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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리고 길가의 교회와 성도들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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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길가의 교회와 성도들 (눅 10:25-37)
    
저의 신학교 동창이신 김태범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대구 삼덕교회는 ‘선한 사마리아인 통장’을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한 성도가 인터넷에 광고하였습니다. “드디어 선한 사마리아인 기금 통장을 만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나 기쁜 일 있을 때나 혹은 병중에 있는 이웃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지체 없이 보내주세요... 사랑을 많이 많이 날려주세요” 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 교회는 IMF 경제위기 때에 ‘사마리아인의 헌금’을 여러 해 동안 실시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드렸습니다. 지금은 교회 예산중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역을 지원하여 여러 어려운 교우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리고 길가의 교회와 성도들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최근에 대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파트 인근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56살의 한모씨가 마침 식당에 들어온 같은 아파트 주민 75세의 정모 씨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이미 소주 서너 병을 마시고 만취한 상태였던 한씨가 “윗 층에 사는 X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시끄럽게 한다”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같은 아파트 윗 층에 사는 정씨가 참다못해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만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1층에 사는 한씨는 여러 번 '윗 층에서 자꾸 쓰레기를 버린다'며 툭하면 같은 아파트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렸습니다. 정씨의 꾸지람에 격분한 한씨가 멱살을 잡고 식당 밖으로 끌고 나왔고, 곧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힘에서 밀린 노인 정씨가 길바닥에 쓰러지자 한씨는 주먹과 발로 무차별 폭행했고 각목과 맥주병도 휘둘렀습니다. 정씨는 뇌출혈과 팔 골절 등으로 전치 7주의 중상을 입었답니다. 주변에서 말릴수록 한씨의 폭행이 심해지던 때에, 길 가던 21살의 장모군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쓰러져 의식을 잃은 정씨의 몸을 보호하며 한씨의 폭행을 자신의 몸으로 막았습니다. 

소란이 끝나자 장군은 홀연히 자리를 떴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목격자의 말을 토대로 경찰청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등에 '살인을 막은 용감한 청년을 찾는다'며 장씨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 젊은이는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 비유를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말 합니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극적으로 반전되는 관계로 재미있다고 하는지 모르지만, 재미보다는 충격을 느껴야 하고, 분개할 수 있어야 하고, 나부터 사마리아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사마리아 사람의 헌신적인 희생을 보면서 조금이나마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 우리도 또 한 사람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자비와 자선을 가르치려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을 가진 사람의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이 된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마무리 하시면서 우리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성경 말씀 중에 이해가 되지 않아 목사에게 물어보십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물어보십니다. 그러면 친절하게 가르쳐드리고 아낌없이 격려해드립니다. 그런데 저에게 시험하려고 물어보시면 저도 잘 피해갑니다. 피하는 방법요? 예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대답하시지 않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하시므로 피해가셨습니다. 저도 “성도님은 무엇이라고 알고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라고 물어서 그의 답을 받아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 격려해드립니다. 

지금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유대교의 정통신앙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정말 사이비, 이단으로 몰아야 할 사람인가 시험합니다. 이 학자가 정말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걸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궁지로 몰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서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당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 사람, 율법학자는 유대교회의 공인된 교수요, 지금 예수님은 정통신학자들로부터 한번 테스트해보아야 할 사람, 갑자기 나타난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율법학자는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영생에 대한 간절한 욕구가 있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며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육체가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영혼이 다시 돌아와 영생 불사한다고 믿었습니다. 시체를 썩지 않게 보관하여 ‘미이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영생하고 싶어 합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불사약을 구하라고 동남동녀 600명을 내보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제주도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 율법학자는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하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상속 받겠습니까? 영생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요, 영생이란 무엇을 행해야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논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한 그 사람에게 다시 반문하시는 것으로 대화를 주도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고 반문하셨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율법에서 증거하고 있는 핵심적인 진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영생을 얻는 데 있어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명기6: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 율법교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인간의 4가지의 의지를 동원하여 말하였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19:18에서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교사의 대답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 율법 학자를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율법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아는 것에 그치고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사들은 그들의 집단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이고 고정된 신학에 매어 있었습니다. 율법교사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옳게 보이고 자랑스럽게 보이려는 하였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레위기 19:18의 말씀은 참으로 좋으나, 이웃의 개념을 확대하여 이방인들도 이웃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그렇게 달갑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 창기를 친구로 받아주시는 것도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19:33-34에 보면 이웃을 확대하여 이방인들도 사랑의 대상임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의 율법학자인 그는 이웃이란 철저하게 같은 유대인만이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우리 동족,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이나 나그네나 사마리아 사람, 혹은 창기나 세리와 같은 사람도 사랑할 사람이었지, 결코 무관심하게 대하거나 미워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방인으로, 유대 나라에 와서 거류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낳은 자녀들도 유대인이 낳은 자녀들과 같이 여기고, 자신과 같이 사랑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과거에 애굽에서 거류민이 되었었기에 유대 땅에 거주하는 사람도 다 같은 이웃으로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율법학자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랑을 실천해야하는 대상을 묻고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으로서 이웃의 한계를 어디까지 두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웃이란 대상을 어디까지 확대해야 하느냐? 이웃에 대한 의무가 미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경계선을 그어달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웃과 비이웃을 나누고, 내 편, 남의 편으로 경계선을 긋고, 울타리를 치려는 그런 사고방식을 깨드리시기 위하여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운 곤경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그가 우리와 같은 민족이든지, 아니면 우리 땅에 들어와 거주하는 외국인이든지 가릴 것 없고, 경계선을 그을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여호수아18:17에서는 ‘아둠밈 비탈’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둠밈 비탈이란 말은 “피의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은 800m 이상의 고원지대이고,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400미터나 낮은 계곡에 있었습니다. 무려 1200미터나 내려가야 합니다. 예루살렘 동쪽의 감람산의 높이는 905m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나그네를 때려 거반 죽게 만들고 옷을 벗기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갑작스럽게 어려움을 당한 나그네는 자기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는 목적도 모르고, 그의 직업이나 신분도 모르고, 가정 형편이나 경제적인 사정도 전혀 모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것뿐입니다. 그가 강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긴 것은 상관이 없는데, 인사불성이 되도록 얻어맞은 것이 문제입니다. 피가 계속 흐릅니다. 정신 차릴 수가 없고, 이대로 시간이 지나가면 저체온과 허기짐으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여리고 지방은 제사장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봉사하기 위하여 길을 재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나그네를 보고는 그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사장이 그 자리를 피하여 지나간 이유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혹시 숨어있는 강도가 나타날 수도 있어 무섭기만 하고, 종교적인 부정을 탈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죽은 시체를 만진 자는 7일 동안 부정하리라”(민19:11)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으로 수행하려면 시신을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강도만난 사람은 앞으로 죽을 수 있지만, 아직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마찬가지로’라는 말입니다. 레위인이라고 하면 제사장은 아니라고 해도 제사장을 도와서 성전에서 일하는 거룩한 사람이요, 동포의 어려움을 보고 눈감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목마른 사람, 배고픈 사람, 나그네 된 사람, 옷을 벗은 사람, 옥에 갇힌 사람, 가난한 사람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끔직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면,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 한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하는 중에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마음먹고 유대 땅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여행이란 재미가 있어야 하고,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여행 중에는 돈 쓰는 것이 여간 아까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돈의 위력과 중요성을 피부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음식점에 가서 3만원 넘는 쇠고기 갈비를 먹을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분에게 선물한다고 백화점에 가서 고급으로 10만 원 짜리도 살 수 있는데, 그런데 여행 중에는 10불, 1만원도 큰돈으로 보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애정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이적과 기적의 동기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보다는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사람이 어떻게 이런 험한 곳에서 죽어간다는 말인가. 그는 강도의 위험도, 사업의 손실도, 시간 지연으로 인한 고통도 감수하고 나그네를 돌보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짐승에서 내렸습니다. 자신의 여행을 위하여 준비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주고, 싸매어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하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갔으며, 하루를 함께 있어 간호하고, 다음 날에 주인에게 죽어가던 나그네를 부탁하면서 두 데나리온의 돈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죽어가던 사람을 주막에 인도해준 것으로 자기를 할 일을 다 했다고 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루를 그와 함께 있어 간호하고 돌아보고 주인에게 그냥 부탁한다고 말하고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까지 함께 있어주었고, 두 데나리온이란 많은 돈을 주면서 그의 사후관리까지 관심을 가지고 돌아본 것입니다. 끝까지 할 일을 다 하고, 의무 이상으로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하기가 싫어서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생각할 때에 도와줄 것도 없는 사람, 도움 받을 것도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은 도와주고, 어떤 사람은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와주다보면 한도 없고 끝도 없다고 걱정부터 합니다. 잘 사는 사람, 배운 사람, 예쁘게 잘 생긴 사람, 내가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도와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깨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고생하게 내버려둘 사람, 저런 사람은 죽도록 고생해도 당연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이들은 나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인생길에서 강도만나 거반 죽게 되었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주막에 데려가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에 있지 않고 긍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중에 교회는 왔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악수해주는 사람도 없다고 하면 비극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가 신음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바클레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1) 자신의 무모한 행위로 저지른 여행자처럼 스스로 불행을 초래한 사람까지도 우리는 도와주지 아니하면 안 된다. 2) 어떤 민족, 어떤 사람이고 간에 필요 중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다. 우리가 뻗치는 도움의 손길은 하나님의 사람만큼이나 넓지 아니하면 안 된다. 3) 도움이란 실제적이어야 하며 단순히 동정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는 정도로서는 안 된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첫째로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인간을 목적으로 다루지 않고 하나의 도구나 수단으로 생각하는 못된 사람들입니다. 성실과 정직함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부유하게 살고 싶어 하는 불한당입니다. 선한 목적은 반드시 선한 방법을 동반해야 합니다. 

둘째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입니다. 이들은 그럴듯한 이유로 자신의 의무에서 도피합니다. 긴급한 일이라고 하여 반드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의미 없이 바쁘기만 한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습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절대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하실 일에 관심만 있지, 나의 신분이나 경력, 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을 진정 불쌍하게 보는 눈,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는 행동하는 발과 섬기는 손이 있습니다. 자기의 것을 내어놓는 희생의 사람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진정 마음도 있습니다. 호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이 비유는 영생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이웃 사랑의 문제로 연결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 주 예수님의 삶과 사랑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려고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끝까지 당신을 내어주시고, 건져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그런 질문에 멈추지 말고, “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여리고 길가의 교회와 성도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한 생명이라도 살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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