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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코 가둘 수 없습니다 (빌 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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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가둘 수 없습니다 (빌 1:12-21)      

그릇 안에 담겨진 물은 그릇의 모양대로 담겨집니다. 그릇이 둥글면 물도 둥글어집니다. 그릇이 네모라면 물도 네모처럼 담겨집니다. 날이 추워 그 물이 얼음이 된다면 둥근 그릇에 담긴 물은 둥근 얼음이 될 것이고, 네모난 그릇에 담긴 물은 네모난 얼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그릇과 같고, 우리는 그 안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환경이란 그릇에 담겨 환경의 모양대로 만들어져 갑니다. 둥근 환경에서 사는 사람의 인생은 둥근 모습을 가질 확률이 높습니다. 각지고 모난 환경에서 사는 사람의 인생은 각지고 모난 모습을 가질 확률이 높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묘미가 있는 것은 늘 환경의 모양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가끔씩은 둥근 그릇에 담긴 물이 네모난 얼음이 되기도 하고, 네모난 그릇에 담긴 물이 둥근 얼음이 되기도 하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환경을 극복하고 예상을 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파격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파격을 선물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환경대로만 살라고 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깨뜨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요셉은 애굽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가장 낮은 노예였고, 후에는 감옥에까지 떨어졌습니다. 그의 인생은 감옥이란 환경에 갇혀 그 모양대로 되어갈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생을 요셉에게 주셔서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파격이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궁궐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애굽의 모든 학문과 사상을 배웠고, 뼈 속까지 애굽 사람이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정신에 스며든 사십 년 애굽 궁궐 교육의 효과를 한순간에 뽑아내시고, 그 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이스라엘의 민족혼을 불어넣으셔서 이스라엘의 명예로운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신앙의 능력은 환경을 이기는 데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환경을 이깁니다. 그는 환경에 끌려 다니는 사람,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람, 환경을 보면 그의 미래를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 환경을 조작하면 인생까지도 조작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남에게 빼앗겨도 마음은 여전히 부요하며, 남에게 위협을 당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몸은 병약해도 영혼은 천하를 호령할 만큼 강합니다. 급한 일이 다가와도 평정심을 잃지 않습니다. 몸은 갇혀 있어도 마음은 갇히지 않고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습니다. 

그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그 대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합니다. 그의 기쁨은 인생의 목적이 이루어져 진정한 삶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그는 환경 순응적 사람이 되기보다는 환경을 극복하는 사람이 되고자 힘씁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 사도야말로 이런 삶의 전형적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후반부에서 보듯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로 고발되어 체포된 후로 가이사랴에서 2년을 갇혀 지냈고, 그 후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어 또 2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본문 13절에서 그는 <시위대>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관청의 관정을 의미하는 <브라이도리온>이란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로마 황제의 직속 부대의 관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로 볼 때 바울 사도는 황제 직속 부대 안에 있는 감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는 이 때 기록한 서신들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당시에 감옥으로 바울 사도의 면회를 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무려 4년을 갇힌 몸으로 지내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수에게 인권 따위는 전혀 보장되지 않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당연히 얼굴은 초췌하고, 몸은 야위었고, 마음은 절망으로 병들고, 눈빛은 다 죽어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런 목표도, 꿈도 없이 살아가는 것을 저주하면서 원한에 가득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아무 잘못도 없이 갇혀 있는 억울한 사람이라면 그 원한은 더욱 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돌아왔을 게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는 따스함이 흐르고, 얼굴은 빛이 나고, 마음은 상대방에 대한 친절한 배려가 가득하고, 가슴은 기쁨으로 뛰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갇혀 있었으나, 갇혀 있지 않는 사람 같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가둔 이들보다 더 자유로워 보였을 것입니다. 

그의 모습이 감옥에서도 이처럼 아름다워 보였을 것을 알려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본문 18절 후반부에서 우리는 믿기 힘든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는 구절입니다. 그는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억울하게 몇 년씩 영어의 몸이 되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기쁨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가 기쁨을 언급한 것은 이곳만이 아닙니다. 

2장 17-18절을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 해도 기뻐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3장 1절에서는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고, 4장 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4장 10절에서는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라고 함으로써, 그 기쁨이 작은 기쁨이 아니라. 큰 기쁨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기쁨을 직간접으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기에 빌립보서에는 <기쁨의 서신>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바로 이 모습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는 감옥이란 환경에 의해 빚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수라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일반의 예측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의해, 감옥의 모습대로 만들어져가는 대신에, 오히려 감옥 안의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도권은 그의 손에 있었습니다. 감옥도 그를 가둘 수 없었고, 그의 기쁨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중 삼중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늘 불화하는 가정이라면 가정이 감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이 감옥일 수도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에 종사하고 있다면 직장이 감옥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옥들은 우리를 억압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몇 가지 선택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는 포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희망을 버리고 감옥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택에는 바울 사도에게 넘치던 기쁨은 없습니다. 눈물과 아픔만 있을 뿐입니다. 

또 하나의 선택은 파옥하는 것입니다. 감옥을 부수고, 간수를 쓰러뜨리고 탈출하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 <쇼생크탈출>의 주인공처럼 땅굴을 파고 벗어나는 것입니다.그러나 그 영화가 자유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주인공의 내면을 보여주는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주인공이 자신의 무죄를 밝혀 사회로 돌아가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탈출은 했지만, 여전히 아내를 살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지닌 채, 탈옥의 죄까지 덮어쓰고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탈출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탈출을 꿈꿉니다. 가정을 버리거나 직장을 벗어납니다. 그것이 단순한 도피라면 그 다음엔 더 큰 고통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승리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가르쳐주신 비결이란 <감옥 안에 있지만, 감옥에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울의 모습처럼 사는 것입니다. 감옥의 담장을 바라보면서 절망하는 대신 다른 것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께서 주신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의식으로 가득한 분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길 원했습니다.  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아멘!  바울 사도는 자신의 존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길 소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살고 죽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리스도를 높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길 원하심을 알았고, 자신을 부르신 목적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데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만 전해질 수 있다면, 자신의 처지는 어떠하여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가 여러 차례 기쁨을 말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비록 그는 감옥에 있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복음이 더 활발하게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갇힌 것이 어떻게 복음 전파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을까요? 14절을 읽어봅시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아멘. 당시 성도들은 바울이 옥에 갇히자 낙심한 게 아니라, 오히려 크게 힘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도 바울처럼 주님을 전하다가 갇히자. 이게 성도의 영광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더 담대히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복음 전파에 게으르던 사람들이 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바울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옥에 계시니, 우리라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열심을 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 바울을 질투하고 미워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핍박자였던 바울이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전하고, 더 많은 교회를 세워 성도들의 존경을 받는 것을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갇히자 <드디어 기회가 왔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우리가 열심히 전하자. 우리도 바울 이상으로 하자>고 생각하고 열심을 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정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든, 복음만 전해진다면 아무런 문제될 게 없었고,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15절을 보보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고 했지요? 

그 다음 16절을 보면 착한 뜻으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 다음 17절은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18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할렐루야!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방법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에, 자신이 감옥에 있는 것과 상관없이, 또 사람들의 마음과 상관없이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지는 한 가지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만 보였을 뿐, 감옥의 담장과 그 안의 불편한 생활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의 존재 가치는 <그가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가?>에 의해 평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목적을 잃지 않고 전진했던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열악한 환경으로 자원하여 들어간 이들도 많습니다. 

학교 선생님이란 좋은 환경을 버리고 인도 캘커타의 빈민촌 뒷골목으로 들어간 테레사 수녀, 신학자요 목사요 오르간 연주자 겸 제작자로 화려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떠나 아프리카 람바레네의 물과 원시림 사이로 들어간 슈바이처, 덜 고생하고 살 수 있는 길을 마다한 채로 자식을 버릴 수 없어서 자식 하나 성공시키겠다는 목적을 품고 여성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온 몸으로 감내해냈던 이 땅의 이름 없는 많은 어머니들, 평생의 목표를 이루고자 단돈 몇 십, 몇 백 불을 들고 유학을 떠나 말도 못할 고통을 감수하면서 주경야독했던 많은 가난한 유학생들,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로, 농어촌 지역 목회자로, 특수 사역자로 헌신하고 있는 많은 분들, 이들이 그 고통으로 들어가,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그들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목적의식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이유도 단 하나,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인기에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에도 좌우를 돌아보지 않으셨고, 인기나 안락함보다 오직 생명을 구원하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위해 전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6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 분명히 마음에 담고 계셨습니다.  

지금 무엇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환경입니까? 목적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두려워 마시길 바랍니다. 목적을 향해 나간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바울의 목적이 분명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감옥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그를 지키셨습니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유지하는 데 가장 좋은 것은 우리 자신을 기도 속에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통해 당신의 메시아 사명을 늘 마음에 두셨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전도를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 부분을 보았습니다만, 그 앞 1장 35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아멘. 그 기도는 메시아 사명을 확인하시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메시아 사명을 확인하셨기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유혹받지 않으시고 목적을 향해 나아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 앞에 엎드려 존재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 깊이 기도하십시오. 이미 그 목적을 알고 있다면, 그 목적의식이 흐려지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십시오. 환경의 문제는 주님께서 풀어주실 줄 믿으십시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 가리> 이렇게 찬송하면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목적을 이루는 감격이 우리에게 넘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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