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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이루었다 (요 19: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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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요 19:28-30)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 19:28-30) 


임종 시의 말 한 마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매달리신 6시간 동안에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일곱 마디의 말씀을 흔히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이 일곱 마디의 말씀은 마태와 마가가 하나, 누가가 셋, 요한이 넷을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몽롱한 정신가운데서나 무의식중에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맑은 정신으로 하신 말씀들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군병들은 예수님께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몰약이나 쓸개즙은 마취약입니다. 사형수가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어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과, 사도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나머지 두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내가 목마르다.”(28) “다 이루었다”(30)


내가 목마르다

본문의 첫 번째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입니다. 마리아에게, 요한에게 말씀하시고 나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주님은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극심한 고통의 고백입니다. 고통의 고백은 여러 가지 말로 표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프다”든지, “괴롭다”든지, 혹은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낼 수도 있습니다. 왜 하필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셨을까? 

본문에 보면 그 이유를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일어난 일들이나, 하신 말씀 하나까지 다 우연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는 장면은 시편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9:24, 시22:18)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말씀 역시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7:46, 시22:1)  
  
본문의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 역시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경 말씀을 성취하신 것일까? 대략 두 군데의 성구가 인용됩니다. 

첫 번째 성구는, 시편 69편입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69:21) 

여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용된 두 가지 음식물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쓸개이고, 다른 하나는 초입니다.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 입에 대어줬다고 합니다.(마27:34) 쓸개나 몰약(막15:23)은 일종의 마취제입니다. 고통을 덜어주려고 못 박기 전에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쓸개나 몰약을 거절하셨습니다.(마27:34,막15:23) 쓸개와 달리, 신 포도주는 일종의 식초 성분이 들어 있는 술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시는 막걸리와 같은, 당시 이스라엘 서민들의 음료수입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이 이 신 포도주를 해융에 적셔 긴 갈대처럼 생긴 우슬초에 매달아 예수님 입에 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신 포도주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째 성구는 시편 42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42:1-2) 

시편 42편은 고라자손이 지은 시편입니다. 고라 자손은 광야 시절에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하다가 큰 징벌을 당한 족속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징벌을 받는 고통을 목마른 사슴에 비유했습니다.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목마른 사슴! 그런데 이 갈증을 예수님이 고백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성취하신 것은 주님의 목마름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목마름이란 뜻입니다. 고라 자손은 자기 죄로 하나님께 버림받았지만, 예수님은 자기 죄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은 이런 영적 고통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갈망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런 갈증을 전혀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연히 영광과 안식의 자리에 있으실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영광의 자리로부터 고통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낮고 가장 천하고 가장 불행한 인간의 자리로 내려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배고프고 주리셨습니다. 무주택자로 사셨습니다. 빈들에서 노숙하셨습니다. 그 흔한 나귀나 노새 한 마리 타지 않고 먼 길을 걸어 다니셨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시고, 탄압 받고, 배척 받고, 미움과 시기를 받으셨습니다. 배신당하고, 체포당하고, 누명 쓰고 채찍질 당하고, 재판 받고, 죽음의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생애 최후의 순간에도 목마름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6시간 동안 온 몸의 물이 다 빠져나왔습니다. 탈진하셨습니다. 목마름은 뼈가 썩는 것보다도 더 참기 어렵다고 합니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하여 죽어가는 모든 병사들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말이 바로 물 좀 달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타는 목마름을 경험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인류가 당해야 될 고통을 대신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 예수님은 귀족적 자선가가 아닙니다. 귀족적 자선가는 부지런히 바자회를 개최하고 구제 사업을 할지라도, 비참한 자리에 몸소 내려앉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가난해지려고 하지 않고, 병들려 하지 않고, 멸시 당하려 하지 않고, 배반당하려 하지 않고, 매 맞으려 하지 않고, 낮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고고한 자리에서 “도와주는 자”가 되기만을 원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불행에 빠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주님은 모든 불행의 자리에 친히 앉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당하셨습니다. 그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진통제를 거절하셨습니다. 아픔을 면제당하는 것까지 거절하신 겁니다. 육신적인 아픔만이 아닙니다. 영혼의 아픔까지 다 겪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인간적인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온갖 모욕, 미움, 시기, 멸시, 억울함을 다 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저주받고 버림받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도 하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시고 아버지께 버림받으신 주님. 간절히 아버지를 갈망하는 영혼의 목마름! 바로 그 목마름으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호소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목마르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주님께서 목마르셨기 때문에 우리도 목마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목마름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는 갈증을 충만하게 해소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목마르시고, 우리에게는 목마름이 아닌 생수를 부어주셨습니다.  
  
첫째는 영적인 생수입니다. 주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한 그릇의 물을 얻어 잡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면서도 채워지지 않았든 영혼의 갈증이 이제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채워졌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기쁨을 얻었습니다. 만족을 얻었습니다. 장래 소망을 얻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생수를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물론 육신의 생수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신령한 몸을 얻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육신의 삶에 매이지 않고 영혼을 따라 살도록 전천후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가난해도, 병들어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겉 사람은 썩어져도 속사람은 강건하여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주님을 믿음으로 이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다 이루었다

본문의 두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30)는 말씀입니다. 타는 목마름을 호소하신 까닭도 사실은 이다음의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께서 목마르다고 하시니까 군병들은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 주님의 입에 대 주었습니다. 주님은 입술을 축이고 나서 이 위대한 말씀을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한 단어에 불과합니다.  “Tetevlestai”(테텔레스타이). 내어주고 양보했다는 뜻인데, 동사 시제로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It has been finished! 완료되었다! 완료되었다는 말은 우선 생애가 마감되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자 이제는 내 생애가 마감되는구나!” 그렇게 들리기도 하지만, “다 이루었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신에게 한 독백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외치신 외침입니다. 

공관 복음에 보면 이때에 주님은 큰 소리로 외쳤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고” (마27:50,막15:37,눅23:46) 

“cry out, in a loud voice, with a loud cry”(NIV) 외치셨다는 것은 이 말이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라 남이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란 뜻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선포입니다. “자, 보아라! 이제 내 책임을 완수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류 구원 과업을 완수했다!” “보라, 너희 구원은 완성되었다!” 이런 뜻의 외침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미진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없다는 뜻입니다.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인류 구원의 과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구원 사역은 생애 전체를 통해서 인간의 모든 불행을 몸소 겪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겪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시련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 마지막 과정이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최대 최후의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 많은 인간이 당하는 저주의 죽음을 똑 같이 당하셨습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죽음에 임하셨습니다.  

30절 말씀을 보세요.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30) 떠나가셨다는 원문 상의 표현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입니다. “parevdwken to; pneu'ma.”(gave up His spirit) 영문 성경에 영혼(pneu'ma)이라는 말은 여러 단어(life, spirit, ghost)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셨다는 말은 같은 말로 번역했습니다. 바로 “gavu up”이라는 말입니다. “주께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억지로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지막 죽음도 자신의 과업을 완성하는 자발적 행동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아버지께서 원하신 구원 사역을 스스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성취 앞에서 두 가지 결심을 해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원에 참여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유일무이하신 분입니다. 어떤 성자도 예수님처럼 구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떤 위인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지 못했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어떤 성자도 예수님처럼 고난에 참여하지 못했고, 예수님처럼 속죄 제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떤 성자도 예수님처럼 죽지 못했고, 예수님처럼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의 구주로 영접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내 영혼을 맡겨야 합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도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거금을 갖다 주면서 자기 인생을 맡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의 여신에게 자신을 맡깁니다. 하물며 인류 구원을 완벽하게 이루신 예수님께 맡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의 구원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내 인생에 주어진 목표 달성의 결단입니다. 주님의 성취를 보면서, 내 인생은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세요. 이제 벌써 5월이 가까워 옵니다.  이맘때쯤 되면 마귀가 심방을 찾아옵니다. “자 보아라! 금년이라고 별 수 있냐? 거창한 목표들은 다 포기해라! 금년은 그럭저럭 보내고 내년에 다시 시작해라!” 마귀 특유의 연기 작전입니다. 솔솔 자포자기가 시작됩니다. 연 초에 세운 목표들이 흐지부지 잊혀지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신앙생활 한번 잘 해보겠다던 목표, 올해는 열심히 일 해보겠다던 목표, 금년에는 가정생활 잘 해보겠다던 목표, 인간관계를 잘 해보겠다던 목표 등등. 열심히 해 봤자 다 그게 그것이 아닌가? 낙심, 좌절, 분노, 실망, 불안함, 온갖 흉흉한 심사로 충만합니다. 일 년을 날 수로 치면 365일에 불과합니다. 이 365일간의 목표도 우리는 쉽게 잊거나 포기해버립니다. 일 년은커녕 단 하루 24시간 동안의 과업도 쉽게 포기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물며 평생의 목표를 잊지 않고 성취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성취를 보아야 합니다.  
  
결코 목표를 잊지 마세요! 하루의 목표를 잊지 마시고, 1년의 목표를 잊지 마세요. 그리고 평생의 목표를 잊지 마세요. 삶의 목표는 곧 삶의 활력입니다. 목표가 있으면 달음질 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있는 날과, 목표가 없는 날은 삶이 달라집니다. 저는 월요일이 휴일입니다. 주일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내일은 어디로 가서 운동도 하고 시원한 바람이나 쐬러 가야지! 그래서 월요일에는 아무 스케줄도 세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표 없는 날은 할 일도 없습니다. 우선 아침에 아무 때나 일어납니다. 밥도 아무 때나 먹습니다. 반나절이 지나면, “에라 하루도 절반이나 꺾어졌는데 어딜 가랴?” 하면서 주저앉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운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요. 목표 없는 인생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오늘은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이 있어야 제대로 움직입니다. 하다못해 오늘은 시장에 가서 먹을 것이라도 사 오고, 친구 아무개를 만나겠다는 계획이라도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송세월이 됩니다.  우리 인생은 이루어야 될 과업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업상의 목표가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성취 목표가 있습니다. 가정의 목표가 있습니다. 자식을 기르며, 집을 장만하며, 가계를 불려가는 목표가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인격을 키우고, 지식을 늘려가는 목표도 있습니다. 신앙 증진, 가족 전도, 교회 부흥 등등. 아무튼 우리는 목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삶의 목표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순간에도 주님은 목표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목표가 완성될 때까지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목표를 향해 달리셨습니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포함해서 모든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위대한 모습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목표는 있으나 목표를 향해 달리지 않습니다. 이루려고 노력하지 않는 목표는 헛것입니다. 

목표가 있는 한 우리는 달립니다. 병들어도 쉬지 마세요. 병이 우리 인생을 넘어뜨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룰 것입니다. 환경이 나빠지더라도 탓하지 말고 달리세요. 언제는 내가 달리기 좋은 환경이 있었나요? 병들어도, 가난해도, 욕을 먹어도, 실패해도, 배반을 당해도, 죽음이 코앞에 와 있을지라도 목표를 향해 달려가세요.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내 인생에 주신 목표들을 완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결론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아픔을 대속하시는 목마름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겪어야 하는 모든 불행, 모든 고통, 모든 시련, 모든 아픔을 몸으로 겪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불행한 목마름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로 영접하세요. 그래서 수가성 여인처럼 영혼과 육신의 모든 목마름을 해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과업은 인류 구원입니다. 33년 6개월의 짧은 생애를 통해서 주님은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갈망했던 영생에 대한 갈망과 아브라함 이후로 이루려 했던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업적이 완성됐습니다.  
  
우리는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음성을 최후통첩으로 받아야 합니다. 지체 말고 주님이 완성하신 구원에 참여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세요. 그래서 하나님 자녀가 되세요. 천국 시민이 되세요. 하나님 주시는 각종의 특혜를 받으세요.  

요즘 사람들 남이 특혜를 받으면 싫어하면서도, 자기가 특혜 받는 것은 좋아합니다. 사람에게 특혜 받으려 하지 마세요. 받지도 못하고 욕만 먹습니다.  하나님께 특혜를 받으세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오늘 주님이 이루신 구원에 내 인생 모든 것을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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