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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박함에 담긴 거룩 (딤전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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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함에 담긴 거룩 (딤전 2:8-10)

여러분, 네 잎 클로버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고,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입니다. 우리 주변에 세 잎 클로버는 참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 많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세 잎 클로버는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운을 뜻하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서 행복을 뜻하는 세 잎 클로버를 아무 생각 없이 짓밟아버립니다. 행운을 얻고 싶은 마음에 우리의 삶 주변에 널려 있는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커다란 행운이 내게 올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오늘 내 삶에 널려 있는 작은 행복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사상가인 한비자(韓非子)가 자신의 책에서 쓴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송나라에 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밭을 일구고 있는데, 토끼 한 마리가 숲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밭 한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토끼를 잡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토끼를 얻은 이 농부는 ‘토끼는 이렇게 죽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힘들게 농사짓는 것보다 이렇게 죽은 토끼를 얻어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부터는 농기구를 팽개쳐 놓고 나무 그루터기 옆에 앉아서 또 다른 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기를 바라고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끼가 매일 그렇게 나무에 부딪혀 죽습니까? 결국 그 농부는 더 이상 토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농사는 농사대로 망치고서 송나라에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삶 - 비록 특별나지 않아도 작은 그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요 바른 삶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특별한 삶에 주어지는 행운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어떤 특별한 사건 속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작은 삶 - 소박한 삶에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소박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염치’라는 말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다면 ‘소박함’입니다. 9절 전체의 말씀이 바로 이 ‘소박함’이란 단어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외모에 굉장히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입고 교회당에 오면서, 비싼 옷을 입고 왔다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땋은 머리를 했다’는 말은 자신의 재산이 많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금이나 진주로 된 각종 비싼 악서사리로 머리를 치장을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에 오면서 명품 가방을 들고, 유명 브랜드 옷을 입고, 몇 백만 원짜리 악서사리로 치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들처럼 비싼 옷을 입지 못하고, 화려하게 치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에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겉모양의 화려함이 곧 신앙의 아름다움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소박하게 입고 소박한 모습으로 사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고 값비싼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소박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소박한 삶을 훨씬 더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박한 삶에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고, 소박한 것을 통해서 거룩한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애굽 땅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아래에서 부르심을 받을 모세는 거절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강대국 애굽의 바로 왕과 싸워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킬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지요? 객관적으로 보면 바로 왕과 모세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는 당시 최강대국의 왕입니다. 온 백성들로부터 신의 아들로 추앙받던 사람입니다. 바로 왕의 말 한 마디면 못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 모세는 누구입니까? 그에게는 그 어떤 권력도 없습니다. 40년 전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명을 쓰고 애굽에서 도망 나온 사람입니다. 지금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치고 있는 양조차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장인의 양을 돌보면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러니 바로 왕과 싸우러 가야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찌 ‘예 제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나는 못 가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못 가겠다고 거절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 지팡입니다. 그 지팡이가 누구의 지팡이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위해서 특별히 제작한 지팡이입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양을 칠 때 쓰던 평범한 지팡이입니다. 양치기 목동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그런 지팡이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다니던 것이라고 해서 그 지팡이에 금으로 도금을 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지팡이라고 해서 유명한 조각가가 특별 제작한 그런 지팡이도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지팡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다니던 소박한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졌을 때에는 다른 목동이 가지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는 평범하고 소박한 지팡이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지팡이를 사용하실 때에는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게 만드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키니까 무섭게 넘실대던 홍해 물이 둘로 쫙- 갈라졌습니다.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져서 하늘로 높이 올라가자 아말렉과 싸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했습니다. 그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치자 반석이 갈라지고 그 반석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지팡이를 만들어 모세의 손에 들려주시면서 ‘이 특별한 지팡이를 가지고 가거라.’ 그렇게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가지고 다니던 아주 평범한 지팡이입니다. 아주 소박한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소박한 지팡이를 사용하셔서 놀라운 역사를 만드셨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우고 있을 때 다윗은 형들의 안부를 알아오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전쟁터에 가게되었습니다. 블레셋 군대와 싸우러 간 것이 아니라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형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부상당하진 않았는지 단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전쟁터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에 간 다윗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때문입니다. 골리앗이 사신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멸시하는 말로 고래고래 고함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골리앗의 그런 고함 소리를 들은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가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내노라 하는 장수들도 벌벌 떨고 있는데, 어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가겠다고 했을 때 사울 왕은 다윗에 자신의 군복을 입혀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쓰던 놋 투구를 다리의 머리에 씌워주고 자신의 갑옷을 벗어 다윗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쓰던 칼을 다윗의 손에 들려줍니다. 

여러분, 사울 왕이 다윗에게 입혀준 이 모든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왕이 입던 것입니다. 일반 병사가 입던 것을 준 것이 아닙니다. 왕이 입던 군복이요, 왕이 쓰던 투구요, 왕이 입던 갑옷입니다. 왕이 사용하던 칼을 주었습니다. 왕을 위해 특별하게 만든 군복이요 투구요 갑옷이요 칼입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가는 다윗에게 사울 왕은 아주 특별한 것들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것을 입고 골리앗과 싸우러 갔습니까? 다윗은 그런 것 다 벗어버렸습니다. 그냥 평상시 입던 옷을 입고 골리앗과 싸우러갔습니다. 가져간 무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왕이 차던 칼이 아닙니다. 평소 양을 칠 때 쓰던 막대기와 물매, 그리고 그냥 땅에서 주운 돌맹이 다섯 개가 전부였습니다. 아주 평범한 무기입니다. 아니 무기라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평소 양을 치면서 가지고 다니던 아주 평범한 것들입니다. 아주 소박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그것으로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왕이 차고 있던 화려한 칼로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금으로 도금한 화려한 화살로 골리앗을 죽인 것도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것입니다. 평소 양을 칠 때 쓰던 바로 그 소박한 것들을 사용하여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평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셔서 세상에 참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물맷돌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던 골리앗을 죽이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주신 후에 “너는 이것을 가지고 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주 소박한 것,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아주 소박한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화려한 궁궐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왕과 온 신하들의 축하와 축복 속에서 떠들썩하게 태어나지도 않으셨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고 그분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습니까? 

예수님은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살던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셨습니다. 화려한 예루살렘도 아닙니다. 천시 받고 멸시 받던 갈릴리 작은 동네입니다. 왕궁이나 어떤 권세 있는 집안이나 생활하신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살고 있던 목수의 집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특별한 교재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그것들이 살기 위해서 곡식을 심더냐, 추수를 하더냐?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르시지 않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데 저렇게 아름답고 예쁜 꽃을 피우지 않느냐?”(마 6:26, 28) 

공중에 나는 새, 들에 핀 백합화 - 우리가 평소에 흔히 보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모습을 통해서, 작은 겨자씨 한 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천국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아주 소박한 것들 속에서 천국의 진리를 찾아내어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잡수실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시고 성찬을 행하셨습니다. 그 만찬은 유월절 만찬입니다. 세데르(seder)라고 하는 유월절 만찬에는 보통 양고기와 쓴 나물,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는 떡이 주된 음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중에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이것으로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에서 가장 특별한 음식은 당연히 양고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양고기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 그 만찬에 양고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양고기가 아닌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성찬을 행하셨습니다. 왜 양고기를 사용하지 않으셨을까요? 양고기가 유월절 만찬의 주 메뉴인데 말입니다. 양고기는 특별한 메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 백성들이 유월절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인 양고기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범한 -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음식인 떡과 포도주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성찬을 행하셨습니다. 아주 소박한 음식에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십자가를 담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통해서 거룩하심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마 5:13)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값비싼 진주나 다이아몬드에 비유하지 않으셨습니다. 소금은 아주 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금이 대부분 바닷물을 증류해서 만들어지지만, 이스라엘은 소금돌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돌맹이 같은데 그 안에 소금이 섞여 있습니다. 소금기가 필요한 양들은 들에 널려져 있는 이 암염덩어리를 핥아먹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3절에서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암염덩어리를 양이나 짐승들이 핥아먹고 그 소금기가 다 빠져버리면 다른 돌맹이들처럼 밖에 버리워지는 것입니다.
  
이 소금 덩어리는 산이나 들녘에 널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 ‘산이나 들녘에 널려 있는 그 흔한 소금덩어리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돈을 주고 사야하는 값진 진주나 다이아몬드가 아닙니다. 부자들이 소유하고서 자신의 부와 사치를 뽐내기 위해서 특별하게 마련한 그런 보물들이 아닙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도, 심지어는 양이나 짐승들도 언제 어디서든지 쉽게 구할 수 있는 소금덩어리라는 것입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하고 소박한 삶이지만, 그 속에 맛을 잃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세상을 맛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만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만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빛이 되고 세상을 살맛나게 만드는 사람은 대통령이나 어떤 큰 기업체의 사장님이나 대학 교수님이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암염덩어리에 소금기만 남아 있으면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인다움만 간직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에 향기 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자리가 커야만 커다란 향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비싸고 화려한 것들로 치장된 삶이어야만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평범하고 소박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암염덩어리에 소금기를 간직하듯, 우리 안에 거룩함을 간직하기만 하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자들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어떤 손이 거룩한 손입니까?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손이 거룩한 손입니까? 몇 십만 원짜리 고급 향수를 뿌린 손이 거룩한 손입니까?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이 손 잡아 주시라’고 도움을 간구하며 내놓는 손이 거룩한 손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손’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림> 독일의 유명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뒤러는 가나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마음껏 그림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화가의 꿈을 안고 도시로 나왔지만 돈이 없어 그림공부를 할 수가 없어 고민하던 뒤러는 같은 처지에 놓인 한스라는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아주 친한 친구가 된 한스가 어느 날 뒤러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 둘이 돈을 벌어가면서 그림공부를 할 수가 없으니까, 네가 먼저 그림을 공부해라. 내가 돈을 벌어 너를 돕겠다. 그리고 네가 성공해서 그림이 잘 팔리면 그 돈으로 내가 공부를 할게.” 뒤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한스의 진실된 마음에 감동을 받고 먼저 그림공부를 하게 됩니다. 

한스는 온갖 고생을 하며 뒤러가 열심히 그림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돈을 벌었습니다. 뒤러가 학교를 마칠 때 즈음에 뒤러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한스가 공부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한스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한스는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 친구 뒤러가 공부를 마치고 그림이 잘 팔리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제 손은 노동으로 인해 마디가 뒤틀려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지만, 뒤러는 앞으로도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몰래 이 기도를 듣고 있던 뒤러는 한스의 기도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 우정에 감명을 받은 뒤러가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노동을 하고 또 위해서 기도해 준 한스의 그 기도하는 손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손이라고 생각하고 그 한스의 손을 그렸습니다. 그게 바로 이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여러분, 비싼 악서사리로 치장한 손이 거룩한 손이 아닙니다. 돈 많이 벌어오는 손이 거룩한 손이 아닙니다. 노동으로 뒤틀려졌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손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손이요 거룩한 손이니다. 그 소박한 손에 하나님은 거룩을 담아놓으셨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내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거룩한 손을 들어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고, 거룩한 손을 들어 직장을 위해 기도하시고, 거룩한 손을 들어 이웃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소박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들린 그 손에 하나님은 거룩함의 향기를 듬북 부어주실 것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소박함은 작은 선행으로 그 향기를 나타낸다는 말씀입니다. 부자임을 드러내는 땋은 머리가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을 입었다고 거룩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작지만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 공경하는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겉을 치장하려 하지 말고 선을 행함으로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소박한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거룩을 아는 사람입니다. 소박한 것은 작은 것입니다. 소박한 것은 평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거룩을 담아 놓으셨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하기 전에 지금의 작고 소박한 삶 속에 담긴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큰 은혜를 꿈꾸기 전에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소박한 은혜에 감사함으로 거룩을 배워가야 합니다. 

우리는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할지 모르지만, 큰 것이 거룩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주 소박한 것들 속에 당신의 거룩을 담아 놓으셨습니다. 지금의 소박한 삶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내 소박함이 모세의 손에 들려주신 지팡이일 수도 있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의 물매돌일 수도 있습니다. 소박한 것을 사랑하시고 소박한 것을 사용하신 하나님께서 오늘은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결코 위대하지 않는 나를 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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