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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운 마음을 주소서 (왕상 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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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마음을 주소서 (왕상 3:4-12)

여러분, 이런 말 들어보셨지요? 남자는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엄마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결혼해서는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운전할 때에는 네비게이션 안에 있는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현명한 남자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주장대로 살아가는 강한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남자입니다. 역사적으로 여자의 말을 잘 듣고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시대 성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許琮)이라는 분입니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종침교(琮琛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리는 없어지고 다리표지석만 남아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조선 성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許琮)과 허침(許琛) 형제가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 일화가 얽혀 있는 경복궁 입구 다리터.” 

그 일화는 이렇습니다. 당시 성종은 연산군을 낳은 왕후 윤씨를 폐비시키고 결국 사약을 내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왕후 윤씨를 폐비시키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리던 날, 허종의 누이가 아침 일찍 어전으로 가는 허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어전회의에 나가면 훗날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며, ‘어떻게 해서든지 어전회의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누이의 말을 들은 허종은 누이의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전으로 가던 도중 궁궐로 들어가기 전에 이 종침교에서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것을 핑계 삼아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허종이 참석하지 못한 그 어전회의에서 왕후 윤씨를 폐비시키기로 결정되었고, 폐비가 된 윤씨는 다음해에 사약을 받아 죽게 됩니다. 후에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이 왕이 되어 자기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당시의 신하들을 다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그것을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합니다. 

그런데 왕후 윤시를 폐비시키기로 결정한 그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허종과 그 가족들은 그 참혹한 죽음의 위기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허종이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침으로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화를 면했다고 해서, 그 다리를 허종 허침 형제의 이름을 따서 종침교(琮琛橋)라고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때로 누군가를 말을 귀담아 잘 들으면 화를 면하고 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혜가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지혜는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데서 시작됩니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이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준 잠언에서 몇 구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잘 들어보시고 공통적으로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잠언 1:5)
-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언 12:15)
-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언 13:1)
- “교만에서는 다툼이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 13:10)
-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잠언 23:19)
  
여러분, 벌써 눈치 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엇이 지혜입니까?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들어야 지혜가 생겨나고 잘 들어야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잠언에 나오는 몇 구절만 읽었지만, 이 외에도 잠언 뿐만 아니라 성경 다른 곳에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이고, 참 부러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내게 구하라.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마.”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 종종 해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좋은 신앙을 물려받은 솔로몬은 아직 성전이 건축되지 않은 때이기에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1천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달라고 한 ‘지혜로운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달라고 하지 않고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9절에 나오는 ‘지혜로운 마음’이란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듣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번역한 개역개정판에서는 본문의 ‘지혜로운 마음’을 ‘듣는 마음’으로 번역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무얼 줄까?’ 라고 물으실 때에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까?’라고 물으실 때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습니까? 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재판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솔로몬은 스스로를 ‘작은 아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솔로몬이 몇 살에 왕이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솔로몬이 왕이 될 때가 20세 전후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이 스무 살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린 요시야 왕은 불과 8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지 12년 되는 해에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 나이가 20살이었습니다. 20살이면 전국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겠다고 결단할 수 있는 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20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또 백성들 앞에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 귀한 왕의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마음(듣는 마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솔로몬이 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바로 뒤인 15절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얼 줄까?’ 라고 물으시고, 솔로몬이 ‘지혜로운 마음(듣는 마음)을 달라’고 말한 이 사건이 꿈이었다는 것은 강조합니까? 

저는 이 말씀을 놓고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솔로몬에게 정말 중요한 이 사건을 말하면서 왜 꿈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솔로몬은 20살 정도에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었을 때 솔로몬의 마음은 굉장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특별히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신은 큰 아들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왕위는 큰 아들이 물려받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큰 아들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3장에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으로 있을 때 이미 6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솔로몬이 때어나기도 전입니다. 물론 그 6명 가운데 큰 아들 암논과 셋째 아들 압살롬은 먼저 죽었습니다. 형 둘이 죽었다 해도 솔로몬에게는 최소한 4명의 형이 있었습니다. 4명의 형을 제쳐두고 솔로몬이 왕이 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왕이 된다고 하니까 그 4명의 형 가운데 하나인 아도니아가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나섰다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비록 아버지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긴 했지만, 왕궁 내에서도 형들을 제쳐두고 거의 막내 뻘인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솔로몬은 더 좋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심했을 것입니다. 형 아도니아를 죽여가면서 왕위에 올랐기에 백성들로부터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이 잘 된 일이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게 여간 심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부담감은 아버지 다윗으로 인한 부담감입니다. 아버지 다윗은 정말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고 백성들에게도 정말 좋은 왕이었고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건 솔로몬이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 보면 솔로몬이 아버지 이야기를 먼저 꺼냅니다. “내 아버지 다윗은 성실하고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긴 왕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 뒤를 이어 왕이 된 나는 너무 부족합니다. 나는 아이에 불과합니다.” 

또 오늘 본문 바로 이어 14절에서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칭찬하시면서 다윗처럼만 하면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참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기에, 아버지처럼 좋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을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부담감 때문에 솔로몬은 왕이 되면서 늘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이 잘된 일’이라고 평가해줄까? 그런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좋은 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요? 어떤 일을 골똘히 생각하면 그것이 꿈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목사님들도 그럴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꿈에 설교하는 꿈을 자주 꿉니다. 어떤 때에는 정말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러면 꿈에서 깨어나서도 꿈에서 했던 설교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설교 준비가 잘 안 되었을 때에는 불안한 꿈을 꿉니다. 예배 시간이 다 되어서 예배를 드리러 가야하는데 설교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서 가슴이 쿵쾅거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꿈을 꾸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예배 시간이 다 되었는데, 넥타이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 헤매기도 하고, 바쁘게 준비해서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갔는데 바지를 안 입고 강단에 올라가기도 하고, 벼라별 꿈을 다 꿉니다. 왜요? 늘 설교를 생각하다보니까 그게 부담이 되어, 불안한 마음에 그런 꿈을 꾸는 것입니다.
  
아마도 장사하는 분들은 어느 날은 벌떼 같이 손님이 찾아오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장사가 안 돼서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꿈을 꾸기도 할 것입니다. 

골똘하게 생각하면 그것이 꿈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솔로몬도 그랬을 것입니다. 늘 ‘어떻게 하면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지혜로운 왕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네게 무엇을 줄꼬?” 라고 물으시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지혜로운 마음(듣는 마음)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요? 평소에 늘 ‘지혜로운 마음(듣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지혜로운 마음(듣는 마음)을 달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평소에 무엇을 많이 생각하십니까?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라고 물으시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까? 지금은 ‘솔로몬처럼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그래야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과 꿈속에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꿈속에서도 ‘이걸 주시라’고 말할 정도로 그것에 깊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올바른 것을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간구를 들으시고는 마음이 너무너무 흡족해 하셨습니다. 

11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원수들을 제거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다’고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구하지도 않은 부귀영화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솔로몬은 꿈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구할 만큼 평소에 그것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꿈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평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믿는 자답게 사는 것인지,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꿈속에서도 그걸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솔로몬에게는 지혜로운 마음(듣는 마음)이 그렇게 중요했겠습니까? 솔로몬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듣는 마음이야말로 지혜로운 마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잠언에서 보았듯이, 솔로몬은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듣는 마음이야말로 지혜로운 마음이고, 듣는 마음을 갖는 것이 지혜를 얻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잘 들어야 합니다. 두 가지를 잘 들어야 지혜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똑똑한 척 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아는 것처럼 보여도 어떻게 하나님과 비견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11: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요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인간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25)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궁무진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가 어디에 담겨져 있습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은 생명의 길이 어디인지 모르고 방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말씀은 생명이 어디에 있고, 어느 길로 가야 그 생명을 얻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을 참된 행복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해 헤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말씀은 이것이 행복이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혜를 얻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혜는 들음에서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지혜가 생겨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잘 들어야 할 것은 사람들의 소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잘 듣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 것은 백성들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들어야 좋은 왕이 됩니다. 그것을 솔로몬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소리를 잘 듣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막아버린 왕은 좋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솔로몬 왕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그랬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을 찾아와서 ‘솔로몬 왕 때에 우리가 노역을 너무 많이 했고, 세금도 너무 과중했으니 그것들을 좀 감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더욱 왕을 잘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 왕은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 버거운 노역을 시켰고,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12개 지파 가운데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를 제외한 10개 지파가 여로보암으로 왕을 삼고서 르호보암 왕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둘로 나눠지고 맙니다. 백성들의 말을 듣지 않다가 나라가 분열되는 큰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들어야 하지만, 사람들의 말도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듣되 좋은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를 잘못된 길로 유혹하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때로는 듣지 싫은 소리일지라도 들어야 합니다. 그게 나에게 유익된 것이라면 말입니다. 들어야 할 것을 잘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 

잘 듣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어느 글에서 이런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영어 동사 가운데 listen이란 말이 있습니다. 듣는다는 동사입니다. listen이란 6개의 철자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silent이란 단어입니다. 똑같은 철자 6개인데 조합만 달리하면 listen(듣는다)이 될 수도 있고, silent(침묵)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침묵과 듣는다는 것은 형제와 같습니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침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할 때에도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자주 하나님 앞에 침묵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침묵하지 못하니까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떤 큰 문제가 내 앞에 놓였거들랑 하나님께 하소연한다고 내 소리만 내지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왜 내게 이런 시련과 고난을 주시는지,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지 조용히 들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소리가 너무 크니까 하나님의 소리가 내 귀에 들려지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똑똑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많이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무게가 없어 보입니다. 
  
여러분, 말을 조금씩 더 아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안에 하늘의 지혜가 쌓입니다. 조금 더 침묵하는 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고, 다른 사람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집니다.
  
말이 많은 곳에서는 오해가 생겨납니다. 갈등이 일어납니다. 싸움이 생깁니다. 말을 많이 하는데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지, 듣고 침묵하는 것에서는 문제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들었어도 말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문제가 일어났어도 모두가 침묵해 버리면 그 문제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내 사라져버립니다. 말을 많이 하고난 다음에 후회하는 경우는 많아도, 침묵한 다음에 후회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들으라는 말씀은 많이 하지만, 말하라는 말씀은 거의 하지 않으십니다. 말 잘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지 않고, 잘 듣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야고보서 1:19)는 말씀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혜이고, 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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