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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다 (시 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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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다 (시 30:4-11)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1.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전능하신 아버지'라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이신 전능자'(Father Almighty)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은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고대교회는 그 중에서 두 가지를 선택하여 '사도신경'에 넣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과 '전능자'라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전능하신'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지만, 라틴어 원문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먼저 내세웁니다. 신약성서의 배경에서 보면, '아버지'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은 아주 적절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아바'라고 불렀습니다. '아바'는 유대인들이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아빠'에 해당합니다. 과거보다 지금은 '아빠'라는 호칭이 더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격식 있는 자리에서 '아빠'는 격에 맞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신랑 신부의 가족 상견례 자리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하고 부르면 아버지가 혼을 냅니다. 애들처럼 그게 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격식을 차려야 할 하나님께 가장 격식에 맞지 않는 '아바'라는 호칭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유대교 문헌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 든 예입니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두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대할 때 이렇게 파격적인 언어를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 이유를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친근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차원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중에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마치 그분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실은 '아바'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초대 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이들의 언어적 특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를 발견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체험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아바'라고 진심되게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그분을 진실로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아빠로 체험하고 그렇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비유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아버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아니라 성품에서 우리는 그분을 닮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길과 미세한 음성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습니다.

아버지라고 해서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낳아 놓기만 했지, 양육과 보호의 책임을 떠맡지 않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완고하고 엄하게 자녀를 대합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혼나고 욕 먹고 구타 당한 기억 밖에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무지한 아버지들이 과거에 많았습니다만,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 아버지들 아래서 자란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지독한 폭행을 당했던 사람이 써놓은 글을 읽었습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신물이 올라온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수년째 연락도 두절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친 몸을 이끌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데, 자기 나이 또래의 남자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통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쓰러져 통곡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 남자가 "아버지, 저예요!"라고 했고 곧바로 "그냥"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늦은 밤에 아버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던 것이고, 아버지는 왜 전화했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아들은 "그냥" 걸었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그 남자는 '그냥' 아버지 목소리 듣고 싶어했던 그 사람이 너무도 부러웠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의 아버지들도 대부분 이렇게 무지하고 완고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식에게 우격 다짐으로 힘만 쓸 줄 알았지, 자식의 마음을 살피고 위로하고 돌보는 아버지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들의 마음에는 감사와 사랑의 감정보다는 공포의 감정이 더 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사랑하고 사모하는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도록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귀에 이상하게 들릴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늘 아버지의 선의와 사랑을 믿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에 대해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마태복음서 7:9-11)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너희들이 경험한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라"는 뜻이 됩니다. 자애로운 아버지, 사랑밖에 모르는 아버지, 끝까지 기다리시는 아버지, 마지막까지 다 주시는 아버지, 자식의 죄를 보고 가슴을 쥐어 뜯으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 믿어지기 전까지는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벌써 꽤 지났습니다만, 뉴욕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폴 빗츠(Paul Vitz)가 '무신론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Faith of the Fatherless입니다. '아버지를 상실한 사람들의 믿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역사상 유명했던 무신론자들의 생애와 믿음의 사람으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생애를 비교 연구했습니다. 무신론자로는 니체, 버틀란트 러셀, 사르트르, 쇼펜하우어같은 사람들이 연구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주목할만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역사상 완고한 무신론자들은 대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거나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고, 반면 좋은 믿음의 사람들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 요인은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아버지들에게는 정신이 번쩍 나는 연구 결과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은 자녀의 세상살이에도 중요하지만 믿음 생활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어머니들이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증명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이미 꿰뚫어 보셨습니다.


3.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아버지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마음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있으나 그 사랑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면 그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어린 자식이 심각한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속수무책으로 지켜 보아야 합니다. 그 마음은 시커멓게 썩어갑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의 투병 과정을 함께 하면서 저는 그런 답답함을 자주 느낍니다. 제게 능력이 있어서 손을 얹는 대로 척척 병이 낫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사랑만으로 충분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무엇을 해주기보다는 진실한 사랑의 마음이 더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면 더 없이 기쁠 것입니다. 

'사도신경'이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요약하면서 '아버지'라는 단어에 '전능자'라는 단어를 연결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바'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은 '사랑밖에 모르는 분'인 동시에 '전능하신 분'입니다. 못 하실 일이 없는 분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기별했을 때, 마리아가 남자와 잠자리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 때 가므리엘 천사가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누가복음서 1:37)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좋은 글들을 남긴 C.S. 루이스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을 "하나님은 아무 일이든 하실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지만, 아무 일이나 하지 않습니다. 아무 일이든 하실 수 있다고 오해를 하니, 우리의 기도와 소망이 빗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나 무당이 섬기는 귀신처럼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진실로 행복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나 자신보다 더 뜨겁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내게 필요한 것을 내가 알기 전에 아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든 든든할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 '아버지를 상실한 시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아버지들은 돈 벌어다 주는 것 외에는 딱히 아버지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그것 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아버지를 상실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전능하신 아버지 즉 자신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 주실만한 존재를 원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찾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머리가 커지면서 아버지가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역할을 해 줄 다른 대상을 찾습니다. 선생님에게서 찾기도 하고, 남편에게서 찾기도 하며, 직장 상사에게서 찾기도 하고, 연예인이나 유명인에게서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르게 되는 결론은 그런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사는 사람도 있고, 전능하신 아버지 역할을 해 줄 대상을 찾아 전전하다가 되는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는 의지의 대상이기도 하며, 삶의 길잡이이기도 하고, 때로 부조리한 인생을 버티고 살게 해 주는 버팀목이기도 합니다.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데, 사람에게서는 도무지 그것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신경'의 첫 고백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능하신 아버지를 찾으라는 초청입니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 '사랑의 전능자'는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날 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네 살 짜리 어린아이처럼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4.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자시라면, 왜 나에게는 이렇게 시련만 닥치고 어려움이 계속되는 것입니까?"

사실, 이 질문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그러나 쉽게 말하지 않는 질문입니다. 신학자들이 풀기에 가장 어려워하는 질문입니다. 이유 없이 당하는 것 같은 고통으로 인해 지칠 때, 혹은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인해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목격할 때, 이 질문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 앞에 서면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를 상정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계신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없거나...
사랑이 있다면, 사랑을 실행할 능력이 없거나...

이 문제에 대해 제가 결정적인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적어도 몇 번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를 의심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해주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냉정하게 거절하거나 침묵할 때, 우라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에 빠집니다. 그 의문이 더 심각해지면, "삼촌 말대로 혹시 나를 다리 밑에서 주어왔나?"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안타깝게도, 실제로 그런 어머니와 그런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을 부모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고 자식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만, 때로 무심하고 냉담한 듯 처신할 때도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자식을 묶어 끌고 올 수도 있지만, 스스로 깨닫고 돌아설 때까지 마음 졸이며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걸음마를 하다가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를 잡아 일으켜 줄 수 있지만, 제 스스로 일어나 다시 시도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아들 부부가 갈등을 겪는 것을 보고 개입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이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키우도록 마음 졸이며 지켜볼 때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만일 "저 분은 우리 친아버지가 아니거나, 친아버지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나를 사랑한다면 무능하거나, 셋 중 하나일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철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버지의 생각보다 짧아서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깊은 골짜기에서 혹은 거대한 자연 재해 앞에서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의문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말은 '유한자'(the finite)인 우리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유한자로서 우리 인간은 전능자인 하나님의 생각과 처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무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에 대한 의문들은 대부분 해명이 됩니다. 다 해명되지 않는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때"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 하셔야만 할 이유가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5.

지난 주 한인총회를 위해 LA를 방문하는 동안에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녀들과 함께 살기 위해 이주하신 김은형 권사님을 방문했습니다. 남편 송원률 장로님을 암으로 먼저 보내고, 뒤이어 당한 교통사고와 그로 인한 치료, 치료 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인한 통증과 장애, 그리고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으로 인해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시기에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senior center에 갔더니, 그곳에서 만난 어느 노인이 묻더랍니다. You look so sad. Why are you so sad? 

당시에는 정말 즐거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즐겁지 않을 것이 없어야 할 상황에 있었습니다. 비록 남편은 없었지만, 아들과 딸은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로 꼽힙니다. 게다가, 믿음까지 좋습니다. 창문만 열면 산타모니카 해변이 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살고 계십니다. 가까이 있지는 않지만, 권사님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면 슬퍼해서는 안 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것들이 아무것도 의미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권사님은 하마터면 평생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을 놓칠 뻔 했다고 합니다. 

저는 권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지난 주간에 목회실 식구들과 읽었던 시편 30편이 생각났습니다. 이 시편을 썼을 때, 다윗도 심각한 질병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다윗의 심정이 오늘 읽은 본문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 하였지만,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시편 30:6-7)

하나님이 다윗을 외면했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너무도 큰 어려움에 빠진 까닭에 그렇게 느낀 것입니다. 다윗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우리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김은형 권사님도 그것을 겪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고,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능력이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나를 이 상황에 내버려 두시겠는가?"

다행히도, 다윗은 그 헛된 감정에 속지 않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마침내 그 암흑의 구덩이를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 입히셨기에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시편 30:11-12)

김은형 권사님도 똑같이 고백하셨습니다. 하마터면 '전능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할 뻔 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그 하나님은 나의 전능하신 아버지십니다"라고 고백하십니다. 지금은 Senior Center에서도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속회를 인도하시며, 일주일에 한 번씩 따님과 함께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변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의 다리는 수술 후유증으로 아직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분의 나이 81세이십니다. 그럼에도 화요일 저녁이 되면 곱게 차려 입고 따님과 함께 센터에 나가 노숙자들의 음식 시중을 들고 계십니다. 아직도 장애가 있고 고통도 있지만,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게 살려 하신다고 합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자애로운 아버지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분이 전능의 힘으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처한 환경을 보니 그렇지 않다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환경을 보니 그런 것 같아 보입니까? 여러분의 환경을 보고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아버지'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면, 여러분은 필경 큰 시험을 만날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을 보고 쥐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계시하신 우리 하나님이 '전능하신 아버지'라는 사실은 환경을 보고 판단할 대상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써 환경을 이겨내어 믿음의 진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믿음으로 우리 주님처럼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증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 (시편 30:4-5)
아멘.

이렇게,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진실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써 시련과 환난을 이길 뿐 아니라, '전능하신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압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기뻐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로 인하여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면, 우리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같은 은총과 축복이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소서.
그 믿음으로 모든 환난과 역경을 이기게 하시고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게 하소서.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이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이 믿음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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