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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단비를 기다리며 (신 11: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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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를 기다리며 (신 11:13-21)


[당신들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명하는 그의 명령들을 착실히 듣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 주님께서 당신들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 따라 내려 주셔서, 당신들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거두게 하실 것이며, 들에는 당신들의 가축이 먹을 풀을 자라게 하여 주실 것이며, 그리하여 당신들은 배불리 먹고 살 것입니다. 당신들은, 유혹을 받고 마음이 변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그 신들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당신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면,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진노하셔서,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으실 것이며, 당신들은 밭에서 아무것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주님께서 주신 기름진 땅에서도 순식간에 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내가 한 이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두고, 또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또 이 말을 당신들 자녀에게 가르치며, 당신들이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당신들의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들 조상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당신들과 당신들 자손이 오래오래 살 것입니다. 당신들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 길이길이 삶을 누릴 것입니다.]

• 들뜬 마음 내려놓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제부터 곡우穀雨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곡우는 봄비가 내려 곡식을 기름지게 하는 계절이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이미 농부들은 볍씨 소독을 하고, 못자리를 준비하느라 분주합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봄!’ 하면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부터 생각하지만 농부들의 마음은 다릅니다. 이 계절에 주시는 은총을 잘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11세기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영국교회의 수장인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일했던 안셀름(1033-1109)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날입니다. 젊은 날에 그가 쓴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라는 책을 읽으며 속죄의 교리와 씨름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중에 그의 책을 뒤적이다가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자 이제, 미소한 인간이여, 네가 몰두해 있는 [온갖] 일을 잠깐 뒤로 하라, 잠시 동안 너의 혼란스러운 생각들로부터 너 자신을 감추어라. 이제 무거운 근심을 떨쳐버리고, 그리고 너의 힘겨운 임무들을 내려놓아라. 잠깐 하나님께 마음을 비우고 잠깐 그 분 안에서 안식을 취하라. 네 영혼의 <골방에 들어가라>(마6:6),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배제하라…그리고 문을 닫고 그를 찾아라. 내 온 마음아, 이제 말하라(마6:6), 이제 하느님께 말하라: <제가 당신 얼굴을 찾습니다, 주님, 당신 얼굴을 제가 찾습니다.>(시편26:8 /27:8)"(캔터베리의 안셀무스/박승찬 옮김,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아카넷, 175쪽)

그는 해야 할 일과,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런 저런 생각과, 무거운 근심을 내려놓고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 후에 온 맘으로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고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여 읽다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현존 앞에 나아가 엎드리는 것임을 다시 절감했습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를 힘겹게 건넌 선원이 마침내 항구에 닻을 내리는 것처럼,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 안에만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우리가 할 일은 온 맘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게 참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산다는 것이 행복할 때도 있지만, 힘겨울 때가 더 많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만든 도시는 우리 마음에서 안식을 빼앗아갑니다. 보이지 않을 뿐, 우리 가슴을 열어보면 삶이라는 전장戰場에서 입은 상처자국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배란 그 상처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상처를 입혔던 이들에 대한 미움까지도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상처를 솔직하게 열어 보일 때, 하나님은 그것을 은총의 계기로 바꿔주십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지금 이 시간 들뜨고 부푼 마음을 내려놓고 안셀름이 권고하듯이 온 힘을 다해 주님의 얼굴을 찾으십시오.

• 가을비와 봄비로 내리는 은총

신명기는 출애굽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속의 삶에서 벗어나, 자기 삶에 대해 주도권을 누리는 자유인으로 살고, 그러면서도 이웃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기 위해 명심해야 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무엇보다 먼저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넉넉하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 따라 내려 주셔서, 당신들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거두게 하실 것이며, 들에는 당신들의 가축이 먹을 풀을 자라게 하여 주실 것이며, 그리하여 당신들은 배불리 먹고 살 것입니다."(신11:14-15)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 떠오릅니다. 때가 되어 비가 내리고, 수고하고 땀 흘린 만큼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것, 들판에 가축들이 먹을 풀이 자라난다는 것, 평범하고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지만 히브리인들은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식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어떤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일로 생각하곤 합니다. 불치병을 앓던 사람이 낫는다든지,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일이 풀린다든지…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은 자기가 누리고 살고 있는 일상의 매 순간이 은총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이 바다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대지 위를 걷는 것이 기적임을 알지 못합니다. 겨울에 꽃이 피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봄이 되어 피는 꽃도 기적임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빈곤한 것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감각 때문입니다.

사실 평범한 은총을 누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찾아와 삶이 무거워질 때면,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을 찾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우리가 누리는 그런 평범하고 담담한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께 접속되어 있을 때 주어지는 복이라고 말합니다.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주시는 주님의 은총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 충실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13절에는 이런 전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당신들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명하는 그의 명령들을 착실히 듣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13)

문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할 때 벌어집니다. 유혹을 받고 마음이 변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그 신들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는 순간 그 평범한 행복은 물거품처럼 스러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좀 편협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이란 물론 다른 부족들이 섬기는 신입니다. 그 신들은 섬기는 이들에게 풍요와 다산을 약속해줍니다. 그 신들에게 중요한 것은 섬기는 이들의 윤리적 태도나 이웃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풍요와 다산의 신은 오히려 이웃 간의 관계를 파괴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몫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은 잠재적 경쟁자가 되고, 어쩌면 그들이 내 몫을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커지면서 세상은 점점 냉랭하게 변합니다. 관계가 무너진 세상은 황무지로 변합니다. 조촐한 행복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벌건 욕망만이 세상을 활보합니다. 지금 우리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 말씀을 명심하라

사람은 자칫하면 욕망의 포로가 되기 쉽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선배님이 흥얼거리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찰랑찰랑 찰랑대는 잔에 담긴 위스키처럼 그 모습이 찰랑대네’. 이 양반이 왜 이러시나 싶어 쳐다봤더니, 인간관계가 이렇게 찰랑거리는 세상에 사는 게 참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도 늘 찰랑거립니다. 작은 어려움 앞에서 찰랑거리고, 칭찬이나 비난 앞에서 찰랑거립니다. 마치 찰랑대는 버릇이 든 것처럼 우리 마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어떻게 해야 그 마음을 다잡아 웅숭깊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내가 한 이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두고, 또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당신들의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신11:18, 20)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마음에 간직하라, 골수에 새기라, 손에 매고, 이마에 붙이라, 심지어는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붙이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의 다양한 변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유혹에 약한 존재인지를 잘 아십니다. 그렇기에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삶을 조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조율되지 않은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이 소음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율되지 않은 삶은 불협화음이 되기 일쑤입니다.

지금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토라 구절을 담아놓은 작은 상자인 테필린(tefillin)을 이마에 착용합니다. 조금 우스운 모양이긴 하지만 그들은 진지합니다. 테필린은 하나님과의 결속을 상징합니다. 손에 매라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게 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이마에 붙이라는 말은 무슨 생각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여쭈라는 뜻일 겁니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붙이라는 것은 들고 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상기하라는 뜻일 겁니다. 

골수에 새겨두라는 말을 읽으며 언뜻 떠오른 것이 과골삼천踝骨三穿이라는 단어입니다. 한양대학교의 정민 선생님 글을 읽다가 만난 단어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제자 가운데 황상黃裳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칠십 세가 넘어서도 치열하게 공부에 매진하자 사람들이 굳이 그렇게까지 할 것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스승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나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하셨다"는 것이지요.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나다’. 그게 바로 과골삼천입니다. 그렇게 오지게 공부했기에 그는 위대한 정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본회퍼가 말하는 싸구려 은총에 사로잡힌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골수에 새겨두라는 말은 겁주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사람은 어긋난 길로 가기 쉬운 존재입니다. 말씀이 골수에 새겨질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 삶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성육신 사건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 말씀을 가르치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가르치라’가 그것입니다. 성서 종교는 가르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신앙 공동체는 가르침을 통해 존속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공동체의 생존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을 당신들 자녀에게 가르치며, 당신들이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신11:19)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토라를 공부하는 것은 공부하는 마음에 던져지는 도전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고 시간을 성화시키는 행위"(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173쪽)라고 말합니다. 종교 교육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고 사건에 동참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헤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일반 학교가 성취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학생에게 살아 있는 존재의 신비와 놀라움을 느끼게 해주는 일, 자신이 무한하게 값진 존재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빚으로 얻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시간 속의 성(聖)을 깨달으며, 축제의 능력을 기르고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함께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도록 해주는 일이 그것이다."(앞의 책, 176쪽)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정말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나의 있음이 기적임을 일깨워 주고, 내가 사랑에 빚진 자임을 잊지 않게 하고, 삶을 경축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하늘의 뜻에 수정된 마음이 되도록 살아간다면 그보다 멋진 교육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우리의 교육은 이런 근본적 지혜를 다 내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비극입니다. 참 삶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사회는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매화꽃이 지고, 벚꽃이 개화와 동시에 지기 시작합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힙니다. 농부들이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리듯이 우리도 은총의 단비를 기다립니다. 그래야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꾸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골수에 새기고, 누가 뭐라 하든 그 말씀을 따라 걷기로 작정하는 순간 우리 속에는 튼실한 뿌리가 생깁니다. 그러면 어떠한 바람이 불어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혼돈과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그 한복판에서도 거룩함을 찾고 또 지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환하게 바꾸는 이들입니다. 그 일에 동참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평화로워집니다. 주님은 이미 저 척박한 세상에 단비를 내려 잠든 대지를 깨우시고,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릴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의 초대에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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