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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종말을 준비하는 지혜 (눅 16:1-13)

첨부 1


종말을 준비하는 지혜 (눅 16:1-13)


I. 종말 의식 

시골마을들을 찾아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꾸미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는 스튜디오까지 올라와 퀴즈대회를 즐겼습니다. 진행자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깁니까?”라고 물었지요. 어떤 팀은 호랑이, 어떤 팀은 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호랑이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을 못합니다. 사자라고 대답한 팀에게 왜 사자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물었더니 할머니 한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사자가 무섭지요. 호랑이든 사람이든 다 잡아 가는 건 저승 사자예유.” 스튜디오 안은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이 시간이라도 부르시면 힘쎈 권력도, 건강했던 몸도, 쌓아둔 재물도 다 소용없습니다. 모든 인생에겐 끝이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의 인생관이 다른 것은 종말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출발점을 가진 인생은 반드시 종착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젠가 끝이 있음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마지막이 있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살았으나 죽을 날이 있고, 건강하나 병들 날이 있고, 성공해도 실패할 날이 있고,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내려올 날이 있습니다. 문제는 시작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듯이 끝나는 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타종교에서는 역사나 인생이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윤회니 전생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관, 시간 개념은 직선적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해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로 끝이 납니다. 창조로 시작해서 종말로 막을 내립니다.

종말의식은 모든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아니 삶의 기준 자체를 바꾸어 줍니다. 옛날에 좋았던 것들이 종말의 안경을 쓰고 보면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시시하게 보이는 것들이 귀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큰집이나 높은 지위도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왜 진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늘 종말론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영원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천국뿐입니다. 이 땅은 장망성입니다. 장래 망할 성이지요.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주님께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진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종말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삶이 무기력해졌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메시지가 교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 흐려졌습니다. 마치 이 세상이 영원히 살 장소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천국 갈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신자처럼 삽니다. 불신자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불신자처럼 이 땅에 미련을 두고 삽니다. 때문에 성도들이 허약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변화시킨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세상이 아닌 천국을 소망했고 늘 종말론적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교회를 말할 때마다 초대교회를 말합니다. 
1세기 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 생명력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로마를 복음화했고 세계를 살려냈습니다. 도대체 그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바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 - 종말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눈을 뜨며 “주여 오늘 오십니까?”라고 물었고 밤에 커텐을 닫으며 
“이 밤에 오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늘 
“마라나타” - “주께서 다시 오십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마지막에 대한 긴박감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오고 고난이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종말이라는 희망의 빛에서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기에 늘 희망으로 넘쳐났습니다. 기독교 교회사를 보면 진지한 영적부흥과 도덕적인 각성이 일어난 시기는 한결같이 종말론적인 믿음운동이 일어나던 때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말론이란 시한부 종말론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시간이 길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최후심판대의 관점에서 오늘의 일들을 평가하는 자세입니다. 

행여 생의 목적이 이 땅에서 잘 되는데 있고 모든 관심이 이 세상일에 집중되어 있다면 우리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식을 잃고 나면 방향키를 잃은 한척 배와 같아집니다. 종말의식을 잃고 나면 세상을 살릴 영적 능력도 잃고 맙니다.

II.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우라

오늘 본문을 읽는 안경은 바로 종말론입니다. 본문을 흔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의 난해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윤리라는 안경을 끼고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종말론적인 지혜로 풀어야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윤리적인 어떤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또 청지기의 잘못된 행위자체를 칭찬한 것도 아닙니다. 본문의 주제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지혜입니다. 「지혜있는 자가 되라」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종말론적인 지혜를 배우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때때로 동물에게서도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악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뱀에게서도 지혜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분문의 초점과 핵심을 놓치면 큰 오해를 가져 올 수도 있는 비유입니다. 
옛날에는 부자들이 자기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청지기를 두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고용된 종이면서 수하에 또 다른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주인의 재산과 일꾼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집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토록 신임을 하고 일을 맡긴 청지기의 경리에 부정이 있다는 고발을 받았습니다. 사정을 물을 때 청지기가 아무런 변명이나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은 것을 보면 자신의 부정을 시인한 것 같습니다.

아마 어떤 모양으로든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결산을 명령하고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해고를 통고합니다. 
이때 청지기의 독백 형식으로 자신의 남은 생애를 걱정하며 본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눅16:3-7)
이건 분명히 공무서 위조요, 공금횡령죄입니다. 이 청지기의 행위는 불의한 짓이요 용서 받을 수 없는 또 다른 사기 행각입니다. 

그런데 이 사기꾼 같은 청지기를 주인이 칭찬했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이 청지기의 지혜를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사건, 이해가 되십니까? 이 비유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본문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리를 맡은 것들 중에서 나누어 줄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늘어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이 교육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나누어 줄수록 내게 넘칩니다.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사랑이란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사랑을 내 가슴에 혼자 움켜 쥐고 있으면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나 이것을 나누어 주면 더욱 사랑이 풍성해 집니다. 
그리고 본문이 말하는 초점은 청지기의 위조행위나 사기극을 배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의한 행동을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종말을 준비한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핵심은 8절입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을 위해 준비하는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무리 보아도 세상사람들이 더 지혜롭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직장에서 물러날 것을 미리 준비하고 연금 준비를 합니다. 나중에 살 집을 사기 위해 지금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생합니다. 짤막한 이 세상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보험이 발달합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썩어질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 보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자 봐라 이 세상에 소위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내일을 위해 오늘을 어떻게 지혜롭게 준비하는가! 영원한 가치가 없는 이 땅의 것을 위해서도 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 너희들은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느냐? 
이 땅에서도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건강준비, 노후경제준비, 친구준비, 사역-일거리 준비를 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III. 주인은 따로 있다

여기 불의한 청지기가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에게서 지혜를 배우라고 했을 때 어떤 지혜를 배우란 말입니까? 

첫째, 인생 모두에겐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신 분, 그리고 정확히 회계 감사를 하실 그분, 상을 주시기도 하고 나를 파면하시기도 하는 주인이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 위기가 오기전까지 청지기는 주인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을 두려워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몸져 누워보면 내 몸이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사형선고를 받고 나면 시간과 생명이 내 것 아님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아시지요? 
맘껏 쌓아놓고 내 영혼아 먹고 마시자고 외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좋은 재능 받았으면 하나님이 주신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한 마리 강아지도 주인을 알고 삽니다. 하물며 사람이 제 주인을 모른데서야 말이 됩니까? 시간과 계절의 오고감 속에 시간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새롭게 의식하십시다. 이것이 바로 절기가 주는 은혜입니다. 

한해의 절반을 뒤돌아보며 감사하는 이 시간 – 남은 시간도 주인이 있음을 알고 사십시다. 사실 이 청지기는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동안 주인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주인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야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계산을 하자고 할 때 비로소 ‘나에게도 주인이 있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나의 이야기요, 너의 이야기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고백대로 하루하루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큰 잘못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디도서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부정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내 관념 속에, 내 이론 속에, 내가 기도할 때만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언어로 “주여”라는 말을 하지만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날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신학에서는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오늘 주신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청지기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나마 자기에게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사실조차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차라리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우라는 겁니다. “네게도 주인이 따로 있다.” 믿습니까?
성경에서 회개란 바로 이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IV. 나는 청지기일뿐

이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워야 할,
두 번째 지혜는 뒤늦게 나마 내가 누구인가?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청지기였구나!

흥청망청 낭비할 때는 자신이 주인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으로부터 최후 통첩을 받고 보니 자신이 청지기임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입니다. 청지기는 관리권이 있을 뿐 소유권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 다 주인의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권과 함께 주인의 회수권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인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것을 회수할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회수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몸은 우리 몸이기전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때문에 건강을 돌보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이 류목사야 똑똑히 들어! 

역대상 29장 12절에서는 “부와 귀와 권세와 능력이 다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재산도 주의 것이요 수입이 얼마든 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재능도 은사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는데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써야 합니다. 

청지기는 많이 받았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청지기는 적게 받았다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청지기의 지혜를 배우십시다. 낭비하고 산 지난날을 돌이켜 회개하십시다. 주인은 그가 비록 악한 청지기 일찌라도 청지기로서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그것이 귀하다고 칭찬하십니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재주로, 노력으로 번 것이기 때문에 재산만은 자기 멋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닐 수 있는 몸도 내가 준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결론이 13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여기서 재물은 맘몬 – 즉 돈귀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과 가치관을 보려면, 
그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늘 더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와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 셋을 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말로 키소, 코소, 카소라고 합니다. ① 키소란 돈 주머니란 뜻으로 그가 돈을 어디에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② 코소란 술잔이란 뜻인데 그가 인생의 재미를 어디서 찾는가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③ 카소란 노여움, 열정을 말합니다. 뭘할 때 신이나고 어떤 일을 보고 분노 하느냐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키소, 코소, 카소는 무엇입니까?

하바드 대학 총장을 지낸 트루엇박사는 텍사스주에서 석유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부유한 가정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에 이 주인이 박사에게 자기 자랑을 합니다. “저는 25년 전에 빈손으로 이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많은 고생과 노력으로 지금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저 동쪽에 있는 석유공장도 제 것이고, 서쪽에 있는 유전도 제 것입니다. 남쪽에 있는 집도 제 것이고, 북쪽에 있는 빌딩도 제 것입니다.” 하고 주위를 삥 둘러보며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트루엇 박사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동서남북 모두다 회장님 것들인데,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 하늘나라를 위해 무엇을 쌓고 사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이 당신의 재미가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선을 더 행하지 못해서 억울하고 세상에 메여 살다보니 교회사역 더 열심히 못해서 안타깝습니까? 

저 하늘에 당신은 무엇을 쌓아 놓았습니까?  이 땅에서 복을 받아 잘 살던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빈손 든 거지처럼 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당신은 청지기 일뿐인 것을. 

V. 종말이 있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워야 할 세 번째 지혜가 있습니다. 
청지기는 셈해야 하는 시간 - 종말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 청지기는 자신의 시간에 끝이 있음을 알고 오늘의 기회를 선용했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데 투자했습니다.

여러분 내겐 셈해야 할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겐 남은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어렵다고 한탄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100년전 이 땅의 제일 부자보다 잘 입고 잘 먹고 더 편리하게 삽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남은 시간이 있고 남은 재능이 있고 남은 물질이 있습니다. 
없는 중에도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모르는 중에도 아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잃은 것을 탄식합니다. 어리석은 일이지요. 과거에 잃은 것만 생각하는 인생은 언제나 적자 인생입니다. 그러나 남은 것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인생을 선용하는 사람은 흑자 인생이 됩니다.
끝을 기억하고 사십시다. 결산 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 2절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언젠가 한번은 나도 이 말씀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제 그 땅 일을 끝내고 천국으로 오너라 – 셈을 해 보자!

본문의 청지기는 지금까지 낭비하는 인생을 살았으나 마지막 기회를 잘 이용해서 칭찬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갑니다. 세상도 갑니다. 언젠가 나도 가고 너도 갑니다. 마지막을 알아야 합니다. 종말의 때를 위하여 살 줄 알아야 합니다. 

100년전에 살았던 알프레드 노벨을 아시지요.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당대에 명사가 되었고 수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한 몸에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깜짝 놀랄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죽음의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집안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잘못알고 노벨이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기사 앞에서 이 사람은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라고 보도한 신문을 찢어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레도 노벨의 「노벨상」이 시작된 유래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VI.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의 주인이 있습니다. 그 분 앞에 나는 청지기 일뿐입니다. 그 분 앞에서 내가 받은 시간과 물질과 은사들을 셈해야 하는 종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은 퍽 재미있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성경에서 불의의 재물이라는 말을 할 때 이 말의 일차적인 뜻은 “불의가 개입된 돈” 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의 재물은 불의가 개입되기 쉽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살인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돈과 불의는 너무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짓말 한번 하지 않고 돈벌게 되던가요? 사장님들, 직원들에게 날마다 칭찬만 들으면서 돈을 벌게 되던가요?

불의의 재물이라는 두 번째 뜻은 “곧 없어질 재물”이라는 뜻입니다. 재물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붙잡아 놓으려해도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는 것이 재물입니다. 그러므로 가지고 갈 수 없는 재물을 손에 움켜잡고 죽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남겨둔 재물은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어머니 말씀을 기억합니다. “돈이란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없지만 먼저 보낼 수는 있는기라!”수의엔 주머니가 없습니다. 

불의의 재물이라는 세 번째 의미는 “남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것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 쓰고 가야 합니다. 

다 안 쓰면 결국 남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겨진 재물은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잘 사용한 재물만이 하늘에 영원하고 참된 것으로 쌓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먹은 것만 내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에 쌓은 것만 내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본문에서 ‘친구를 사귄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친구를 만든다는 말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는 복음전도를 위해서 돈을 써 천국의 친구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물질을 써야만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물질은 가장 값지게 쓰여진 물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키우라”는 뜻입니다. 

14절 이하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친구들 만들라는 말의 뜻은 분명해집니다. 
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는데 물질을 사용하라.
② 전도하기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라. ③ 인물을 기르는데 너의 물질을 사용하라! 

주님은 “불의의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면 그 물질이 다 없어졌을 때 당신은 영원한 처소로 영접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당신이 사용한 그 시간이 -
당신이 사용한 그 물질이 - 영원한 처소에서 당신을 기다리게 하란 말입니다. 
당신이 투자한 그 자원들이 영원한 처소에서 당신을 영접하고 환영하게 하란 말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가치를 두고 영원한 세계를 위해 투자하며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시간을 종말론적으로 쓰십니까?
여러분은 물질을 종말론적으로 쓰십니까?
여러분은 은사를 종말론적으로 쓰십니까?
여러분은 사람관계를 종말론적으로 쓰십니까?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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