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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엠마오 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눅 2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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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 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눅 24:13-17)


심리학자들이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은 다음 완전히 밀폐합니다.  빛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해놓으면 그 쥐가 3분 안에 죽습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희망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독에 쥐를 넣고 뚜껑을 닫을 때에 빛이 조금 들어가게 해주면, 이 경우의 쥐는 36시간이나 살아 있습니다.  똑같은 여건입니다.  쥐가 스스로 밖에 나올 수도 없고, 먹을 것을 넣어준 것도 아닙니다.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 빛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 삶의 의미에는 소망이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서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가정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예수님이 때로는 내 삶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공허하고 깊은 침묵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똑같은 고민을 마더 테레사의 다음의 이야기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1979년 12월 11일, 이미 추위가 시작되고 있었던 때에 북유럽 오슬로 공항에 인도 전통 의상의 사리를 걸치고 샌들을 신은 채 비행기 트랙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녀는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영예로운 상인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 그곳에 온 것입니다.  그녀는 노벨 수상식의 하이라이트인 수상 소감 연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주고 받는 미소 가운데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유명한 연설을 하기 꼭 세 달 전인 9월에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고해 신부 마이클 반 데르 피트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고백을 토로합니다.
"예수님은 신부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갖고 계신 듯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지금 침묵과 공허함만이 가득합니다.  저는 눈을 뜨고도 그분을 보지 못하고, 귀를 열어 듣고자 하나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으며, 기도하고자 혀를 움직이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 믿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제 마음 깊은 곳 거기에는 온통 공허와 어둠뿐입니다.  제 안에는 해답 없는 의문들이 너무나 많이 살고 있습니다.  제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석달 후 노벨 평화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는 제 마음에 계십니다"라고 외치던 그 동일한 인물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석달 전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은밀한 고백을 토로하면서 "제 믿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제 마음은 온통 공허와 흑암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전혀 다른 메시지는 마더 테레사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에 의문을 갖게 합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마더 테레사의 모습일까요?  저는 둘 다 그녀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장 승리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때로는 깊은 회의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 마더 테레사의 불신앙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녀의 정직한 내면과 치열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탐색하는 내면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영성학자들은 이런 경험을 가리켜서 일찍이 "영혼의 어둔 밤"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진지한 성도들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어둔 밤을 지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낮과 밤이 있듯이 모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신실한 사람에게도 때로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어두운 밤이 찾아올 때 이런 밤길을 어떻게 지나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는 석양이 지는 시각에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어두워져 가는 엠마오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예수님의 두 제자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13절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가 언급하고 있는 엠마오라고 하는 곳이 오늘의 어떤 장소이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에 가면 엠마오라고 주장하는 곳이 네 곳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지 순례를 가이드하는 사람들은 헷갈리기 때문에 엠마오에는 아예 데리고 가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엠마오의 후보지로 두 곳이 있습니다.  한 곳은 성경의 증언처럼 예루살렘 북서쪽 25리 내에 위치한 지금의 '쿠베이베'라는 곳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여기에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글로바의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엠마오를 기념하는 교회도 이곳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이 쿠베이베라는 지역보다 엠마오의 성경적 지형에 가까운 곳으로 오늘의 라트룬 언덕에 위치한 니코폴리스라는 지역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이 지역은 엠마오와 발음이 유사한 '암마우스'라고 불리워졌던 곳입니다.  지금 이 지역에는 많은 아랍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오래된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들을 발굴해서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이 곳이 본래의 엠마오일 것이라고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여쨌든 바로 이곳 엠마오로 향해서 소망을 잃어버린 채 신앙적으로 낙심한 두 제자가 절망 속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 길에는 회의의 짙은 어두움이 깔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한 시점에서 이 엠마오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무리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엠마오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에서 엠마오 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성도의 여정에도 영혼의 어두운 밤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보면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자신과 제자들에게 찾아올 영혼의 어두운 밤에 대해서 예언을 하십니다.  앞에 있는 스크린을 보면서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우리 모두가 다 홀로 있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며, 그때에는 너희들도 제각기 흩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정확하게 지금 엠마오 길의 두 제자는 각각 고독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 그들은 모든 신앙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접고 이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누가복음 24장 18절에 보면 이 두 제자 중에 적어도 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는 글로바라는 제자였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글로바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형제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는 글로바의 아들인 시몬이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시몬은 예루살렘교회의 최초의 감독이었던 그의 종형인 야고보의 뒤를 이어서 두 번째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열두 제자의 반열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모든 희망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고향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17절은 그들의 절망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슬픈 빛을 띠고", 다른 성경에서는 "침통한 표정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사색이었습니다.  희망을 잃었습니다.  모든 의욕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한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도 무거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 중에도 최근에 인생의 한 걸음을 떼어놓을 용기를 잃어버린 채 한 자리에 머물러 서 있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미소와 찬양을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오래 되셨습니까?  부르짖어 간절히 기도했지만 기도의 응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나 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그런 메마르고 고독한 밤, 바로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에 우리는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고 말합니다.  첫 사랑의 은혜라고 할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예수님의 임재의 감미로움과 기도의 응답,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넘쳐납니다.  이것은 초기에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중기나 후기에 접어들면서 뜻밖에도 이런 영혼의 메마르고 어두운 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찬양을 해도 가슴에는 냉랭함만 가득합니다.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를 해도 응답이 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는 하실까?"  갑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자신의 신앙에 대한 회의와 싸워야 하는 그런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기야말로 진정한 영적 성숙을 추구해야 할 때라고 믿음의 선배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 내 삶에 깊이 느낄 수 있도록 다가왔습니다.  비록 지금 이 순간 그런 느낌은 사라졌지만 이런 순간이야말로 이제는 하나님의 위로보다 하나님 자신을 대면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대면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대면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몸으로 체험되어지는 어떤 현상만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만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신비주의나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현상이나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비록 처음 믿을 때처럼 느낌이 강력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결코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니라는 확신 속에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인격적 체험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행여나 느낌이 사라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결론을 결코 서두르지 마십시오.

이제는 하나님의 위로도 하나님의 사랑의 부드러운 느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때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대면해야 할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위로의 느낌도, 찬양의 감동도 없어졌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실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구요?  엠마오 길에서 주는 또 다른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 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두 번째는, 영혼의 어두운 밤길에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본문의 15절과 1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왜 그랬다고 했습니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다시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눈이 열렸습니다.  영어에는 바로 이런 경우를 가르쳐 '눈이 열리는 체험'(eye-opening experience)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런 눈이 열리는 순간이 기도를 하다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는 식탁에서 눈이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은 기도하는 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밥을 먹는 식탁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기적은 교회당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 바깥에서, 아니 우리 집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과거의 기독교인들, 특별히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지나치게 교회당 안에다가 가두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당 안에만 계시는 것으로 인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는 거룩합니다.  그러나 교회당 바깥을 나가는 순간 거룩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가리켜서 이원론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한국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예배는 거룩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그런데 교회 마당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거룩과는 전혀 상관없는 속된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 속에서의 우리의 삶은 어쩌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면 되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중요한 개혁 가운데 하나는 성과 속,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도록 우리의 눈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교회당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당 바깥에서도 일하십니다.  그래서 가정과 우리의 일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신앙은 기독교 미술 세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가 세계의 미술사를 공부해 보면, 종교개혁과 함께 기독교 미술 세계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 개혁 이전의 미술가들은 밤낮으로 성화만을 그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그림들만 그렸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의 미술가들은 거룩함과 속된 것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일상의 정물이나 자연을 그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의 하나님, 그래서 일터의 하나님, 가정에서의 하나님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유명한 화가인 렘브란트가 바로 이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라는 그림을 그립니다.  과거에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거룩한 성화만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식탁에서 눈이 열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하인이 빵을 배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눈이 열린 두 제자가 자신들 앞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주 놀라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두 제자가 놀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렘브란트 이전의 화가인 카라바지오는 더 인상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똑같은 '엠마오의 저녁식사'입니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그런 모습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수염도 없는 평범한 청년의 너무나도 귀여우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알아차린 두 제자들이 놀라는 인상이 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이 놀라운 장면을 보십시오.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예배의 자리에서만 아니라 식탁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후 청교도들은 그들의 식탁 벽에 이런 인상 깊은 글자판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식탁의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고,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고 계시는 분이시다."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을 더욱 사랑하라'는 책에 보면 인도 땅 마더 테레사의 사랑의 선교회를 방문했던 이 책의 저자가 그곳에 가서 가장 먼저 놀라는 것은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서 모든 봉사자들은 요리, 청소, 식사 준비, 배식, 세탁, 환자 돌봄 등 모든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런데 이 모든 것들보다 더 감동시킨 것은 이 모든 일과 함께 기도에 더욱 열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여섯 번씩이나 일을 하다가 잠깐 멈추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왜 이렇게 자꾸 기도를 하느냐?"  그랬더니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들에게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와 힘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과 기도가 전혀 분리되지 않았고 일 속에서 그들은 주님을 만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오늘 본문의 엠마오 길에서 두 제자를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나를 만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제발 눈을 뜨고 나를 보아라.  네가 걸어가는 그 길에서도, 네가 밥을 먹는 식탁에서도 너는 나를 만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기도하는 그 시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일상 생활 속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이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세상 우주 모든 곳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엠마오의 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세 번째 교훈은, 이 어두운 밤길은 결국 우리를 소명의 새벽길로 안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소위 모든 신앙의 체험은 그 체험 자체가 영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체험은 다 한 순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체험하면 그 체험한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마치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체험만 붙들고 있으면 신비주의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현실을 외면한 채 어떤 환상에 붙들려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체험을 통해서 내가 지금 어떻게 변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식탁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해서 그랬습니까?  제자들이 그 체험한 것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도록 하셨습니까?

본문 3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잠깐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보는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떠나가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계속해서 보이셨다면 제자들은 너무 흥분해서 그 예수님을 만져보면서 현상에만 몰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나를 만났고, 그래서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는 너희들이 변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이 교훈을 제자들과 우리들이 깨닫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가슴이 뜨거워져서 말씀을 가슴에 품고 그들은 벌떡 일어나 엠마오를 뒤로 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것이 본문 32절과 33절의 말씀입니다.  32절과 3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그 다음 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두 제자는 이렇게 외치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그들은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 해가 지는 절망을 향해 걸어가던 그들이 이제는 해가 뜨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복음의 위대한 증인으로 일어섭니다.  이제 그들의 삶의 자리는 엠마오가 아닌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을 더욱 사랑하라'는 책을 쓴 메리 포플린은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그녀는 나이 40대 초반에 인생의 중요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40대 초반에 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그녀는 복음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계속해서 대학교 교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선교사가 될 것인가?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마음 속에 다가오고 있었을 때 한 권의 책을 읽게 됩니다.

맬콤 머거리지라는 기독교 작가가 쓴 책을 읽다가 마더 테레사가 일하는 인도 땅의 사역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거기에서 맬콤은 이런 글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본 인도의 마더 테레사의 사랑의 선교희는 단순히 사회사업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복음을 살아가는 곳이었다."

"복음을 살아가는 곳"이라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미국 텍사스에서 인도 캘카타의 마더 테레사가 일하는 곳으로 2달간의 자원봉사자로 떠납니다.  그때가 마더 테레사가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이었다고 합니다.  두 달간의 봉사를 마치고 많은 것을 느끼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가기 전 그녀는 마더 테레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저는 앞으로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때 86세의 마더 테레사는 미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세요."  그리고 이어서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는 쉽지요.  그러나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기는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이 살아가야 할 자리, 당신의 가정과 일터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가세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사랑의 사역의 시작의 터전이 될 거에요.  당신이 보고자 하는 눈만 있다면 세계 도처에서 캘커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당신만의 캘카타를 찾아가세요."

메리는 자기 고향 미국 텍사스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래 맞아.  저 인도의 캘카타는 나의 사역지가 아니야.  그곳은 마더 테레사를 위한 사역지이고, 하나님은 나의 사역지를 준비하셨어."

그녀는 자신을 임용하겠다고 한 대학 캠퍼스를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불신앙의 사조와 무신론의 사상이 넘쳐흐르는 대학의 캠퍼스, 그곳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젊은이들, 내가 그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손을 예수님의 손으로 잡아주고, 내 마음 속에 그들을 품고 일하기로 결단합니다.  대학교의 캠퍼스가 자신의 캘카타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제 그녀는 대학교에서 단순히 월급을 받는 교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이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져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이 바로 그녀의 예루살렘이요, 그녀의 캘카타였던 것입니다.  그녀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녀는 살아 계신 주님을 보게 되었고, 그녀를 기다리는 젊은 영혼들을 새롭게 발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절망하는 원인은 정치가 어렵거나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절망하는 원인은 구원자이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쁨이요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냥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십시오.  그리고 지금 내가 머물러 서 있는 이곳을 더욱 사랑하십시오.

환상과 기적과 같은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을 가지고 일어나 변화된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이 삶의 마당에서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나의 예루살렘은 바로 여기 이곳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곳도 바로 여기 이곳 내가 서 있는 이 삶의 자리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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