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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장할만한 값진 목적 (마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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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할만한 값진 목적 (마 5:14-16)

 
우리 사회에는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 못합니다. 부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만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경멸하고 오히려 흉을 봅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라’고 권장할 인물이 많이 있지 않습니다. 굳이 찾는다면 위인전에서나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백 년 전 외국에 살던 사람들인데 지금 이 시대에 ‘나는 나폴레옹처럼 되겠습니다. 나는 슈바이처처럼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좀 이상한 것입니다. 마치 그 이후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존경한다고 말하는 동시대 사람들은 무대 위에 세워놓은 설치물과 같습니다. 소위 성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밥집을 하면서 평생 모은 돈을 어느 대학에 기증했다더라.’ 이러면 사람들이 존경합니다. 그러나 당신도 그렇게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가 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뿐이지, 그것을 내 자식에게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이중적 잣대를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누군가를 존경해야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부추겨서 세워놓은 것입니다.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주고 진짜와 같은 느낌이 별로 없습니다.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의 여론이 갈라졌다는 얘기요, 공유할만한 가치관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입니다. 아직 우리는 권장할만한 값진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맡고 있는 역할이에요.

저는 저의 아이에게 장차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면 두 종류의 인물이 필요한데, 첫째는 훌륭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고 둘째는 정신적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는 영적 리더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종교인이 된다는 말은 세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출가라는 말을 쓰는데 출가한다는 말은 집을 떠난다는 말뿐만이 아니고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를 깎고 옷을 바꿔 입었던 것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 출가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고민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출가한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인생의 해답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직업도 갖지 않고 가족도 갖지 않고 일선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종교인이 많아진다는 말은 그러므로 사회적 차원에서 봤을 때는 효율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인데 그게 사회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부양해야 될 사람들의 숫자만 많아진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영화 <대부3편>을 보면 마이클 콜리오네의 조카가 찾아와서 ‘제가 삼촌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니까 그 삼촌이 말하기를 ‘나는 더 이상 어깨가 필요한 게 아니고 더 많은 변호사와 회계사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러분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떤 일꾼들이 더 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겐 모두 12지파가 있었는데 그 중에 레위 지파는 제사장직을 전담하는 지파였습니다. 그들은 소위 전문 종교인 집단으로, 땅을 기업으로 얻지도 못하고 별도의 직장을 갖지도 못하고 공직에 취임하지도 못하고 전쟁이 나도 군인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오직 성전에서 봉사하고 사람들이 성전에 바치는 예물로 살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의 나머지 살림은 나머지 11지파가 담당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왕이 나오고 군인이 나오고 지도자도 나왔습니다. 사울왕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다윗왕은 유다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다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역사는 비 레위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일선에서 후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운동경기 중에 쉬는 시간이 있는 것처럼 종교 활동은 메인 활동이 아니고 시합 도중에 쉬기 위하여, 재충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성격이 강합니다. 본 시합은 밖에서 이루어집니다. 거기에 메인이 있고, 종교생활은 숨을 고르는 시간인 것입니다. 평신도가 이런 주장을 한다면 주관적 의견일 뿐이라고 반박할 수 있지만 오죽하면 목사인 제가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편중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주일에 안식일을 두 번 제정한 게 아니고 한 번 제정하셨다는 사실이 그것을 시사합니다.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라는 얘기입니다. 

종교가 인간의 삶에 적어도 시간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이와 같다는 얘기입니다. 1 : 6의 비중이에요.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신앙 중심으로 사는 것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주된 활동은 밖에서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들고 기도한 것만을 강조하지, 산 아래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웠다는 사실은 강조하려고 하지 않는데 아무리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더라도 그 아래에서 여호수아가 싸우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여호수아의 역할이 중요하고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 가족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셨지만 그 이전에는 무슨 일을 하면서 사셨습니까? 목수의 일을 하면서 사셨어요.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모두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는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지만 그 이전에는 어부로서 고기를 잡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후에 누군가가 그들을 대신해서 고기 잡는 일을 계속해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든 안드레든 요한이든 고기를 먹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목수의 일이든 어부의 일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 있지 않다면 사람은 무엇이든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인간의 종교성이 그 사람을 비생산적인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열심히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내 아버지께서 이제껏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은 출가의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물러나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는 인생에 대한 고민이나 의문이 있지 않았습니다. 명상, 수행, 구도, 이것은 예수님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 산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수도월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들과 병자들이 있는 세상에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세상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세상을 건지기 위한 것이고 구원하기 위한 것이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다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짧을 때가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많은 목사님들이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죄의식을 심어주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데 성도들이 목회자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11지파가 레위 지파가 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에요. 마틴 루터는 ‘만인제사장론’이란 파격적인 주장을 했지만 루터 자신도 그 이론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만인이 다 제사장이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제사장이 되면 누가 일하고 누가 먹여 살리고 누가 교회에 헌금을 하겠습니까? 마틴 루터가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한 목적은 첫째는 교회 내에 특별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누구든지 성경을 해석할 수 있고 성경 이외에 다른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다 제사장이 되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지혜가 필요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인 21세기가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많은 주제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돈에 대해서 별로 말씀하지 않으셨고, 직장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결혼과 가정과 자녀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인간의 성과 애정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행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예수께서 그것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고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율성에 맡기셨다는 뜻이에요.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오직 한 나무의 열매만을 금지하시고 동산의 그 이외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으라고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율성은 그 범위가 넓습니다. 사람이 발견하기 나름이고 사람이 개발하기 나름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개발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취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람이 무엇을 하면 안 되느냐, 무엇을 할 수 없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지, 믿는 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400여 년 전 청교도들이 배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갈 때 John Winthrop이란 사람이 오늘 본문 말씀을 인용하면서 승선한 청교도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목사가 아니고 변호사였고 이후 매사추세츠 주의 총독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요 청교도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가는 저 나라는 장차 산 위의 도시와 같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City on a Hill - 산 위에 있는 동네, 산 위에 있는 도시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사용하셨는데 예수께서 사람이 의를 행함으로 이 세상에서 어떤 혜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하신 매우 적은 말씀 중의 하나에요. 그런데 John Winthrop이 이 말은 한 것이 예언이 되어서 정말로 그들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산 위에 있는 도시와 같이 전 세계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이었습니다. 

왜 우리 사회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과 후손들에게 제시할 비전을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무엇을 해서는 안 되고, 무엇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이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고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고 그러므로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가능성을 보게 하시고, 사람을 무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능력을 부여하시고, 미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지혜를 얻게 하시고, 우리의 세상을 좁혀주시는 것이 아니고 넓혀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골방에 들어가게 하실 때도 있지만 우리를 높이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말씀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다시 말하면 사람이 빛의 역할을 감당하면 아래에 있지 않고 위에 있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주님이 그것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그것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등경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우리가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위에 높인다는 얘기에요. 위에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등이 빛을 잃었기 때문이지 그 빛이 있기 때문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음으로 어떤 위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얘기입니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섬김으로 예수님 말씀처럼 산 위에 있는 도시가 되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다는 말은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이렇게만 생각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교회 들어오기를 주저하고 예수 믿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금지하고 제한하는 것만 생각했지, 예수님이 허락하시고 가능하게 하신 믿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지는 게 아니에요.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집니다. 옵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에요. 옵션이 더 많아집니다. 인생이 좁아지는 게 아니고 더 넓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좁아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골방에 가두는 것이 아니고 산 위의 도시처럼 드러나게 하십니다. 사람을 위축시키지 않고 풀어놓아 다니게 합니다. 무력화 시키지 않고 더 큰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이것은 우울한 일이 아니고 기쁜 일이에요. 신나는 일이요 바쁜 일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듯 우리도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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