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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를 선택하는 용기 (사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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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선택하는 용기 (사 11:1-9)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 위험한 세상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추분에서 한로를 향해 가는 절기답게 날씨가 아주 선선합니다. 여물 든 벼가 서풍에 익어 뿜어내는 누런빛이 얼마나 평안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농부들은 붉은 고추를 내다 말리고 목화는 백설처럼 터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붉게 익은 감 열매가 장관을 연출할 겁니다. 옛날 둥근 초가지붕 위에 보름달처럼 달려 있던 박도 그리움으로 떠오릅니다. 

계절은 이렇듯 아름답지만 사람들이 빚어내는 삶의 풍경은 그렇지 못합니다. 시리아 사태는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없고, 케냐에서 벌어진 인질극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로 수백 명이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산 상속을 노린 존속 살해 사건이 벌어져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묻지마 범죄로 어린 학생이 살해당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라는 말이 무색해지곤 합니다. 

평화의 꿈은 유구합니다. 이 말은 인간의 역사가 갈등과 분쟁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에덴 이후의 세계는 형제간의 갈등의 역사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형제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헤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장자권을 둘러싼 싸움으로 인해 오랜 반목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미워하여 구덩이에 가두었다가 노예로 팔아버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원형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디 세상에 형제 간의 갈등만 있겠습니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저마다 중심이 되려 할 때 세상은 전쟁터로 바뀝니다. 남들의 배고픈 사정은 아랑곳없이 제 배만 불리기에 급급하는 사람들, 자기 편안함만 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과도한 욕망에 속절없이 끌려갈 때 우리 속에 있는 신성한 불꽃은 꺼지고 맙니다. 누군가가 울고 있을 때 그 옆에서 웃지 않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피렌체의 개혁자였던 사보나롤라는 "사랑을 해치는 자가 파문당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는 세상은 우리에게서 타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빼앗아 갑니다. 좌절과 분노와 원망이 독버섯처럼 자라면서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해갑니다.

• 어처구니없는 꿈

이사야는 애굽과 앗시리아라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늘 생존의 위협을 받던 조국의 운명을 늘 안타까이 여겼습니다. 전쟁이 끊일 사이 없었던 세상이었지만 그는 평화의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족들의 운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었기에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소국들을 억압하는 강대국들은 하나님의 엄한 추궁을 받게 될 것임을 예고하면서도 강대국들의 멸절을 소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꿈꾸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다.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사19:23-24)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꿈이지만 그는 그 꿈을 차마 버릴 수 없었습니다. 꿈을 버린다는 것은 결국 비관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불신앙이었으니 말입니다. 평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헌신을 통해 옵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종신교수인 현경 박사는 알자지라 TV에서 본 한 광고를 즐겁게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년이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축구공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높은 시멘트 담 너머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실망한 소년은 시멘트 담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팔레스타인 쪽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저쪽에서 놀고 있던 또래의 팔레스타인 소년이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그 공을 힘껏 차 담을 넘겨 돌려보내준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p.126)

중요한 것은 그 '틈'입니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틈이 없었다면 이런 멋진 장면은 연출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인 김지하는 <틈>이라는 시에서 아파트 사이사이 빈 틈으로 불어오는 꽃샘바람에 감응하여 "갇힌 삶에도/봄 오는 것은/빈 틈 때문//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고 노래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혀 소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어놓은 모든 경계선을 가로지른 분이십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의인과 죄인, 성과 속 사이에 길을 내 서로 통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삶으로 만드신 그 길을 우리 길로 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영,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 위에 내리는 분이 오신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제게 깊이 감응된 구절은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라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오직 주님만을 모든 판단과 실천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말일 겁니다. 오시는 그 분은 세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재판하지 않으십니다.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도 않습니다. 그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이루는 것이 그의 꿈입니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 중에 원로 언론인인 임재경 선생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분이셨지만 오래 전 독일에 머무는 동안 들었던 독일 교회 이야기 두 가지를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는 옛 동독의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호네커가 러시아에서도 쫓겨나 오갈 데가 없게 되었을 때 반공주의에 철저했던 한 목사님이 그를 자기 집에 모셨던 일입니다. 러시아의 옐친에게 몸을 의탁했었지만 통일 독일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던 옐친은 그를 독일로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런 결정을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길 잃어버린 양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이데올로기를 훌쩍 넘은 신앙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독일의 총리인 메르켈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1954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교단 책임자가 파송 받고 싶은 어디냐고 묻자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책임자는 그를 동독의 브란덴부르크의 작은 마을 템플린으로 가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기꺼이 그 파송을 수용했습니다. 억압이 있는 그곳이야말로 자기가 부름받은 자리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메르켈은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임재경 선생이 감동한 것은 이런 자기희생과 헌신입니다. 세상이 기독교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는' 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모든 폭력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그곳은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상생하며 살아가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세상의 모습을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유려한 형상언어에 담아냈습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6-9)

이것은 자연의 본성과는 맞지 않는 꿈입니다. 육식동물들이 초식동물로 환골탈태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사야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동물 상징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결국 인간 세상에 대한 이야기임을 압니다. 우리 속에는 이리, 표범, 곰, 사자, 독사도 있고, 양과 염소, 암소와 젖먹는 아기도 있습니다. 

한 사회 속에도 전자에 속하는 이들이 있고 후자에 속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꿈꾸는 것은 그들의 평화로운 공존입니다. 강하다고 하여 약자를 함부로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는 세상 말입니다. 그런 세상은 다른 이들을 자기 방식대로 동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함께 우정을 나누면서 평화의 기운을 주변에 퍼뜨립니다. 이반 일리히(Ivan Illich, 1926-2002)는 이런 삶의 방식을 'con-viviality'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생기를 불어넣으며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이르는 말입니다. 평화란 네가 있어 참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이라지요? 진정한 경건이란 이 말 한 마디를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 세상이 올까요? 저절로 오지는 않습니다. 평화를 미워하는 이들 사이에 살면서도 단호히 평화를 선택하는 이들의 용기를 통해서 옵니다. 평화를 선택하는 이들은 많은 경우 경계의 시선에 시달리거나 의구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낯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평화를 꿈꾸고 사랑하는 이들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그 운명을 사랑하십시오. 그때 영원의 빛이 우리 속에 비쳐올 겁니다. 삶을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사야는 그런 하나님의 빛과 만났기에 역사에 대한 이런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그 빛은 우리 속에 있는 일체의 허위나 가면, 갑옷들을 벗겨냅니다.

• 벌거벗음의 길

하나님의 빛과 만나 평화의 사도로 살았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10월 4일은 그의 축일입니다(1226년 10월 4일). 그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간 날이라는 말입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리자 그는 산 다미아노에 머물고 있던 성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가 수도회를 시작했던 작은 예배당 포르티운쿨라에서 임종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옷을 벗겨 맨바닥에 눕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벌거벗은 채 바닥에 누움으로써 자기의 새로운 탄생을 재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일찍이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작정했을 때 아씨시의 귀도 주교와 아버지 피에트르 앞에서 옷을 다 벗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세상에 속했던 것들을 벗어던지고 그리스도를 향한 방랑자로 살겠다는 상징적 행동이었겠지만, 그의 벌거벗음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우리 위에 뭔가를 입고 또 입습니다. 적대적인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세라는 옷을 입기 위해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 옷이 두꺼워질수록 자아도 강화됩니다. 자신이 마치 뭐라도 된 것 같이 느낍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많이 입는다는 것은 그만큼 부자유스러워진다는 말입니다. 믿음생활이란 가벼워지기 위해 자꾸만 벗고 또 벗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자기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로 알려진 <평화의 기도>는 사실 그가 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의 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기에 그의 기도라 해도 무방합니다. 평화가 무너진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그 기도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나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십시오./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불화가 있는 곳에 일치를/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심게 하소서./오 거룩하신 주님/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시고/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우리는 줌으로써 얻고/용서함으로 용서받고/죽음으로써 영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아멘." 

우리 삶이 이 기도를 몸으로 번역해내는 과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를 선택하는 용기를 가질 때 우리는 이사야, 프란체스코, 그리고 우리 주님과 같은 길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선하고 따뜻한 기운이 세상에 번져가는 꿈을 꾸며 오늘도 내일도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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