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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믿으라 (요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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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으라 (요 14:1-6)


개나리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만일 개나리가 염려한다면 그토록 순결한 노란색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개나리는 염려하지 않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그토록 순결한 색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염려란 두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도 다시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두운 생각의 늪 속에 빠져듭니다. 마음속에서 어두운 상상이 오고가기에 그것이 얼굴의 근심으로 표현됩니다.

염려하는 내면에는 수심, 곧 염려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결과로 염려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수색, 곧 염려의 색이 나타납니다. 염려가 안색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에 굴복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맡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잠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시며, 우리의 모든 일을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과 나의 상황을 전적으로 맡길 때 우리는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물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근심과 영적 근심이 있습니다. 세상 근심, 곧 육적인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근심은 영적인 염려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가져야 할 유익한 것입니다. 성도의 염려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위하여 근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좋은 성도에게는 다섯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내 목자, 내 교회, 내 가정, 내 복음, 내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 헛된 근심을 버리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근심합시다.
고린도 후서 7장 10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먼저 생각할 것은 근심 아닌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우리가 걱정했던 것 중 90%는 결코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또 두려워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풍족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걱정을 합니까? 걱정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앞으로 돌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근심과 미래에 대한 현명하고 신중한 준비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근심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은혜를 주시고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당면한 문제와 책임에 대처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마치 어머니들이 아기들을 달래는 것처럼 공연한 소동을 피웁니다. 문제를 꼭 껴안기도 하고, 흔들며 달래기도 하고, 안아 보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가 빼앗으려고 하면 굳게 붙들곤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과 같이 속상해 하고, 그들이 어떤 누구보다 나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믿는 사실에 동조해 주길 원합니다. 걱정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보다 자신의 작은 문제들에 관해 더 많은 생각을 합니다. 

오늘을 맞이하고 내일을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근심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까? 근심을 더 키우지 말고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시편 55편 22절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가슴을 꽉 죄고 있던 근심의 고삐가 풀릴 것입니다.
우리의 근심을 하나님 손에 맡기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평화로 가득 차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이제 죽게 될 것이라 하니까 근심스런 표정을 짓는 제자들을 보면서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너희들 하나님을 믿느냐 그렇다면 나를 믿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저들을 두렵게 하고 염려하게 하는 것일까요? 지난 3년간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지내왔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도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예수님이 메시야시니까 당연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그 어머니 살로메를 통해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실 때 그 좌우편 자리를 자기들이 차지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직접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았어도 제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곤 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건 자기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라니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형수라는 말이 되는데 그럼 자기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고 자기들이 그런 꼴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 예수가 사형수로 처형이 된다고 할 때에 그런 예수를 따랐던 자기들은 낙동강 오리알은커녕 자기들 목숨까지도 걱정해야 할 판이 아닌가 하는 마음 때문에 더욱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예수님이 왜 모르겠습니까? 그저 불 보듯 뻔한데 무어라 그들을 위로해 준단 말입니까? 그래 먼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염려를 붙들지 말고 예수님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신뢰입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신뢰하지 못한다는 또 다른 뜻도 됩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모든 염려와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냥 근거 없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는 근거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형편입니다. 형편이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하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해결책이 있다면 염려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겠죠. 무섭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워지면 혼자 있는 것이 무섭다고 합니다. 그럼 낮에는 혼자 있어도 괜찮은가요? 어차피 낮이건 밤이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밤이 되면 더 무섭다고 하는 걸까요? 어두워서요? 어둡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럼 낮에는 다 보이는가요? 안 보이는 것은 없어요? 아니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들이 낮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바꾸면 낮이건 밤이건 다른 건 없습니다. 

일이 잘못될까봐 염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잘 될까봐 염려는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 일도 안 하면 잘못될까봐 염려할 일이 없습니다. 일은 누가 저지르느냐 하면 일을 하는 사람이 저지르는 겁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은 저지를 일도 없는 겁니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잘 되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 보면 삐꺼덕 합니다. 우리가 길 잘 다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은 왜 넘어집니까? 걸어 다니다 보니까 넘어지기도 하는 겁니다. 

무언가 부족해서 염려한다고요? 그럼 염려하고 있으면 채워집니까? 아 물론 염려하고 있으면 채워지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건 마음의 병이 가득 채워지겠죠. 그것 외에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기대만큼 되지 못하면 실망이야 되겠죠? 그렇다고 염려하거나 근심할 이유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지 말고 그건 그때 가서 염려해도 됩니다. 그래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내일 그거 잘못되면 어떻게 하냐고요? 그건 내일 가 봐서 그것도 잘 못되거든 그때 가서 생각해 봐도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미리 대비야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염려하는 것이 대비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잘못될까봐 염려되거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입으로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라는 거예요. 어차피 내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 됩니다. 내가 끌어안고 끙끙대지 말고 하나님께 공을 넘기세요. 

그렇다고 나는 모른다고 벌렁 누워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 마름대로는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처리해 나가다 보면 그 길이 보이게 되어 있고 열려지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더란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아니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주저할 것이 무엇이 있고 염려하고 있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 시간에 기도하면 돼요. 하나님께 솔직하게 그 형편을 아뢰십시오. 하나님 나 지금 이렇습니다. 이런 게 필요한 데요 이런 게 좀 염려되는 데요 하나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그리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 부족한 것을 구체적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요셉에게 주셨던 지혜, 다니엘에게 주셨던 지혜 솔로몬에게 주셨던 그 지혜 내게도 주세요. 주시되 은혜를 더하여 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후히 주시고 꾸지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뭐 그따위 거를 다 구하냐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안 될 것부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자란다면 모자라는 것을 주님께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 이게 모자랍니다. 주세요. 염려라는 것이 지나칠까봐 염려가 되면 겸손으로 머리를 숙이면 되고요 모자랄까봐 염려가 되면 모자라는 것만큼 주님이 채워주시기를 구하면 됩니다.  
우리 성도가 받고 있는 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큰 복중 하나가 모든 염려를 맡길 수 있고, 맡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이 세상은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 모든 사람들이 피곤에 지쳐 있고,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잃어버린 채 허덕이고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살인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병으로 죽는 사람보다 염려 때문에 죽는 사람이 몇 배나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무려 5백 50번이나 기록하셨습니다. 그만큼 염려는 무익한 것이요, 인간의 생명을 해롭게 하는 것이며, 이 사회와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 모든 염려를 전부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를 하나님에게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고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 가운데 날마다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베푸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적을 소개함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문을 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면서도 기꺼이 이 혼인잔치 자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데 다름 아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귀한 아적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사건이 왜 중요하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재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를 위해 먼저 이스라엘의 결혼 문화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총각이 처녀를 보고 마음에 들면 그는 아버지를 졸라서 잔치 비용을 타냅니다. 총각은 이 돈을 가지고 처녀의 집에 가서 잔치를 벌입니다. 이때 처녀의 가족과 친구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성대한 잔치가 일주일 동안 열립니다. 함께 먹고 자고 마시는 잔치에서 처녀는 총각을 유심히 살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렇게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잔치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날입니다. 마지막 날 총각을 처녀 앞에 포도주를 놓습니다. 이때 처녀가 그 포도주를 마시면 총각을 남편으로 맞이하겠다는 결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시지 않으면 총각은 잔치 비용만 날리고 풍이 죽은 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녀 앞에 포도주를 놓고 선택을 기다리는 순간은 수험생이 대입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조마조마한 순간일 것입니다. 

처녀가 포도주를 마시는 순간 총각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아버지 집으로 갑니다. 신부와 함께 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신혼 방을 꾸미러 가는 것입니다. 신부는 처소를 예비하러 간 신랑이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경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일정 기간 떨어져 사는 정혼 기간이 있었습니다. 보통 1년 정도였는데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지만 육체적으로는 처녀와 총각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던 순간도 요셉과 정혼한 때였습니다. 마리아는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내였지만 육체적으로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 기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고 최후의 만찬의 포도주로 사역을 마무리하시며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랑 예수님은 신부를 찾으려고 잔치를 베풀러 오신 것입니다. 당시에 혼인잔치는 여러 음식이 있었지만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날 처녀 앞에 놓는 포도주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시는 등 여러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잔치의 사이드 메뉴일 뿐입니다. 메인 메뉴는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나눠 주면서 다음 날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의 의미를 포도주와 연결해서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피 즉 예수님이 베푼 결혼잔치의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정혼한 신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로써 종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이를 만류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그렇다면 왜 가느냐 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신랑 되신 주님께서 신부된 우리들이 머물 거처를 지금 하늘나라에 준비하고 계십니다.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 예수님은 또한 포도주를 마시고 예수님과 정혼한 신부가 된 우리들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서 돌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거처를 다 예비하신 후에 반드시 신부를 찾으러 오실 것입니다. 정혼식만으로는 아직 결혼식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바로 정혼한 신부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랑 되신 그분과 결혼식을 하는 날입니다. 그 날은 누가 정하냐 하면 아버지가 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정하신 날 주님은 신부된 우리들과 함께 하늘나라에 마련된 거처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따라서 그 날이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칫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뿌림 받아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주님의 보혈이 우리 심령 속에 뿌려져서 모든 죄악이 다 씻겨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신부요 주님의 정결한 어린 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의 규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 주님의 신부됨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정혼한 신부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약혼녀입니다. 

그러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무엇이에요? 우리의 소원은 바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곧 재림의 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다리는 결혼식이 이루어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과연 신부가 신랑과의 결혼을 목 놓아 기다리듯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만약 우리 마음속에 나는 이 땅에서 잘 누리고 잘 살고 다음 세대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분명히 신부로서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부의 첫 번째 소원이 신랑과의 결혼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신부를 보고 뭐라 말하겠습니까? 그녀는 아마도 무늬만 신부든지 음탕한 신부든지 아니면 가짜 신부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푼 잔치의 가장 하이라이트인 포도주는 마시지 않고 사이드 메뉴만 즐기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 시대에 신랑은 주로 밤에 찾아왔기 때문에 정혼한 신부들은 깨어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신랑이 찾아올 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신부는 올리브 등잔에 기름을 충ㅊ분히 준비해 놓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는 신랑의 방문을 대비해 등불의 기름을 잘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는 기름이 모자라 당황했습니다. 그렇다면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 예수님은 언제 다시 오실까요? 그날은 신랑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의 아버지가 정하는 것입니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만 아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신부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아주 정확한 도마가 묻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분명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러니까 아버지께로 가는 그 길을 너희가 안다고 하는데 도마는 주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기껏 이야기했더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 집 즉 하나님 나라를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되신 주님께서 아버지라고 하면 하나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버지 집이란 하나님 나라인데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느냐 하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주님과 함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분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어 그 마음에 예수님의 보혈이 뿌려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순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는 순간, 주님에 대한 사랑을 신부가 신랑이 준비한 포도주를 마시듯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 성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열어 놓으신 생명의 길로 하나님 나라에 주님의 손을 붙잡고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데 다른 길도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헤 호도스 카이 헤 알렉세이아 카이 헤 조에”라고 해서 헤라는 말이 앞에 붙어 있습니다. 이 헤라는 말이 앞에 붙음으로서 그냥 길 진리 생명이 아니라 내가 유일한 길이고 내가 유일한 진리고 내가 유일한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 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고 예수를 믿는 것 외에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생명을 주신 친구이자 동시에 나의 신랑이요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신 구세주이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자요 주님의 신부이며 모든 죄악을 씻김 받은 거룩한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과거를 더 이상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하여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세주로 신랑으로 고백한 순간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씻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우리에게서 죄가 옮겨졌고 더 이상 주님은 그 죄를 기억도 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정결한 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를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사랑을 보십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들의 마음을 보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악한 마귀가 감히 우리를 더 이상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를 유혹해도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요 주님이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요 그 주님이 보내신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이 지금 내 안에 계셔서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나에게 날마다 새 힘이 넘치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은혜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주어져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족하면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쓰고 남도록 주님은 주십니다. 그러니까 나는 안 된다고 못한다고 하시지만 마십시오. 

주님이 이미 모든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결단만 하면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으면 수돗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날마다 우리 심령에 은혜가 넘치게 하셔서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더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염려만 하고 있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힘드세요? 그럼 주님께 힘들다고 말하세요. 

아프세요? 주님께 아프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리도 도와달라고 고쳐달라고 하세요. 아무리 길이 험해도 아무리 가기가 쉽지 않아도 주님과 함께라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주저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고 주님이 나에게 힘을 주시고 주님이 나를 도와주십니다. 나와 함께 계신 성령님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나의 신랑으로 고백했을 때 주님이 내 마음 속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성령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런데 숨길 것도 없잖아요?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식구들 때문에 걱정입니까? 자식 때문에 염려가 됩니까? 그러면 걱정만 하고 계시지 마시고 염려로 날을 지새우지 마십시오. 

염려만 하고 있어서 해결되는 것 같으면 백날 염려하세요. 그런데 아무리 염려하고 아무리 울며 날을 지새워도 그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모든 걸 그러니까 주님께 맡기시란 말입니다. 다 아시지요 주님,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주님도 아시지요? 주님 해결해 주세요. 주님 도와주세요. 나는 단지 주님 앞에 구하고 축복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주님께 아뢰면 됩니다. 단 건강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쫄쫄 굶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 아니죠. 건강 달라고 기도했으면 마음껏 먹고 힘써서 일하며 최선을 다해 운동도 하면 주님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주님은 우리의 몸매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얼굴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지난날 내가 어떻게 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을 보십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주님은 보십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주님만으로 내 생명으로 알아 그렇게 살아가고자 할 때 주님은 주님의 백성 주님의 신부된 우리가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우리를 만들어 가시고 우리의 마음과 함께 우리의 몸도 건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심령에 지혜와 지식과 명철과 총명도 주셔서 능히 사리를 분별하고 바른 길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아니면 주님이 부르시는 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안식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항상 깨어 있을 뿐 아니라 기름을 풍성하게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물론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신랑을 기다립니까? 아름답게 가꾸고 신랑을 기다립니까? 아니면 아이 키우기에 바빠서 온 집안을 다 너절하게 만들어 놓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먼저 잠들어 있습니까? 

요즘은 성형이 유행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건 무엇입니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좋지만 꾸며낸 아름다움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무엇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바른 믿음입니다. 염려하는 믿음이 아닌 맡기는 믿음입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그렇게 될 거라는 또 다른 믿음입니다. 

강도가 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몇 년째 잠을 편히 못 자는 여성이 있었어요. 조그마한 소리만 들려도 한밤중에 곤히 자는 남편을 깨우는 통에 남편도 잠을 설치기 일쑤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자다가 집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어요. 무슨 일인가 해서 남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정말로 강도가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순간 남편이 강도를 향해 말합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위층에 올라가 내 아내를 좀 만나주세요. 10년째 당신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염려가 뭡니까? 말썽이 생기기도 전에 말썽이 생길 거라고 믿는 잘못된 믿음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의 염려는 한도 끝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날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주시죠. 궂은 날이 올까, 맑은 오늘부터 미리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만일 궂은 날이 오더라도 비는 피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날이 써늘하면 하나 더 껴입으면 되잖아요? 
하고 많은 시간 염려에 매달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우리는 좋은 신랑 되신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온전한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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