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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사랑이 나를 (고후 5: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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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꼭 해야 할 일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깨닫고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조카 중에 피아노를 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 엄마가 정말 심하게 연습을 시킨다. 항상 엄마가 옆에 붙어 앉아서 연습을 시키기 때문에 조금도 한 눈을 팔거나 딴 짓을 할 수 없다. 혹 엄마가 외출을 하게 되면 녹음기를 주면서 연습하는 것을 녹음하라고 하고는 돌아와서 들어본다. 그러니까 엄마가 없다고 연습을 대충 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항상 엄마와 딸이 싸우기가 일쑤이고 아빠는 옆에서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런데도 계속 연습을 엄하게 시켜 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달라졌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피아노 연습을 한다. 어느 날 이 아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이제 음악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는가?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일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좋아서 하고 있는가? 아마도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먹고사는 일만 아니라면 그 일을 당장 그만두고 싶다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하기 싫어하지 않고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을까?

대답은 한 가지이다. 그 일에 미쳐 버리면 된다. 그 일에 푹 빠져 버리면 된다. 그 일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푹 빠져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없다. 자기가 하는 그 일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일 자체를 즐기며 일할 때에 능률도 오르게 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면 아무 재미도 없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체를 즐기고 기쁜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다.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고백했다. 공동번역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라고 했다. 예수를 믿으면 새로 지음 받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란 어떤 사람인가? “15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새로운 존재란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이다. 예수를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살고 그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산다.

바울은 주위 사람들에게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가이사랴에 갇혀 있다가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 앞에서 자신의 신앙과 사상을 변명할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어떻게 변화되었고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또 간증도 했다. 그러자 베스도 총독이 크게 소리 지르면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다. 그러자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합니다”라고 하면서 “당신을 포함해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로 완전히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던졌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로 자기 인생을 예수님께 걸게 했는가? 그는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최고의 헬라철학을 공부했다. 또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웠다. 

또 그는 정통 유대인의 혈통과 가문에서 태어났고 율법으로도 흠이 없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대로만 가면 장래가 촉망되고 활짝 열린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서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 자기가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누가 보아도 완전히 예수에 푹 빠지고 예수에 깊이 미쳐버린 사람이 되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이 그로 예수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고통과 핍박과 환난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예수를 전하러 다녔다.

그가 받은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14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은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그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멸망당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아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셨다.

그는 이 사랑을 깨달은 것이다. 이 사랑의 주님을 만난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그를 예수님께서 만나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다. 그  사랑의 바울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완전히 예수에 미치고 예수에 빠진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 

여러분은 이 사랑을 아는가? 이 사랑을 깨달았는가? 여러분도 이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예수님께서 바울을 위해서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신 것을 믿는가?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나를 위해 죽으셨다.

이 세상에 누가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나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내 죄를 지고 대신 죽을 사람이 있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었다면 그의 희생을 평생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사랑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희생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함부로 살 수 있는가?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없다. 다른 것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 최고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참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달라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런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달라진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된다.

주님의 사랑이 강권하는 믿음은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은 예수님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돌에 맞아 피를 흘리는 그의 모습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다. 그리스도로 충만하니까, 성령으로 충만하니까 매를 맞아도 아프지 않고 돌에 맞아도 그 사람이 밉지 않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기에게 돌을 던지고 자기를 죽이는 그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깊이 빠졌기에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었다. 죽음이라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죽을 수 있었다. 그는 돌이 날아오는 현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돌에 맞아도 아프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충만했던 것이다.

예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 손해를 손해로 여기지 않는다. 내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긴다. 내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믿음이 자라게 되었다면 내가 고난당하고 손해를 본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한다. 육신보다는 영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사람은 항상 기뻐한다. 범사에 감사한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도 좋다.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도 괜찮다. 사람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아도 좋다. 그런 것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기를 포기할 수 없다. 그런 일들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그런다고 내가 주님을 버리고 돌아설 수 없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주님을 사랑한다. 돌에 맞아도, 오해를 받아도,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보아도 여전히 기뻐하고 믿음을 지킨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주가 주시는 기쁨이 넘치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그것만으로 참 만족을 누리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 어떤 일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어떤 이유로도 주의 일을 하는 것을 중단할 수 없다.

주님의 사랑이 강권하는 믿음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한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의 기도이다. 그가 욕심과 정욕에 빠져서 충신 우리야의 아내와 부정을 저질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를 책망하셨다. 그러자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가 염려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시고 하나님의 눈앞에서 쫓아내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죄를 짓게 되자 당장 구원의 감사와 감격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자원하는 심령이 사라져 버렸다. 구원의 감사가 없으니까 스스로 나서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믿음이 식어졌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에 스스로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은 자원하는 심령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다. 

안산제일교회 고훈 목사님이 충현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성도들이 장로님 한 분을 그렇게 자랑하더란다. 전주대학교 총장 장로님이다. 그분은 매주 토요일이면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저녁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당 구석구석을 청소하신다고 한다. 육십이 다 되신 분이 걸레를 들고 의자를 닦고 화장실을 청소한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이른 아침 2부 예배에서부터 5부 예배까지 주보를 나눠주신다. 그래서 교인들이 우리 장로님 같은 분이 없다고 자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훈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도 자랑할 장로님이 있다고 했단다. 이 장로님은 주일이면 부엌에 들어가서 앞치마를 두르고 교인들에게 밥을 날라주고 어느 때는 설거지도 하신다. 여자 집사님들이 그것만은 제발 하시지 말라고 해서 못하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열심히 일하신다. 그랬더니 충현교회 성도들이 “그 장로님은 더 하시네요”라고 하더란다. 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고 구원의 감격이 있는 사람은 자원하는 심령이 살아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를 위해 일을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주님을 위해 일한다. 일을 맡겨주지 않아도 찾아서 일한다. 어떤 직책과 직분이 주어지지 않아도 여전히 열심히 주님을 위해 일한다. 자원하는 마음이 있고 구원의 감사와 감격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믿음이 깊은 사람인가는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사로잡혀 있는가, 얼마나 그 사랑에 감사 감격해서 주님께 끌려가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주님께 빠져 있고, 미쳐 있는 만큼 내 믿음은 깊어져 있는 것이다.

어느 인기 배우와 탤런트들이 많이 나오는 교회의 목사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들은 얼굴도 예쁘고 인기도 좋고 돈도 많고 부족한 것이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옵니까?” 그들이 놀라운 대답을 했다. “목사님, 우리는 마약 아니면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미쳐 버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예수에 미치지 않으면,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엉뚱한 것에 사로잡혀서 미쳐 버리게 된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라. 목숨을 바쳐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나도 뜨겁게 사랑하라. 그리고 주님과의 그 사랑에 빠져 버리라. 예수님께 미쳐 버리라. 세상에 헛된 일에 미치지 말고 주님의 사랑에 빠져 살라. 

어느 목사님이 장로회신학대학에 오셔서 설교하시면서 이런 간증을 했다고 한다. 사모님이 자궁암에 걸려서 세 번의 대수술을 했다. 그런데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을 투병을 하면서 살았다. 몸이 자꾸만 썩어간다. 온 집안에 암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래도 포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좋다는 약은 다 먹이고 이런 저런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가망이 없었다. 그 동안 목사님이 그렇게 사모님을 간호하면서 살림도 하면서 목회를 하다 보니 참으로 심신이 지쳤다.

어느 날 한약을 달여서 부엌에서 짜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서로가 힘든데 이제 좀 그만 하고 가지.” 그리고 약사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좀 그만 하고 가지.” 그러다가 “내가 왜 이런 몹쓸 생각을 하는가?”하고는 뉘우쳤다. 그런데 그날 그 약사발을 받고는 사모님이 세상을 떠났다. 물론 사모님이 그 약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은 마지막에 자기 혼자 생각했던 그 생각 때문에 그렇게 된 것만 같아서 얼마나 가슴을 치면서 후회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인 사람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여러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울었다. 모인 자리가 그만 다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자. 구원의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서 주를 위해 사는 새 사람이 되자. 주님의 그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고 고백하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에 따라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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