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음행을 제하라 (고전 5:1-5, 9-13)

첨부 1


음행을 제하라 (고전 5:1-5, 9-13)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린 본교단 총회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매년 총회 때마다 죄스럽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노출되는데, 금년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분쟁이 일어난 교회에서 양측의 성도들이 총회 현장에 찾아와, 총대들에게 서로 상대방을 비방하는 호소문을 나눠 주고, 비리를 폭로하는 차량 방송을 하다가, 목요일 오후에는 그만 총회 장소까지 점거하는 바람에, 몇 시간 동안 회무를 처리하지 못한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분쟁 중에 있는 교회가 ‘제자 교회’라는 이름의 교회여서, 과연 주님의 제자들이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실로 통분한 심령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교회가 분쟁없이 평안한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돌아오면서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황금빛 들녘을 바라보노라니, 어떤 논은 노랗게 익어가는 벼들로 가득한데, 어떤 논에는 벼 밭에 여기 저기 풀포기들이 우뚝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 우리 교회는 가라지 같은 신자가 한 사람도 없는, 알곡 신자들로 가득하여 주님의 추수를 기다리는 구원의 명문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려보기도 했습니다. 

총회 때마다 분쟁 중에 있는 교회들이 총회 장소에 찾아와서, 서로 자기들이 옳으니 자기편을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광경을 보며, 통분한 심령을 금치 못했던 총회의 총대들처럼, 고린도 교회 역시 바울 파, 아볼로 파, 베드로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어서 분쟁한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한 심령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질책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인 음행 죄에 대하여 또 다시 통분한 마음으로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서 강해를 시작할 때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고린도는 지금의 그리스에 있었던 도시로서, 당시 60만의 인구를 헤아리는 번창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또한 고대 올림픽에 버금가는 ‘이스므스’ 경기가 바로 고린도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수많은 여행자와, 상인들의 필수적 통행로였습니다. 또한 고린도에는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 태양의 신 ‘아폴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등을 숭배하는, 12개의 신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대 상업 도시들이 으레 그렇듯이, 고린도 역시 다양한 외부 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어떤 부도덕한 풍습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문제는 그 사회의 도덕적 척도라 할 수 있는데, 고린도는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한 예로 고린도의 가장 높은 곳인 아크로 고린도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매춘을 자행하는 종교적 창녀들이었습니다. 고린도가 성적으로 얼마나 문란하였는지, 고린도인 하면 마치 방탕한 사람의 대명사와 같았습니다. 이렇게 음란하고 부도덕한 도시가 곧 고린도였는데, 그 음란한 악풍은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서, 5장에 기록된 패륜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의 어떤 교인 중에, 자기의 계모를 취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 아비의 아내란 물론 생모가 아니고, 계모를 뜻합니다. 아마 아버지가 후처를 얻어 살다가 세상을 떠나자, 자기 아버지의 후처를 아들이 취한 것 같습니다. 레 18:8절에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은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절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중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도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레 20:10)

왕상 1:1에 보면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하들이 ‘아비삭’이라는 아리따운 처녀로 하여금, 다윗 왕을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따듯하게 해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그 아비삭과 동침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납니다. 다윗 왕이 세상을 떠난 후, ‘아도니야’ 라는 아들이 솔로몬을 대신하여 왕위를 가로채려다가 실패하지만, 일단 용서를 받습니다. 아도니야는 얼마 후 아버지 다윗 왕을 시중들던 아비삭의 아리따움에 반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가 솔로몬 왕에게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옵소서.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라고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솔로몬은 의분을 금치 못하며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우심이 마땅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된 ‘브나야’를 보내어 아도니야를 죽이도록 합니다. 이렇듯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패륜 사건을 아주 공의롭게 처리하였습니다. 아도니야의 요구가 인륜에 반하는 중대한 죄악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음행에 대하여 아주 강력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간음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간음하는 남녀를 발견하면, 둘 다 사형시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야곱의 장남 르우벤은 서모인 빌하와 간음함으로써, 야곱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장자의 권리를 빼앗기고 그 후손까지도 지리멸열하게 됩니다. 음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는 다윗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은 휘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즉시 회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멸망하는 심판은 면했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음행 죄를 범한 다윗을 향해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백주에 동침하리라.”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의 집안에는 불행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밧세바와 다윗이 간음하여 태어난 아이의 생명을 거두셨습니다. 그 후 다윗의 장자 암논이 그 이복누이인 다말을 겁탈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암논은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그 후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 대항하여 반역을 일이키고, 다윗의 첩들을 백주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능욕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은 진압되고 압살롬도 죽게 되었으나, 그 모든 일은 다윗에게 있어 실로 씻기 어려운 상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음행에 대해 엄히 심판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교인이, 아비의 아내 곧 계모와 음행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방인 곧 불신 세계에도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즉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아무리 성적으로 문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할지라도, 적어도 계모와 음행하는 것은 부끄럽게 여기고 피했던 것입니다. 이런 음행은 인간의 마지막 도덕성까지도 짓밟는 패륜적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성도들 가운데서,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이와 같은 교인이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범죄는 교회의 거룩한 본질을 파괴하는 죄악이라는 점에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과 달리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가 그 거룩성을 상실하게 되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나 성도가 불신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면, 전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불신 세계 사람들도 정죄하며 꺼리는 죄를 범치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불신 세계 사람들도 음행을 하고 방종하게 사는 사람들을 난봉꾼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정죄합니다. 특히 근친상간을 하는 자는 인륜을 저버린 짐승 같은 자로 취급합니다. 도둑질 하는 사람들도 도둑놈이라고 하며 정죄합니다. 살인이나 강도짓 하는 이들도 정죄합니다. 이웃을 속여 자기 이익을 채우는 이들을 사기꾼이라고 해서 상대하는 것을 기피합니다. 술을 탐하는 이들도 술주정뱅이나 알코올 중독자로 정죄합니다. 도박을 일삼는 이들을 노름꾼들이라고 부르며 상종하지 않습니다. 일도 안하며 놀고먹는 사람들도 손가락질합니다. 불신자들은 불신앙의 죄를 잘 모르지만, 윤리도덕적인 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불신자들도 정죄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목사님이 신학생이었을 때, 자기 형에게 예수님 믿고 교회 나갈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이 “야 우리가 늘 노름을 하는데, 그 도시에서 제일 규모가 큰 교회의 장로도 한 패거리다. 그 장로는 매번 큰돈을 잃고서도, 어디서 돈이 나오는지 계속 노름판에 끼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 소리를 들은 목사님이 형에게 전도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만일 세상 사람들도 손가락질하는 죄를 범한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가 없고, 전도할 명분조차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부디 세상 사람들에게 거룩한 주님의 자녀들로 인식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절에 보면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이방인 중에도 없는 악행, 곧 계모와 음행하는 자가 있다는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것은, 범죄자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태도였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는 아비의 아내와 음행하는 자를 용납하고,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죄가 교회 안에까지 침투하게 된 것을, 통한히 여겨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않았습니다. 

여기 통한히 여긴다는 말은, 죽은 자를 애도할 때 쓰는 말로서, 즉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 가운데 음행 죄를 범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를 인하여 애통하며 슬퍼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죄에 대해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로 죄에 대하여 안이한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위험한 지경에 빠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를 통한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통한히 여김으로써 죄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 애통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가 있습니다. 또한 죄를 미워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죄를 통한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절 보면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도적 권위로 비록 몸으로는 고린도 교회와 떨어져 있으나, 영 곧 마음으로는 고린도에 이르러 계모와 음행한 자를 정죄하고, 교회에서 추방시키는 심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현재 하나님의 형벌이, 눈에 보이게 죄인들에게 직접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죄인을 이미 정죄하여 심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종말 심판 때에만 심판하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죄를 알고 계십니다. 또한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 범한 자들을, 미래가 아닌 현재에 이미 정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종말 심판은 이미 정죄하고 심판한 죄인에게, 그 형벌을 집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오늘도 하나님이 나의 모든 행위를 온전히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시인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셔서 내 눈에 안 보이고, 나는 너무 작아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개개인의 행위를 낱낱이 살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대로 의와 진리와 선을 행하는 성도들에게는 상급을 준비해 놓고 계시고, 불의와 악을 행하는 죄인들에 대해서는 이미 정죄하시고 심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늘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합니다. 사람이 알든 모르든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자세로 생활해야 합니다. 

4,5절에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죄악에 대한 애매하고 둔감한 태도에 비해, 사도 바울은 불타는 듯한 심정이었고, 단호하고 확실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몸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마음으로는 고린도 교회에 가 있었고, 이런 패륜자의 죄를 규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그 음행한 사람을 처리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라는 말씀은, 2절에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는 말씀과 함께 1)제명 출교를 의미한다는 해석과 2)질병과 고통에 걸리게 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권능 있는 권징은 사도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행한 권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징이 1)출교 또는 파문이었든지 2)질병이나 고통이었든지, 이렇게 비록 엄중한 처벌이라고 해도, 그것은 보복적인 형벌은 아니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처벌만을 위한 징계가 아니라, 오히려 양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징계였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처벌이나 징계의 배후에는, 죄를 범한 인간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신생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징계는 그 자신을 구원하고, 교회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자를 옹호하고 방치해 두는 것은 저를 사랑함이 아니요, 오히려 범죄자를 영원한 멸망의 길에 방치해 두는 또 다른 죄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헌법 권징 조례 제 2조에 보면 , 권징의 목적은 “진리를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권병과 존영을 견고하게 하며, 악행을 제거하고, 교회를 정결하게 하며, 덕을 세우고, 범죄한 자의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권징 규례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정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성도가 범죄할 경우 먼저 회개를 권면하고, 그것을 듣지 않는 경우에는 한두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또 권면하되, 그래도 회개치 않고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그 사실을 알리고, 교회의 공식적인 말도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이나 세리같이 여기라는 말씀은, 당시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난 세리나 이방인처럼, 교회 역시 죄인들을 출교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권징 규례를 성실하게 이행했습니다. 그래서 거짓 성도와 수많은 이단자들을 출교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보존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도 이러한 권징 규례를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이런 권징 규례가 잘 시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교회는 세상의 죄에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무엇보다도 죄인이 회개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또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징계하여 출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성결해집니다. 교회는 명백하게 죄를 범하고도 회개치 않는 자들을, 주님의 명령을 따라 엄히 징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요, 그와 함께 공멸의 길을 걷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음행은 타락한 인간이 범하는 대표적인 범죄입니다. 그리고 이 범죄는 음행한 사람의 몸은 물론, 그 영혼까지도 더럽힙니다. 또 음행은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더럽힙니다. 때문에 하나님도 음행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죄에 비해 더 엄중히 처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경계하고 피해야 하지만, 특별히 음행을 피해야 합니다. 크리소스톰은 이러한 죄악은 흑사병을 제거하듯이 교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음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엄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음행 죄를 습관적으로 범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다른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음란한 자에게는 천국을 기업을 주시지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결단코 천국 기업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음행죄 간음죄를 멀리하고, 자신을 성결하게 지켜 나아갈 수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