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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 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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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 2:7-10)


제가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학교에 다닐 적에는 요즘 청년들이나 학생들이 특히 인터넷에서 흔히 쓰는 온갖 상스러운 표현이나 욕들을 제 주변에서 직접 듣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욕을 남에게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적은 딱 한 번 있었는데, 바로 대학교 다닐 때에 문무대에 입소해서 열흘 동안 기초군사훈련을 받던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훈련은 견딜 만했는데, 유격훈련을 받던 날 지난 사춘기와 청소년기를 통과해 오던 내내 20년 가까이 지켜왔던 저의 '순결한 입술'이 그만 더럽혀지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격훈련의 오전 코스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끝난 후에 오후 훈련을 위해 다시 집결했을 때였습니다. 
조교들 중에서 최고 선임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 훈련생들을 향해서 "여러분, 식사 잘 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물론 "예!" 하고 우리 딴에는 크고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교는 갑자기 안색을 확 바꾸면서 "방금 점심을 먹었으면서도 복창 소리가 이것밖에 안 나와?"라고 소리를 꽥 지르더니, 자기 좌우에 있는 다른 조교들에게 "야, 돌려!"라고 짤막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물론 우리 훈련생들은 그 '돌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막상 오후 훈련이 시작되자 그 '돌린다'는 말이 그 얼마나 끔찍한 저주의 명령이었는지를 곧 알게 되었습니다. 
유격훈련장의 모든 조교들이 오전과는 전혀 딴판의 사람들이 되어서 PT체조를 비롯하여 온갖 기합을 가지고 우리 훈련생들을 숨 돌릴 틈도 없이 말 그대로 '돌리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정확하게 어떤 코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어느 유격코스의 한 조교가 우리에게 얼마나 지독하게 기합을 주는지, 저는 난생 처음으로 '눈물 콧물'을 비롯하여 하여튼 제 몸에서 물이란 물은 다 새어나오는 듯한 고통을 받게 되면서 입에서는 절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신음과 비명이 최고한도에 이르게 된 어느 순간 제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쌍시옷'으로 시작되는 욕이 그만 튀어나와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조교의 귀에는 들리지 않게, 저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였지만 어쨌든 그때의 욕설이 제 입에서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처음이자 마지막'의 욕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군사훈련이라는 것은 사실상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훈련일 뿐인데도 그처럼 어릴 때부터 '모범생'으로 칭찬이 자자했던(?) 석기현이라는 사람까지 욕을 하게 만들었다면, 진짜 고통스럽고 무서운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더구나 욥처럼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환난들, 최악의 시련들만 다 모아서 한 몸에 받게 되는 경우라면 정말 무의식중에라도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욥에게 가장 가까이 있던 그의 아내가 바로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겠습니까?
신자로 하여금 '이만큼 극심한 환난이라면 하나님을 한번 쯤 욕해도 괜찮다. 이런 정도의 지독한 시련을 당하게 되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경우가 정말 있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그런 경우란 결코 없습니다. 
이 시간 저는 성령께서 욥의 고백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 기독신자들은 왜 그 어떤 최악의 상황을 맞이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생사화복 전체를 통하여 항상 선을 행하시는 절대주권자인 까닭에 신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오직 영광만 돌려야 합니다. 

본문 7절과 8절에 기록하기를 "7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앞의 1장에서 욥은 정말 끔찍한 재앙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1장에서 욥에게 일어난 일이 최악이며,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극한에 이미 도달했다고 생각한 것은 오로지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이 2장에 오면, 그런 욥에게,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욥에게 그야말로 마지막 치명타와 같은 시련이 또 덮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온 몸, 즉 "그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난" 것이었습니다. 

이 "악창"이란 구약에서는 문둥병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피부병입니다. 
욥기 전체를 보면 욥이 자신이 걸리게 된 악창의 증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호소하고 있는 말들이 나옵니다. 
우선 이 2장에서 보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종기와 가려움증을 동반하는 것이며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게 할 정도로 피부를 상하게 만드는 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3장 이하에서 욥이 탄식을 하면서 식욕 저하, 기력 상실, 호흡 곤란, 체중 감소 등을 비롯해서 종기에 벌레가 생기고 입에서는 냄새가 나고 몸에서 열이 나고 피부색이 검어지면서 벗겨지는 등 온갖 고통스러운 증상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증상들을 미루어 볼 때에 욥이 걸리게 된 '악창'은 현대의학에서 '상피병'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이것은 모기로부터 감염이 되어 발병하는데 나중에는 다리의 피부가 단단하고 두꺼워져서 코끼리다리처럼 굵어진다고 해서 '상피병'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모기로 인하여 혈액에 기생충이 기생하면서 오한, 발열, 종창, 발작 등등을 반복하면서 점차 피부가 두꺼워지는데, 열대지방 특히 중앙아메리카나 인도와 아라비아 등에서 많이 발병한다고 하니 욥이 살았던 '동방'과 지역적으로도 일치합니다. 
이 병은 오늘날의 의학기술로도 난치병이어서 정형수술이 요구될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욥이 걸린 악창이 정확하게 이 병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가 최악의 피부병으로 인하여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 것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애통과 비탄'에 빠지게 되었을 때 또는 '간절한 회개'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강한 슬픔'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었다"는 것은 종기의 발진을 어느 정도 제거해 주는 효과도 있다는 의학적 해석도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온 몸 구석구석을 괴롭히는 가려움증 때문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 있지만 옛날 중국의 황제가 살던 성을 '자금성(紫禁城)'이라고 불렀는데, 영어로는 그냥 'Forbidden City' 즉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성'이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그 자금성에 함부로 무단침입하다가 체포되는 사람에게는 그의 살갗을 백 번인지 천 번인지 도려내면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형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 중에 '피부가 느끼는 고통'이 가장 극심한 것을 이용한 처형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욥 역시 지금 이 '악창'으로 인하여 그의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온 몸의 감각기관 구석구석이 다 '고통'이라는 감각을 최고조로 느끼면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재산을 다 잃고 자녀까지 한날한시에 다 잃은 것은 정신적인 고통을 가져다주었지만, 이제는 거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악의 육체적 고통까지 당하게 되었으니 그 참혹한 현실을 도대체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이지 욥은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 순간순간이 실로 끔찍한 고문 그 자체나 다름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단은 이번만은 욥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하게 될 것이라고 실로 자신만만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욥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단이 아니라 그 누가 보아도 절로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만 보이는 최악의 시련 속에서 욥의 입에서는 과연 어떤 말이 나왔습니까?
이어지는 9절과 10절에 "9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욥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사실 아내란 남편이 힘들어 할 때에 끝까지 위로해 주어야 할 마지막 한 사람입니다. 
가장 좋은 배우자란 우리 기독신자들이 결혼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는 그대로 '기쁠 때'뿐 아니라 '슬플 때', '건강할 때'뿐 아니라 '병들 때', '형통할 때'뿐 아니라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서로가 끝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제일 가까운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아내는 그런 진정한 반려자가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남편 욥을 향하여 "당신이 요 모양 요 꼴을 당하고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겠다는 말이오? 하나님을 저주나 하고 당장 죽어 버려라."고 비수처럼 날카로운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하나님을 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을 의미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걸었던 모든 소망을 완전히 끊어 버림을 의미합니다. 
"죽으라"는 말은 '자살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이제는 어차피 죽을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욕이라도 한번 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라고 말하는 것은 곧 욥으로 하여금 자기파멸을 재촉하는 최악의 행위를 권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욥의 아내도 욥이 시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같은 신앙인이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는 그 믿음을 다 팽개쳐 버렸을 뿐 아니라 끝까지 신앙을 지키려는 남편까지도 오히려 부추겼습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라고 한 것처럼 자신의 불신앙에 대하여 남편도 공범을 만들고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심리가 발동하면서 스스로 '사단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불신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욥의 아내의 말은 전혀 악담이라고 할 수 없는, 그 누구라도 당연히 동의할 내용이었습니다. 
아니 신자라 할지라도, 소위 기복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따위 하나님을 믿어서 뭐하나?'라는 원망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아내로부터 그처럼 '앙칼지게 바가지 긁는 소리'를 듣게 된 욥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우선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라고 지극히 점잖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욥이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곧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의 위대하심을 경외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면서 현재 당하는 시련에 대해서만 조급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자기 아내를 향하여 "이 정신 나간 여자야!"라고 직접 야단치지 않고 "당신은 마치 어리석은 여자들이나 할 말을 하고 있소."라고 아주 부드럽게 꾸짖었던 것입니다. 
남편들 가운데 자기 아내가 무엇을 조금 잘못하면 일단 화부터 내는 버릇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특히 저와 같은 경상도 남자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아내가 콜록거리면서 감기 증세를 보이면 "여보, 내가 약 지어 올 테니까 먹고 좀 누워 쉬어요."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경상도 남편은 제가 아는 한 한 명도 없습니다. 
"거 이 추운 날 촐랑거리면서 싸돌아다니니까 그래 안 됐나?"라고 소리 한 번 꽥 지르는 것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욥도 만약 경상도 남자였다면 "이기 죽을라꼬 환장했나? 즈거 남편이 이렇게 아파 죽겠는데 무슨 그따위 못돼묵은 소리를 하고 있노?"라고 고래고래 야단쳤을 것이 틀림없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지금 온 몸을 기와 조각으로 긁고 있는 극심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짜증 비슷한 소리조차 내지 않고 지극히 온유하게 "여보, 당신이 그렇게 불신자들이나 할 말을 해서는 안 되지."라고 실로 가정의 제사장다운 면모를 발휘했던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욥의 아내는 자기 남편의 그런 언행을 보고 아마 나중에라도 크게 부끄러워하며 회개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욥은 그의 아내와 이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곤경을 돌이켜 주신 후에 바로 그 아내와 함께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고서 함께 행복하게 여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욥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자기 아내조차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원망은커녕 자기의 신앙을 '순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실로 위대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욥이 '복을 주시는 하나님'뿐 아니라 '재앙도 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 곳곳에서 명백히 선포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예를 들자면, 신명기 11장 14절에서 "14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라고 축복의 하나님을 선포한 바로 직후에 곧 이어지는 17절에서는 "17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라는 경고의 말씀이 따라옵니다. 
  
시편 94편 12절에서도 "12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때로는 징벌로써 당신의 백성을 훈계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곧 바로 이어지는 13절에서 "13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라고 그 연단을 받아들이는 성도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바로 이처럼 '복도 주시고 재앙도 내리시는' 하나님, '구원도 베푸시지만 그런 까닭에 심판도 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진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취하시는 것' 역시 당연히 하나님께 속한 권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욥이 '기복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욥의 모든 소유물을 취하여 버리시면' 그가 반드시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장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면 재앙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라는 이 결정적인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의 믿음이라는 것이 결코 그처럼 '값싼 기복신앙'이 아님을 명백히 나타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 - 이 말 모르는 기독교인, 이 말 할 줄 모르는 기독교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재앙도 받는다.' - 이 말 뜻을 아는 기독교인이나 이런 신앙을 고백할 줄 아는 기독교인은 그 하고많아 보이는 교인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아도 욥을 통해 고백된 이 말은 정말 바른 진리의 정수, '보석 중의 보석'과도 같은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대로 복을 주시는 절대주권자이신 것이 분명하다면, 그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뜻대로 재앙도 내리실 권한도 가지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복은 마음대로 주실 수 있지만 재앙은 당신 뜻대로 못하는, 반신불구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정말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그런 '반쪽 하나님'으로만 믿고 있습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만 아는 까닭에 약간의 시련만 닥쳐도 금세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그저 자기에게 '좋은 일만 벌어지게 해 주기 위한 심부름꾼' 정도로 여기고 있지,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생사화복 전부를 다 마음대로 주장하시는 절대주권자로 모실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이시라면 무조건 만사형통으로만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야지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징계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으니 당연히 하나님을 '심판주'로 두려워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네 논리로는 당연한 듯이 보이겠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기복주의 신자들이 그런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평소에 이것저것 도와주고 잘해 줄 때는 늘 '좋아만' 하다가 딱 한 번 어쩌다 안 도와주었다고 원망하는 사람을 만날 때 여러분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뭐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이 있나?'라고, 정말 기분 나쁘고 밉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그런 무례를 태연히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욕'은 바로 '원망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유격훈련을 받으면서 절로 욕이 나왔던 것은 바로 그처럼 지독한 기합을 주는 조교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 주시는 하나님'께만 감사드리고 '재앙도 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욕하는 행동'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가 믿는 하나님은 복뿐 아니라 재앙까지도 오직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시며 마음대로 주장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십니다. 
또한 그런 가운데서도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 즉 생사화복 전체를 다 합력하여 결과적으로는 선을 이루시는, 실로 오묘한 섭리의 주권자이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 절대주권의 신앙을 깨닫고 믿고 또한 고백하고 의지함으로써, 복을 받을 때뿐 아니라 환난과 재앙이 닥칠 때에도 끝까지 낙심하거나 범죄하지 아니하고, 그 하나님께서 반드시 베풀어 주시는 욥의 복, '이전보다 나중이 더 창대하게 되는 축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의 선배 칼빈도 바로 그런 생을 끝까지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재물은 원래 없었으니까 잃을 것도 없었겠지만 나머지는 다 욥과 똑같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성경 주석을 읽고 천주교로부터 개종한 어떤 과부와 늦깎이 결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들이 다 어릴 때 죽고 말았으며 그의 아내 역시 결혼 후 9년밖에 더 살지 못하고 일찍 소천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칼빈 자신 역시 평소에 몸이 아주 약해서 온갖 질병을 달고 다니다시피 했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제일 처음에 교회개혁운동을 시작했던 제네바 시의 방탕파 시민들로부터 테러의 협박을 받고 일시적으로 쫓겨났던 것을 위시해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칼빈은 일생을 통해서 수많은 책들을 쓰고 매주 여러 번씩의 설교를 하면서 개혁주의 신앙의 진리를 변호했고, 그 결과 그가 가르친 제네바 아카데미 출신의 제자들은 유럽 각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를 당하는 일들이 연이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칼빈 자신은 1560년대 그가 막 50세를 넘겼을 즈음부터 병상에 눕게 되었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 채 몇 년을 투병하다가 결국 55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무덤은 원래는 묘비도 없었고 얼마나 약소하고 초라하기까지 했던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찾기조차 어려웠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칼빈은 무슨 행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만으로 그의 일생을 다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칼빈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자녀들과 아내까지 다 일찍 잃고 자신의 육신 역시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병상에서 죽게 된 그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말이 과연 어떤 말이었을 것 같습니까?
  
사실상 욥이 당한 고난을 고스란히 겪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욥과는 달리 나중에라도 그 곤경에서 돌이키게 되는 축복을 금세에서는 받지 못했던 칼빈이 남긴 마지막 말은 바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로마서 8장 18절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인생의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도 찬송을 드렸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그 '현재의 고난'과 비교도 될 수 없는 '지극한 영광'을 장차 주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끝까지 '입술로도 범죄치 아니 하고' 오로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지켰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주권과 그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우리 개혁주의 신앙의 선배와 그 후배된 신자들의 심령에서 고백되는 실로 아름다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당연히 '원망'이 나와야 할 일 같은데도 참된 신앙인의 입에서는 오히려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욕'이 나와야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우리 개혁주의 신자는 '욕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진심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만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인자하신 하늘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녀라면 그 하나님께 욕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 될 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잘못 될 때에도 하나님께는 오직 감사와 영광만을 돌림으로써 그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만을 즐거워하는 성도'의 '나중'을 '현재'의 고난과는 족히 비교도 될 수 없는 최고의 영광으로 채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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