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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안을 부르는 6대 요소 (시 37: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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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부르는 6대 요소 (시 37:30-40)
  
< 평안의 축복 > 
  
‘우리 생애 최고의 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해럴드 럿셀은 2차 대전 중 두 팔을 잃습니다. 처음에는 깊이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수록 삶의 의지가 생기면서 의수로 글도 쓰고 타자도 쳤습니다. 나중에 그 얘기가 영화화되고 자신도 직접 배우로 출연해서 결국 그해 아카데미 조연상을 탔습니다.
  
시상식 때 기자가 물었습니다. “두 팔을 잃어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절망했지만 기도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면서 더 소중한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 잃은 것만 생각하지 않고 남은 것으로 감사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10배로 보상해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우리보다 더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꼭 붙잡고 살면 극심한 고통과 시험 속에서도 대 평안을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결국 인생의 성패는 하나님을 얼마나 꼭 붙들고 사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평안의 축복입니다.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아도 평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마약을 찾습니까? 인위적으로 평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왜 요가와 명상과 운동을 하고 사우나와 불가마를 찾습니까? 그것도 평안을 얻기 위한 방편입니다. 앞으로 평안을 얻으려고 더 연구하고 그 방면의 산업도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단들이 잠시의 안정은 줄 수 있어도 진짜 평안은 주지 못합니다.
  
요새 왜 사람들이 건강에 관심이 많습니까? 몸이 힘들면 자기 생각과 의지와는 달리 평안이 깨질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건강에도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가끔 보면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건강을 소홀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남용입니다. 휴식과 놀이에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 마십시오. 성도는 잘 놀 줄도 알고 잘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건강도 사려 깊게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 평안을 부르는 6대 요소 >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추구는 행복에 대한 추구입니다. 왜 돈을 벌고 권력을 잡으려고 합니까? 그러면 행복해질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행복은 평안이 있어야 주어집니다. 평안이 없는 행복은 없습니다. 어떻게 평안을 얻을까요? 시편 37편은 의인과 악인의 모습과 결말을 잘 대비해서 노래한 다윗의 시편입니다. 이 시편 본문을 통해 평안을 부르는 6가지 요소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 지혜로운 입
  
본문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의인은 정의를 말해도 지혜롭게 합니다. 가끔 보면 어떤 사람은 말을 지혜롭고 은혜롭게 참 잘합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즐거워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얼굴에 미소가 피어납니다. 싸구려 칭찬과는 달리 그 말을 들으면 영혼에 기쁨을 주는 깊은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동시에 그의 영혼의 깊이와 높이가 느껴집니다. 그런 지혜로운 언어생활을 추구하십시오. 
  
가끔 말을 내뱉어놓고 그 말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진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 그때 다짐합니다. “다음에는 말수를 줄이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자!” 남의 심정은 살피지 않고 막무가내로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반응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지만 착하고 여린 사람은 “자기 말이 혹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가?”를 살피고 다음부터는 말수를 줄이거나 지혜롭게 말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가끔 자만이 느껴지는 말과 가시 돋친 말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안타까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혜로운 언어생활의 체질화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언어 문제로 인간관계에 금이 생기고 그것 때문에 평안을 잃는 일이 자주 생긴다고 입에 자물통을 달고 아예 말을 안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차선책입니다. 말을 아예 안 하면 그것도 남을 크게 신경 쓰이게 만듭니다. 중요한 것은 말로 생기는 문제로 인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속 그 문제를 극복하는 훈련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말로 인해 평안을 잃는 일을 점차 줄일 수 있게 되면서 남들도 그의 말을 통해 기쁨과 평안을 얻는 일도 많아질 것입니다. 

  
2. 듣는 마음 
  
본문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왜 의인의 걸음에 실족함이 없습니까?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은 어디서 생깁니까? 말씀을 잘 듣는 귀에서 생깁니다. 결국 ‘듣는 귀’가 있을 때 ‘듣는 마음’도 생겨나면서 그때 그의 걸음에는 실족함도 없고 평안도 잃지 않게 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자신이 완벽해야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실 줄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한 삶’을 원하시지 않고 ‘말씀에 열린 귀’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를 힘쓰면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를 힘써 들어주실 것입니다. 결국 순종하는 마음이 축복을 예비하는 가장 복된 마음입니다.
  
살면서 체험하는 놀라운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맞는 길을 가도 불순종하면 이상하게 평안이 없고 틀리는 길을 가도 순종하면 이상하게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종이 평안의 핵심요소란 뜻입니다. 그렇다고 리더가 틀리는 길로 가도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양떼가 기도해야 할 가장 큰 기도제목은 리더가 틀리는 길로 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결국 좋은 리더를 만나 그 리더가 바른 길로 가서 기쁘게 순종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3. 믿음의 눈
  
본문에는 유난히 보는 것과 관련된 표현이 많습니다. 본문 32절에는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spy) 살해할 기회를 찾아본다(seek).”는 표현이 나옵니다. 본문 34절에는 “여호와를 바라보라(waif for).”는 표현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본다(see).”는 표현이 나옵니다. 본문 35절에는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seen).”이란 표현이 나오고 36절에는 “내가 찾아도(look for) 발견하지(found) 못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본문 37절에는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consider) 정직한 자를 보라(conserve).”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의인이 악인에 의해 죽도록 그냥 두고 보시지 않는다고 노래합니다(32-33절). 또한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대로 살면 땅도 차지하게 되고 악인이 끊어지는 것을 똑똑하게 볼 것이라고 노래합니다(34절). 더 나아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 악한 세력이 번성하는 것 같아도 얼마 후에는 없어져서 찾으려고 눈을 씻고 봐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고 노래합니다(35-36절).
  
현재의 번성이 무조건 축복은 아니고 반대로 현재의 소수가 무조건 실패는 아닙니다.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중요하고 현재의 화려한 번성보다 미래까지 지속되는 번성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부족함에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믿음의 눈으로 보고 내일의 찬란한 세계를 꿈꾸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눈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4. 화평한 삶
  
본문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이 말씀은 화평하게 지내는 사람이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란 암시를 줍니다. 즉 겉으로는 정직하게 보이는데 그가 남과 잘 싸우고 불화를 잘 일으키면 실제로는 그의 어딘가에 위선적이고 정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남과 평화롭게 잘 지낼 줄 아는 삶이 중요합니다.
  
더불어 살 줄 아는 사회적인 성숙은 평안을 주는 핵심요소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에 가면 로마인처럼 살고 유대에 가면 유대인처럼 살면서 누구하고도 잘 살고 어디 가도 잘 사는 사람이 되십시오. 어디에나 문제와 갈등은 있고 꼴 보기 싫은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 때문에 자기 자리를 이탈하지 마십시오. 만약 자리를 옮기는 상황이 되어도 사람 때문에 옮기지 말고 사명 때문에 옮기십시오.
  
함께 어울려 잘 사는 법을 더 배우고 더 힘쓰십시오. 그런 화평한 삶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감사의 체질화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이제까지 잘 살고 있는 것은 남의 덕 때문입니다. 밥 한 톨도 남이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런 인식을 통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체질화시키면 점차 사회적인 성숙도가 높아집니다. 사회적인 성숙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고 자기 개발을 통해 자기 변화를 추구하며 감사를 결단해야 이뤄집니다.
  
교육학에서는 부모가 너무 똑똑하게 잔소리를 많이 하면 자녀들의 창의성이 부족해지고 개척정신과 성취의욕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점수가 낮아도 “얘야! 그래도 너를 믿는다.”라고 해야 하는데 “너 죽고 나 죽자. 이 점수가 뭐냐!”라고 충격요법을 쓰면 자녀는 더 못하게 되고, 혹시 한정된 과목의 시험점수는 높게 나와도 다른 사회적인 요소에서는 펑크가 나고 장애가 생길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맘대로 해봐. 너를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주는 삶에서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느 날, 한 대기업 회장에게 누군가 성공비결을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일이 안되면 ‘그가 뭘 아나요? 제가 망쳤죠.’라고 했고 일이 잘 되면 ‘제가 뭘 아나요? 그가 다했죠.’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믿어주자 좋은 사람도 만났고 좋은 인맥도 얻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 남 탓을 하는 습성을 반드시 버리십시오. 남을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사회적인 성숙함이 있어야 성공 가능성도 커지고 평안 지수도 높아집니다.

  
5. 살려주는 삶
  
본문을 보면 다윗은 의인과 악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즉 악인은 ‘남을 살해하려는 사람’이고 의인은 ‘남을 살려주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반드시 멸망하지만 의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구원해주신다고 노래합니다(38-39절). 이제 살면서 남과 평화롭게 잘 어울려 사는 정도의 삶에서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남을 힘써 도와주려고 하십시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넘치는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왜 물질을 추구합니까? 많이 쌓아서 편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이 나눠서 평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경제적인 성공도 추구하십시오. 너무 가난하면 성인이 되지 않는 한 비굴해지기 쉽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도 많습니다. 청빈을 중시하는 태도는 명분은 좋게 보이지만 복된 태도는 아닙니다.
  
어느 날, 주인이 세 명의 종을 불러 각각 다섯 냥, 두 냥, 한 냥을 주어 일하게 했습니다(마 25장). 때가 되어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요구하자 다섯 냥과 받는 자와 두 냥 받은 자는 말했습니다. “주인님! 열심히 일했더니 두 배를 얻었어요. 이것 보세요.” 그때 주인은 둘에게 똑같이 말했습니다. “잘했구나! 착하고 충성된 종아! 다 가져라! 함께 즐기자!” 그때 한 냥 받은 자가 와서 말했습니다. “주인님! 주신 것을 땅에 깊이 묻어두자 녹이 슬었네요. 그래도 청빈하게 살았어요.” 그때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고 준 한 냥도 빼앗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주어진 달란트로 최선을 다해 재화를 창출하고 미개척 영역을 거룩한 경작지로 만들어가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말했습니다. “최고로 많이 벌어서 최고로 많이 쓰라.” 그러므로 이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거룩한 큰손이 되어 많이 나누게 하소서.” 천국 장부에는 잘 쓴 돈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축복의 물을 퍼내면 축복이 샘이 넘치지만 축복의 물을 고이게만 하면 축복의 샘이 막힙니다.
  
이제 많이 벌고 많이 나누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처음 하신 말씀이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 예수님도 과실을 맺도록 제자를 선택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요 15:16). 하나님은 물질에 초연한 청빈한 삶보다 물질적인 영역을 정복하고 나누는 삶을 더 기뻐하십니다. 자기만 위해 살면 나중에 회한만 남지만 많은 사람들을 돕고 살려주면 삶의 보람도 넘치고 마음의 평안도 넘치게 됩니다. 

  
6. 구원의 확신
  
악인들을 미래가 없지만 의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해주십니다(38-39절). 그처럼 내일의 구원과 승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또한 천국 확신도 분명해야 합니다. 천국 확신이 없으면 천하없어도 평안이 없습니다. 집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각박하게 살듯이 미래와 내세와 천국 확신이 분명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고 각박하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의 마음과 머리는 천국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도 입만 열면 천국 복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죽으면 천국의 크신 상급이 기다린다고 확신하니까 어떤 상황도 그의 평안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결국 인생 최대의 문제는 돈과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 믿음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처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를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다윗은 노래합니다(40절).
  
참 평안은 소속이 분명할 때 찾아옵니다. 옛 말에 “한 사람에게 매임이 가장 큰 자유임을 아는 사람만이 결혼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발적으로 매이는 것은 오히려 놀라운 자유와 평안을 줍니다. 그처럼 주님께 매여 몸과 마음과 삶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면 어떤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매인 영혼을 사랑과 축복의 쇠사슬로 더욱 힘 있게 매어주실 것입니다.

  
< 축복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간절히 주시길 원하셨던 것이 바로 평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진짜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지만 진짜 평안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주어집니다. 살면서 가끔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왜 이리 살기가 힘들고 고달픈가?” 그렇게 탄식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오. 왜 삽니까? 이 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 분명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분명한 일을 발견한 사람은 탄식할 겨를이 없습니다. 특히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정당한 일이고 자신에게 맞는 일이란 확신이 있으면 그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과 평안을 늘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왜 합니까?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합니까?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면 성공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돈을 벌려고 그 일을 합니까? 그처럼 돈만을 목적으로 살면 혹시 돈은 벌어도 평안은 얻지 못합니다. 지금 하는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과 편의를 주고 재화를 창출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하십시오. 그 목적이 분명하면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확신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매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반드시 승리와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믿음을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새롭게 하십시오. 혹시 가는 길에 고난과 시련이 있을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승리하고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탄이 주는 실패의 소리와 실패의 영상을 떨쳐버리십시오. 그리고 실패를 자주 말하는 사람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며 자신의 의식부터 승리를 지향하게 하십시오.
  
실패자는 대개 실패자를 주로 찾고 성공자는 대개 성공자를 주로 찾습니다. 유유상종입니다. 참새는 참새끼리 모이고, 돼지는 돼지끼리 모이고, 학은 학끼리 모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공자는 언제나 소수이기에 유행과 바람을 따라 떠도는 의식 없는 대중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 발전과 승리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대중 속에 속하면 세상 줄도 잘 끊지 못합니다. 주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지내게 하고 산 자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창조적인 소수가 되게 하소서!”
  
실패자는 실패적인 요소와 속성이 있는 사람만 따라다닙니다. 그렇게 살면 결국 자신도 축복의 중심대열에서 밀려납니다. 일전에 한 사람이 유머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처럼 밀려나는 사람도 있어야죠.” 물론 어디든지 밀려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자신이 밀려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실제 삶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지 않고 실제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그처럼 추상적인 종교생활을 통해 실제 삶에서 변화를 창출해내지 못하면 축복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서당 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고 큰일을 했습니다. 그처럼 믿음의 세월들은 변화의 세월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예배자나 종교인을 만들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점차 인성도 변해야 하고 축복의 내용도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받은 축복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려고 해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손바닥의 앞뒤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가면 얼마든지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성공자의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요? 또 다른 성공자를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류현진 선수의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요? 1년에 50억씩 벌고 많은 한국인들의 성원을 받는 것도 축복이지만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로 기록될 가능성이 큰 커쇼나 저돌적인 투사인 푸이그 같은 타자와 친구나 형제처럼 어울리며 지낼 수 있는 인맥을 가지게 된 것도 그에 못지않은 큰 축복입니다.
  
성공했다고 끼리끼리 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공의 남용입니다. 성공을 통해 얻은 인맥을 잘 선용해서 음지의 인생들을 더욱 힘써 돕는데 활용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성공이 얼마나 빛나는 성공이 되고 또한 그때 주어지는 보람과 평안도 얼마나 크겠습니까? 왜 축복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까? 축복은 새로운 축복을 부르고 그 축복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눌 때 보다 큰 기쁨과 행복과 평안을 얻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늦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전의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영혼 구원’과 ‘은밀한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목적이 분명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반전의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참된 평안은 세상에서 얻지 못합니다. 얻어도 일시적입니다. 참된 평안은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온전히 매여 살면서 열심히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참된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평안이 넘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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