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헬라어로 '탈을 쓴 배우'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일반 사람들과 구별된 복장, 소위 성직자임을 나타내는 복장을 하고 다녔는데 그 목적은 경건을 가장(?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드러내고자 온갖 치장을 다하며, 항상 상석(上席)과 상좌(上座)를 즐겨했던 것입니다. 속에는 온갖 더럽고 추잡하며 사악한 것들이 썩어 문드러진 채 악취로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치장하는 외식주의자들의 실상을 예수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무덤에 회칠했다고 무덤이 아닙니까? 회칠했어도 무덤은 여전히 부패한 시체들로 가득한 무덤에 불과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실로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내면에는 각종 불법과 부정부패가 득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거룩함을 드러내는데 혈안이 되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목적은 간단합니다. 자신의 거룩함을 빙자해서 교권 장악을 수호하고 이권을 챙겨 축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외식(外飾)하여 위선적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고 염려하는 사람에게는 받을 상이 없고 심판만을 받게 됩니다. 


2. 다음으로, 구제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는 말씀은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의 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씀은 자신이 베푼 구제를 도무지 기억하지 말고 의식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그 선행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듯이 하라는 뜻입니다. 말없이 베풀고 베푼 것에 대해 거두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 종말에 있을 심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세상 종말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모든 민족을 그 같이 구분하여 심판하리라는 것입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는 말씀으로 축복합니다. 

이에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가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한 적이 없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한 적이 없는데요. 그리고 주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한 적이 없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혀드린 적이 없는데요. 또한 주께서 병드신 때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온 적이 없었는데요.” 

그러자 임금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는 말씀으로 축복받게 된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심판을 선고하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자 왼편에 있는 자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라며 항의합니다. 

이에 임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 말씀에 왼편에 있는 자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임금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 한 왼편에 있는 자들은 영벌에,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자비를 베푼 오른편의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31-46) 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오른편에 있는 양과 왼편에 있는 염소의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은 자신들이 베푼 구제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기억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왼편에 있는 염소와 같은 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지극히 작은 것 하나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오른편에 있는 양들은 ‘은밀하게 하라.’는 말씀대로 아무도 모르게, 사람의 인정과 칭찬, 그리고 받을 상을 기대하지 않고 구제했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씀대로 자신이 베푼 구제를 도무지 기억하지 아니하고 의식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듯이 구제하고 말없이 베풀고 베푼 것에 대해 거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3. 세 번째로 지극히 작은 구제라도 소흘히 여기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9:36-42을 보겠습니다.

(행9:36-42)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욥바에 ‘다비다’, 다른 이름으로는 ‘도르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다비다”는 히브리 이름이고, 이에 대한 헬라식 이름은 “도르가”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눈이 아름답다’, ‘은혜롭고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노루, 사슴(gazelle)’ 등입니다. 

‘도르가’는 이 이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은 초대 교회 유일한 여제자였습니다. ‘다비다’는 과부로서 많은 과부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죽었을 때 “모든 과부”가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도르가’라는 이름과 같이 그의 성품이 아름다웠고, 또한 생활이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도르가는 생전에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속옷과 겉옷을 손수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것은 얼마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신명기15:10-11을 보겠습니다.

(신15:10-11)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더군다나 그녀의 이와같은 구제와 선행의 가치는 그녀의 형편을 볼 때 더욱 귀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도르가는 자식도 없은 외로운 과부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에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는 데도 가련한 이웃을 도운 것은 이웃에 대한 도르가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헌신적이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많이 가진 중에 얼마를 적선하는 것과 없는 가운데서 전체를 바치는 것과의 차이는 가난한 과부가 그녀의 생활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사실에서 족히 알 수 있습니다.(눅21:1-4) 이처럼 도르가는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심히 많은 구제와 선행을 행했던, 아름다운 일을 많이도 행한 예수님의 참 제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러 오셨고 또한 작은 자를 섬겨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와 병든 사람들은 큰 것을 추구하는 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도르가와 같이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눈에는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볼 줄 알고 또한 작은 것으로 이웃을 구제하는 도르가의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며 복된 삶인 것입니다. 도르가의 심히 많은 구제와 선행은 그녀의 도움을 받은 이웃들을 크게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과부들과 이웃들이 그녀의 죽음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 사도 베드로를 청해 왔던 것입니다. 

(행9:38-39)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도르가는 죽기에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었기에 베드로가 가까운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지체치않고 사람을 보내어 도르가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당도했을 때 그들은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를 직접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이 가진 재물이란 죽은 다음에는 그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는 죽을 때 재물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 재물이 그의 죽음을 변화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시편49:6-8을 보겠습니다.

(시49:6-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살아있는 동안 선행과 구제를 쌓은 다비다는,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참된 이웃이 함께 한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다비다는 베드로가 기도하자 곧 다시 살아났습니다. 베드로가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다비다가 다시 산 것을 보이자 온 욥바 사람이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알고 많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다비다가 얼마나 아름다운 구제와 선행으로 살았으면 온 욥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겠습니까? 그만큼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가 사람들을 감동케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제는 풍족할 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어려운 중에도 마음이 있으면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은밀한 중에 보시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은밀하게 구제를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16을 보겠습니다.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인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은 여러분들이 되시므로 도르가, 다비다처럼 부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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