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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에 넘어간 믿음의 조상 (창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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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에 넘어간 믿음의 조상 (창 16:1-16) 

창세기 16장은 평소 아브람의 모습과는 아주 다릅니다. 믿음의 조상이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하나는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또 하나는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4).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창 15:7). 

이에 아브람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이처럼 창세기 15장에 아브람은 믿음의 사람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람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입니다. 불신앙과 유혹으로 인해 갈등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때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자는 신자이지만 불신앙의 세력이 속에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4절에 보면 귀신들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막 9:24). 

자신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는 말을 통해 신자들에게도 불신앙의 세력이 역사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신자라 할지라도 때로는 불신앙과 유혹의 세력으로 인해 갈등하고 굴복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Ⅰ. 아브람이 받은 유혹(Temptation) 

아브람의 경우는 “모래시계”의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욕탕 사우나에 가보면 모래시계를 볼 수 있는데 모래가 더디게 내려간다고 해서 아무리 흔들어도 모래는 빨리 내려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다 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더디게 흘러가는 모래시계를 흔들어서 빨리 가게 해보려는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창 16:3). 

아브람이 75세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서 10년이 지났으니까 85세가 된 것입니다. 네 몸에서 후사가 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지 오래되었지만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도 늙었고 사래도 늙어 생리적으로 잉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promise)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와 모순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섭리의 모래시계가 다 내려온 후에라야 실현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어려서 하나님이 계시를 주셨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높은 사람이 되리라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인생은 정 반대로 갑니다. 17살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던져졌다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 것을 뿌리쳤기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17살부터 28살까지 노예로 있다가 30살까지 감옥에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높은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을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 가고 왜 이렇게 인생에 고달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30살이 되자 섭리의 모래시계가 다 내려왔고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약속의 실현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섭리의 모래시계가 다 내려와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도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왕이 되기는커녕 선왕인 사울에게 계속해서 쫓겨 다니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도망자가 되어 광야를 헤매고 다닌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도 섭리의 모래시계가 다 내려오자 약속의 실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현실이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현실을 넘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의 인생은 광명한 해가 떠오르는 것 같은 인생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캄캄하고 어두워도 섭리의 모래시계가 다 내려오게 되면 광명한 해가 떠오르는 것 같은 인생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기다리지 못하고 모래시계를 흔들어보려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아브람이 유혹에 빠진 이유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 시간이 오래 흘렀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가면 마귀가 찾아오고 의심이 일어나며 인내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래시계를 흔들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 년을 기다렸으면 됐지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말이냐?’ 이런 생각이 아브람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둘째, 사래가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일을 합리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사래가 모래시계를 흔든 것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하나님이 자녀를 주지 않으시니 이런 제안을 할 수밖에 없지 않냐고 자신의 일을 합리화한 것입니다. 

셋째, 아브람에게도 변명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4). 하나님이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된다고 하셨지 사래의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된다고 말씀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갈의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아브람의 몸에서 난 자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아브람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 자녀가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의심이 찾아온 것입니다. 

넷째, 당시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종이 낳은 아이라 할지라도 주인이 낳은 아이로 간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에도 어긋나지 않고 아브람과 사래 모두 변명거리가 있었고 십 년 동안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인간적인 방법을 쓰려는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은 약속의 자녀를 불가능한 중에서도 믿음으로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지 육신의 자녀를 네가 알아서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모래시계가 다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유혹이 많습니다. 우리가 많이 당하는 유혹은 재리의 유혹입니다. 돈만 된다면 주일성수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정욕의 유혹과 영적인 유혹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과 한국에서는 영적인 유혹이 많이 일어납니다. 소위 신사도 운동(The New Apostolic Reformation)이라는 것이 일어나 많은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보통 정상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응답 한번 받으려고 해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사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도라고 하면서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답답함은 잠깐 해결해줄지 몰라도 마귀의 사탕발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성령으로 인도하시는 경우가 몇 번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점쟁이가 점을 치듯이 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모래시계가 다 내려와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Ⅱ. 유혹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Response) 

창세기 16장 2절 후반에 보니까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를 통해 온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아브람이 유혹에 넘어간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적인 이유입니다. 유혹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사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람의 종들이 몰려와서 “하갈이 애굽 여인이기는 하지만 예쁘고 육신도 건강하니 취하여 아들을 낳으십시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하셔서 10년을 기다렸지만 아직 한 명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갈을 취하여 자녀를 낳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칩시다. 그랬다면 아브람이 과연 이것을 받아들였겠습니까? 아마 헛소리하지 말고 물러가라고 호통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유혹이 왔기 때문에 넘어간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선을 행하고 믿음을 격려해야 됩니다.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잠 31:12).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서로가 믿음의 상승효과를 주는 부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기도하지 않으면 아내가 기도하자고 하고 아내가 성경을 읽지 않으면 남편이 성경 읽고 성경퀴즈대회에 나가라고 하면서 서로의 믿음을 격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브람을 유혹했고 아브람은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둘째, 영적인 이유입니다. 아브람이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기도했다는 기록이 일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그의 믿음이 약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화되니까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내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이끌리기보다는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도해야 믿음이 강화되고 믿음이 강화돼야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동안 기도하지 않아도 금방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약해지고 그러다 유혹이 오게 되면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서 믿음을 강화하시고 믿음이 강화되면 어떤 유혹이라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유혹에 넘어간 후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창 16:4). 

단기적으로 쉽고 빠르게 돈을 버는 방법은 도둑질하거나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뇌물을 받아서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단기적으로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장기적인 성공은 될 수 없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는데 마침 다시스로 떠나는 배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가는 길이 순탄해 보였지만 결국 요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풍랑이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7).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 37:9). 

여기서 말하는 땅은 이 세상에서의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땅을 차지한다고 해도 죽고 나면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며 선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한 새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고 영원한 땅을 차지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Ⅲ. 유혹에 넘어간 결과(Results) 

불순종도 때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 20:11). 하나님이 모세에게 반석을 명해서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반석을 한 번 친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치지 말고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그만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친 것입니다. 그런데도 물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물은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불순종에 대해서 형벌을 부과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형벌(punishment)과 징계(discipline)는 다릅니다. 불신자에게 형벌을 내리시지만 신자에게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 12:5~6). 

형벌을 받는 사람은 지옥에 가지만 징계를 받는 사람은 천국에 가되 괴롭고 힘들게 가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받은 징계는 가정불화였습니다. 첫 번째로 하갈은 잉태하고 나더니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4). 

하갈은 애굽의 여인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바로 왕이 아브람에게 선물로 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천한 신분의 여인이 갑자기 주인의 자식의 어미가 된 것입니다. 장희빈이란 여인도 어머니가 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물이 좋아서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숙종의 눈에 들게 되고 궁녀로 들어가 자녀를 낳게 됩니다. 비천한 여인이 왕의 아들을 잉태하고 나니까 중전을 멸시한 것입니다. 잠언 30장에 보면 세상에 견딜 수 없는 것 서넛이 있다고 나옵니다. 그중에 하나가 계집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라고 나옵니다. 계집종이 주인의 눈에 들어 주인의 부인을 쫓아내고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그만큼 나쁜 것이라고 잠언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하갈은 자기가 누구의 은혜로 잉태하게 되었는가를 잊어버렸습니다. 자기의 여주인 사래가 제안을 해서 자기가 자기 주인 아브람과 동침하여 자식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누구에게서 얻은 것입니까?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입니까? 생명을 노력해서 얻은 분이 계시면 나와 보십시오. 시간은 누구에게서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뺏으시면 당장이라도 뺏길 수 있는 것이 시간입니다. 부, 행복, 구원, 영생, 소망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누가 주었는가를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래는 아브람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16:5). 

여종인 하갈이 자기를 멸시하면 하갈을 불러다가 야단을 쳐야 되는데 남편인 아브람에게 책임을 돌린 것입니다. 사래에게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먼저 하갈을 취하겠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전적으로 사래가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래는 자기의 책임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남편에게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평소에는 사래가 남편을 ‘나의 주님’이라고 칭하며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질투심이 들어오고 모멸감이 들어오니까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고 책임을 전가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아브람은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람은 하갈도 부르고 사래도 불러서 하갈을 야단치며 사래에게 복종하라고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창 16:6). 

아브람은 이런 상황에서 완전히 책임을 회피한 것입니다. 사래가 제정신이 아닌데 당신 뜻대로 하라고 하니까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갈을 핍박하고 광야로 쫓아낸 것입니다. 아무리 하갈이 잘못했다고 해도 아브람의 자식을 잉태했는데 광야로 쫓겨나 굶어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 16:9). 

주인집으로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사래에게 복종하여 살라고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아브람이 회피한 책임을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당시에 가정불화만 겪은 것이 아닙니다. 하갈의 자녀인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사래가 낳은 이삭의 후손들은 대대로 지금까지도 싸우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유혹에 넘어간 결과가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성도가 유혹에 넘어가면 징계가 옵니다. 여러분은 재리의 유혹, 정욕의 유혹, 영적인 유혹 등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유혹에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말씀 안에 있지 못하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특징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다 이겨내셨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4).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에 이끌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에 이끌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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